246화. 보물들은.
후공은 조금 더 머물렀다.
흑전주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고, 누군가는 곁에서 호법을 서야 하는 것이다.
강호의 위험은 예상할 수 없으니 덩그런히 흑전주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었다. 최소한의 회복 기대치는 7할.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외상의 치유는 이미 끝났고, 내상도 구엽구화초를 통해 빠르게 진전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천공단은 그곳에 없었다.
**
사천 중서부.
태림각.
흑전의 은신처 중 하나.
“으으으…….”
“으으아아…….”
청소를 막 끝낸 두 하인이 수화를 나눴다.
이제 쉬자, 저녁도 먹고.
그런 대화가 손짓으로 오갔다.
대저택인 탓에 낮부터 시작한 청소였는데, 마쳤을 땐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흑전이 수개월 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최소 반년이다.
그럼에도 하루도 쉴 수 없다.
매일 매일 이런 생활을 해야 한다.
귀를 멀게 하고 혀를 자른 이들.
흑전에게 자신들은 개미보다 못한 목숨.
꼬투리가 잡히면 남은 두 눈마저 멀게 될지도.
그래서 청소하는 짐승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빗자루를 정리하다 하인 하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손짓했다.
- 안개야.
- 어? 진짜.
다른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는 빠르게 짙어져갔다.
안개라고 말한 의미는 바로 이해했다.
마치 그 밤과 같다.
그들이 왔던 밤.
- 그 사람들, 어떻게 됐을까?
- …….
안개가 짙게 깔린 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들.
그들의 젊은 두목도 떠오른다.
그의 목소리도.
‘너희는 떠나도 좋다. 향후 흑전이 너희를 찾을 수 없게 하겠다.’
그렇게 말했었다.
- 죽었겠지?
- …….
그가 말한 대로 되길 마음으로 빌었지만, 결과는 이미 나왔을 것이다. 모두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래도 믿어지는 건 있다.
-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기억 나?
- 기억 나.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만난 적이 없다.
- 그래. 그라면 그 약속은 지켰을 거야.
- 맞아. 그의 말은 마치 별빛이 소리를 내는 것 같았으니까.
왜 그가 반짝여 보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말했을 뿐인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뢰를 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최후를 맞는 순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흑전이 찾아올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바라본 지붕 위로 흑전의 고수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땐 죽음을 맞게 되겠지.
설마 흑전의 고수들이 이미 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의 끝에 시선을 들어 지붕을 둘러봤다.
없다. 없다. 없다.
그렇게 둘러보다 한순간 굳어버렸다.
‘어……?’
‘거짓말…….’
한 지점에 그림자들이 보인 것이다.
두 하인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고, 연신 뒷걸음질쳤다.
“어어……?”
“아아아……!”
우측 전각 지붕 위, 안개 너머로 다섯 그림자가 보였다.
둘은 서 있고, 둘은 앉아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아예 팔을 괴고 드러누워 있는 모습.
……온 건가?
안개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고 검게 보일 뿐이라 더 공포스러웠다.
그때 누워 있는 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요. 우리 좀 멋지게 등장하지 않았어요?”
“멍청아, 저분들 안 들려.”
“아, 그렇지.”
은앙개의 타박에 소천개가 머리를 긁적였다.
무산쌍웅이 먼저 신형을 날렸고, 그 뒤를 두 거지와 남궁연이 뒤따랐다.
그제야 두 하인은 알아봤다.
주춤한 것도 잠시 이내 활짝 웃었다.
‘살아있어!’
‘이들이 왔다는 건……?’
환희에 차 바쁘게 손짓했다.
천공단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
대신 각자 손으로 땅에 글을 적었다.
- 너희들 형님 말씀 안 믿었지?
- 솔직히 말해 봐!
무산쌍웅이 다그쳤고,
- 나 아까 멋지지 않았어요?
- 내가 더 멋지지 않음?
소천개와 은앙개가 누가 멋졌냐며 물었다.
그나마 남궁연만 제대로 된 글을 적었다.
- 두 분은 이제 자유입니다. 흑전주와 그의 수하들은 죽었습니다.
두 하인은 환희에 차 바로 땅에 답변을 적어갔다.
- 믿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환한 미소로 거짓말하고,
- 둘 다 너무 멋있었어!
칭찬하고,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글을 적은 후 머리를 연신 숙여갔다.
잡혀온 건 일년 반 전쯤.
말을 잃고 소리를 잃은 것도 고통이었지만, 그보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절망이었는데, 이들이 돌아왔다. 이들이 끝내 버렸다.
젊은 두목이 말한 대로였다.
너희는 떠나도 좋다.
향후 흑전이 너희를 찾을 수 없게 하겠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 여러분들은 누구십니까?
- 여러분들의 두목은 누구십니까?
그렇게 땅에 글자가 적혀가니,
사소한 경쟁에 목숨을 거는 천공단답게 지면 위로 답변이 쏟아졌다.
- 우리는 멋쟁이!
- 우린 강호 제일의 무력 집단.
- 우리는 천공단.
- 두목은 천공단주!
- 천화서고 대공자!
‘천공단…….’
‘천화서고 대공자…….’
두 하인이 마음으로 되뇌었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툭 하고 보따리 하나가 놓였다.
전표와 금전이 가득 든 보따리였다.
*
흑전의 은신처는 다섯 곳.
다른 곳들도 비슷한 상황을 맞았다.
삼삼오오 나뉜 천공단의 발길이 닿았다.
상관월이 흑전주가 되면서 끌려와 삶이 어그러진 이들은 자유를 얻었고, 받은 상처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막대한 금액의 돈 보따리를 받았다.
작게나마 위로가 되길.
그런 마음이 함께 담겼다.
*
그렇게 열흘.
하나둘 천공단이 복귀했다.
복귀한 천공단에는 은소소와 당초도 있었다.
돌아온 은소소는 천공단주의 부름을 받았다.
그렇게 마주한 자리, 후공이 입을 열었다.
“소저,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소저를 만난 건 제겐 큰 행운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찻잔은 뜨거운 김이 모락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은소소의 표정은 차가움 반, 새침함 반이 되었다.
“대공자, 섭섭하네요.”
후공은 의미를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미소를 머금었다.
“섭섭할 이야기입니까?”
“대공자의 말씀이 꼭 선을 긋는 것 같으니 섭섭할 수밖에요.”
덕분이라면 대공자 덕분이고,
행운이라면 그녀가 누구보다 행운이었다.
대공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팔다리가 잘리고 서역.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누가 봐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대공자가 예의를 갖춰 공을 자신에게 돌리니, 선을 긋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냥 다 내 덕분이지 않느냐. 고맙지 않느냐!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하하하하!”
“웃지 마세요. 진심이에요.”
그럼에도 후공은 한참이나 웃었다.
은소소의 맹랑함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이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은소소가 알 수는 없는 일.
덕분에 은소소의 입은 부루퉁 더 튀어나왔다.
‘뭐야.’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이 사람은 왜 제멋대로야.
왜 내 앞에서 한 번을 긴장하지 않는 거야!
자신과 마주한 젊은 남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잘 보이려고 하는 탓에 어색함이 묻어나왔다. 애써 감추려 해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다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람만은 아니었다.
잘난 건 이미 겪어서 알고 있지만…….
내가 아예 여자로 보이지 않는건가?
이미 정혼자가 있는 건가?
그런 생각 한편으로 떠오르는 건,
‘내가 천공단이 되는 걸 원치 않는 건가? 왜?’
그렇게 물으려 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저, 다 제 덕분이라고 해두죠.”
“물론이에요. 제 마음은 변치 않아요!”
“좋습니다. 사실 소저께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드리려 했는데, 안 드려도 되겠군요.”
“대공자, 넣어 두세요.”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 했고, 소저는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드리려던 선물, 명청령수는 다른 분께 드리는 것…….”
“자, 잠시만요!!!”
은소소가 다급히 외쳤다.
손까지 뻗으며 말을 막은 그녀는 뛰지도 않았으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명청령수를 잊고 있었어!
“대, 대공자, 제가 착각했어요. 사실 다 제 덕분이에요. 제가 없었어 봐요. 초대장이 없이 어떻게 경매장에 갈 수 있었겠어요. 저를 만난 건 대공자의 행운이에요. 틀림없어요!”
“방금 변치 않는다고…….”
“잊어버리세요. 제발요.”
은소소가 간절한 눈빛에 손까지 모았기에 후공은 다시금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명청령수.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과실의 액.
경매의 실체를 알면서도 명청령수를 차지하겠다고 경매가를 올려 가던 은소소는 그렇게 선물을 받았다.
*
이어 마주한 건 무산쌍웅.
두 사람 앞에는 두 자루 비수가 놓였다.
화섬존자의 화섬비.
경매 당시 지하에 있긴 했어도 뒤에 경매에 나온 보물이 무엇인지 들었기에 쌍웅은 의미를 이해했다.
“형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지금 저희가 지니고 있는 비수도 신병이기입니다.”
형님께서 선물을 하려 한다.
고마움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마음이면 충분했다.
어째 늘 받기만 하는 것이다.
처음 만나서는 목숨도 구함받고, 공청석유도 받았고, 아우로도 받아주셨고, 천공단이란 동료도 안겨주었다.
지금도 차고 넘쳤기에 정중히 사양했다.
“그래요? 제 눈에 두 분의 비수가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습니다만.”
“하하, 형님의 식견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사실 저희의 비수는 대단합니다. 그저 보여지는 바와 실체가 다를 뿐이랄까요. 자, 그럼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쌍웅 중 하나가 화섬비 하나를 집어드는 동시에 자신의 비수도 꺼냈다.
“형님, 보십시오. 이렇게…….”
화섬비와 비수를 부딪힌 순간,
서걱!
원래 지니고 다니던 쌍웅의 비수가 종잇장처럼 썰려 반토막났다.
“어…….”
“뭐여? ……두부여?”
넋이 나간 쌍웅이 화섬비와 토막난 비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손이 뻗어왔다.
“뭐 두 분이 필요없다면야…….”
형님이 화섬비를 챙기려 했기에 쌍웅이 다급히 손을 뻗어 붙잡았다.
“형님!”
“형님, 잠시만요!”
그러곤 쌍웅이 멎적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몸을 일으켜 예를 취했다.
“형님, 감사합니다!”
“실로 보물입니다.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은 낭인왕.
천공단에서 유일하게 도(刀)를 쓰는 낭인왕 앞으로 도왕의 청강도가 내밀어졌다.
“어……?”
낭인왕이 멍해졌다.
경매의 보물 중 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한 터. 낭인왕은 감격에 겨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럴 땐 말보단 행동이지!
놀람도 잠시 이내 짖었다.
미쳐 날뛰며 방안을 짖으며 뛰어다녔다.
덕분에 후공이 멍해졌다.
잊고 있었다.
틈만 나면 짖는 놈이었지?
“그만.”
제지했지만 낭인왕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이 뭔가. 먹는 건가? 그런 거 모른다.
더 열심히 뛰고 짖다가 급기야 달려들었다.
손을 핥으려고도 했기에 후공이 기겁해 손을 들어올려야 했다. 그럼에도 낭인왕은 폴짝폴짝 뛰어 핥으려 했다.
그것이 화를 불러왔다.
“그만하라고 미친 새끼야! 확 그냥 죽여버린다!”
그 분노에 검령이 착각했다. 번쾌친은 그대로였지만 검령은, 뭐하는 새끼야! 같은 심정. 그대로 날아들어 낭인왕의 목을 겨냥했다.
그제야 낭인왕이 멈췄다.
주눅들진 않았다.
주눅이 뭔가.
형님의 반말이야 처음 매장당할 때부터 들었던 것이고, 형님의 검이 자신을 죽일 일도 없다.
그저 도왕의 청강도를 빼들어 붕붕 휘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형님! 어떻습니까?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제가 도왕이 된 것 같습니다.”
“나가.”
“넵! 하하하하하!”
나간 뒤에도 낭인왕의 웃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