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가능성을 보다.
이어 마주한 건 당초.
당초는 멍해졌다.
눈앞에 놓인 만년설삼이 자신 쪽으로 내밀어진 것이다.
“어…… 천화서고 형님, 이걸 왜 제게.”
한 것이 없다.
그저 따라다닌 것이 전부였다.
“천화서고 형님,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당초가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흑전의 암계가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서역으로 끌려가고 있을 터였다. 훗날 할아버지가 나서 구함을 받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팔다리가 없는 몸.
절망 속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자신이 선물을 해도 모자랄 판에 선물을 받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공이 웃음 지었다.
당초를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말할 때마다 꼭 천화서고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보여서 정이 가는 녀석이었다.
“당 형, 받지 않으면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라…… 그럼 안 되는데…….”
앞으로 아는 척 말라는 협박에 당초가 당장 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후공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
“당 형이 가문에 빈손으로 돌아가면 제가 곤란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듣게 되면 당가의 가주께서 아마도 저를 죽이려 들 겁니다. 위험을 인지하고도 친손자와 외손녀를 데리고 갔으니 분노하실 테죠.”
“그, 그게 그렇긴 한데…….”
당초도 부정하지 않았다.
천공단도 말이 안 통하지만,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고마워할지언정 일단 추궁하고 보는 것이 할아버지였다.
“제가 살려고 그러는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 당가주가 폭우처럼 쏟아낼 만천화우를 당해낼 재간이 제겐 없습니다.”
“……네.”
당초가 수긍했다.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천화서고 형님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하나는,
“천화서고 형님, 할아버지를 만나 보셨나요? 꼭 겪어보신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그럴 리가요. 워낙 악명이 드높은 분이라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은 것만으로도 무섭습니다.”
“하하하하하!”
당초가 웃음을 터뜨렸다.
천화서고 형님은 어떻게 봐도 무서워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도리어 어찌 된 일인지 정감이 묻어나오니 기이하면서도 재밌었다.
“천화서고 형님, 강호의 이야기와 실상은 다릅니다. 사실 악명을 얻은 건 순전히 후공 때문입니다. 후공이 파묻으라면 할아버지는 땅을 파고, 목을 따오라면 목을 따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웃기지도 않는 뚱뚱보 천하제일인이 뭐가 좋다고 할아버지는 그리도 쫓아다니신 건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어? 천화서고 형님, 왜 그러시나요? 안색이 갑자기…….”
“크흠…….”
“천화서고 형님, 괜찮으세요?”
“크흐으으음.”
**
다음으로 마주한 건 금섬.
당초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금섬은 두리번거렸다가 머리를 긁적였다가 하며 앉아 있었다.
“금섬아.”
[그윽.]
답하는 금섬에게 후공은 금구의 내단을 내밀었다.
금섬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으으으으윽?]
이걸 제게 주는 거여요? 라고 묻는 것 같았기에,
“그럴 리가.”
후공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자 금섬이 재밌다고 큭큭거리며 폴짝폴짝 뛰었고, 곁에 있던 색관조도 까르르거렸다.
후공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궁금하구나. 네가 공청석유를 머금어 그 효능을 배가시켜 흡수시킬 수 있으니, 이 내단도 그리할 수 있는지 말이다.”
영약은 등급이 있다.
낮은 등급은 높은 등급에 닿은 이에게 영향이 미미하다.
그런 점에서, 희대의 영약이라 불리는 공청석유를 복용한 이에게 만년설삼은 그저 질 좋은 도라지일 뿐이다.
하지만 내단이라면 다르다.
그것도 금 거북이의 내단이라면.
그리고 후공은 내단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단은 복용한다 해도 녹여내는 것이 한세월이다. 짧게는 오 년, 길게는 이십 년도 걸린다.
그러면 의미는 퇴색된다.
무림인이 내단을 복용하는 이유가 무병장수를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기에 떠올린 것이 금섬.
금섬이라면 내단을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공청석유를 지키던 영물이고, 육각망을 세상에서 가장 맛좋은 식재료라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야, 할 수 있어, 없어? 얼른 말해 봐. 주인님 기다리시잖아!]
[그윽, 극극! 그윽, 그으윽!]
[정말?]
색관조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인님, 금섬이 할 수 있대요. 어른 육각망도 내단이 있는데, 금섬은 그런 내단도 순식간에 녹여낸 적이 있대요.]
“오호!”
후공이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섬이 몇 번 극극거린 것이 이렇게 긴 말이었나 싶은 의문은 접어두었다.
“금섬아, 이리 와라.”
[그윽.]
금섬이 펄쩍 뛰어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입 벌려라.”
[그으으으으윽!]
[까르르르, 육각망 들어갑니다요~~~.]
금섬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색관조가 깔깔거렸다.
**
장담한 대로였다.
주먹만 한 금구의 내단을 삼킨 금섬은 반시진도 되지 않아 녹여냈다.
그 결과, 금섬의 눈에 금빛이 눈부시게 뿜어졌다.
용해된 금구의 내단을 몸에 가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단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날 모두가 금섬에게 물렸다.
공청석유의 공효를 배가시키는 영물은 내단의 공효도 배가시켰고, 그 효능은 막대했다.
천공단으로서는 공청석유에 이어 두 번째 맞는 큰 기연이었고, 은소소와 당초는 이미 받은 선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인데 천공단과 마찬가지로 자신들까지 기연에 닿으니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건 흑전주도 마찬가지였다.
구엽구화초로 빠른 회복을 보이던 그는 사흘도 지나지 않아 본래 경지에서 7할을 되찾았다.
운신은 물론이고, 회복된 경지는 화경의 예.
혼자 남는다 해도 능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몸이 되었기에 작별의 시간은 가까워졌다.
“대공자, 모두 자네 덕분이네.”
“물론입니다.”
“하하하하!”
다시 마주한 자리.
흑전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자의 대답은 언제나 예상 밖인 것이다. 늘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덕분에 대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반사적으로 웃음 짓게 된다.
천재여서 그런걸까?
아니, 그래서는 아닐 것이다.
천재들은 내면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 옥죄는 탓에, 이렇게 자유로운 언행을 구사하지 못한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일평생 보물을 찾아다녔는데, 진짜 보물은 눈앞에 있었다.
나이도 잊게 만드는 서생.
얼마나 큰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자네의 영물은 놀랍군. 물론 그런 영물을 활용해 모두에게 내단을 나눠준 그대는 더 놀랍네.”
“운이 좋았습니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는데, 녀석이 용케도 해냈군요.”
“괜히 영물이 아닌 게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물음에 답해주겠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음이란, 흑전이 보물을 찾는 방식.
흑전주가 말한 맥락을 되짚어볼 때 짐작가는 바는 있었다.
‘영물인가?’
흑전주의 소맷자락 안에서 옅은 숨소리도 이미 들은 터라 그렇게 짐작했다.
아니나다를까.
흑전주가 소매자락에서 작은 동물을 꺼내보였다.
“토룡서(土龍鼠)라고 하네.”
“…….”
머리는 다람쥐를 닮았고, 등판은 거북이처럼 쩍쩍 갈라진 두꺼운 방패를 두른 형태였다.
“처음 봅니다.”
“나도 금두꺼비와 색관조는 처음 봤네.”
후공이 미소 짓고 물었다.
“잠들었군요.”
“일 년 중 깨어있는 날은 30일 정도라네. 영기를 탐지하는 재주가 있네. 타고나길 영약이나 영물 혹은 영기를 지닌 물체를 좋아한다네. 땅을 파고 들어가는 재주도 일품일세.”
후공은 비로소 이해되었다.
아무리 경매가 십 년의 주기라 해도 흑전의 보물이 하나같이 놀라워 기이했는데,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진법을 활용하네.”
“아!”
후공이 탄성을 발하며 떠올린 건 모산파였다.
모산이 화정을 찾은 방식이 흑전에도 활용되고 있었다.
“진법의 묘리가 어찌되는지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히 말해줄 수 없네.”
단호하게 말해놓고 흑전주가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감사합니다.”
“허허, 감사는 무슨. 그런 말은 속으로도 하지 말게.”
흑전주가 손사래쳤다.
눈앞에 있는 이. 천화서고 대공자가 간이라도 빼달라면 줘야 할 판이다. 괜히 농담했다가 감사의 말을 들으니 농담한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한참이나 진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구궁과 오행에 주역의 묘리가 섞인 진법의 특성은 복잡하고 난해했지만, 흑전주는 부연설명 없이 말을 이어갔다.
상대가 천재 중의 천재라는 천화서고 대공자인 것이다.
한 번씩 눈을 빛내는 것을 보게 되니 말하면서도 신이 났다.
당연하게도 후공은 그 묘체를 이해했다.
범항의 지식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탓에, 설명만으로 눈앞에 진법의 도면이 떠오를 정도였다.
“대공자, 여기까지네. 자네라면 모두 이해…….”
흑전주가 말을 멈췄다.
설명과 함께 탁자 위에 손으로 열심히 그려가면서 설명하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공자의 안광이 자줏빛 광채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대공자?”
“…….”
“대공자!”
후공은 그제야 몰입에서 벗어났다.
자령안을 거둬들였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기에 흑전주가 초조해졌다.
“대공자, 왜 그러나? 내가 둘러대거나 거짓을 섞거나 말하지 않은 건 없네만.”
“그래서 그렇습니다.”
“으응?”
“너무 놀랍고 대단해서 기분이 안 좋군요.”
“하하하, 오래 살다 보니 천재에게 이런 극찬을 받게 되는 날도 맞이하는구만.”
흑전주를 따라 후공도 미소 지었다.
하지만 후공은 너스레가 아니었다.
거짓도 아니었다.
놀랍고 대단한 것도 맞고,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흑전의 진법 방식.
그리고 모산의 방식.
아마 둘은 비슷할 것이다.
먼 거리를 원격으로 탐지한다.
먼 거리의 좌표를 진법으로 얻을 수 있다.
설명한 바에 의하면 영기의 위치를 득한 순간, 진법 안에서 스르륵 해당 지점으로 깃발이 이동한다.
단지 그뿐이라면 그런가 보다 할 문제겠지만,
이 두뇌는 거기에서 더 나아갔다.
영체를 옮길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엿봤다.
좌표와 좌표를 두고 진법을 통해,
환혼대법의 구현이 가능할지도…….
여태 막연하게 여겼던 환혼이 천지조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건 후공에게도 충격.
물론 의문은 여전하다.
범항은 하지 않았다.
범항의 기억은 정기신이 합일되면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번째 의문은 좌표다.
외부…… 누군가의 의도라면,
왜 무림맹주와 천화서고 대공자인가.
그럴 이유가 없다.
하지만 방금의 대화로 유추가 가능해졌다.
진법의 어느 지점이 흐트러져 좌표가 어그러졌다면 튈 수 있다.
시행한 쪽에선 실패로 인식.
하지만 틀어진 상황에서 뜻밖의 환혼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말이 된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환혼은 최고의 암살기다.
암살이 불가능한 자라면 혼을 바꿔버린다.
그렇게 바뀐 몸에서 힘을 쓸 수는 없는 일.
처음 환혼 당시가 그랬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렸다.
무공을 익힌 적도 없는 천화서고 노가주를 어찌하지 못하고 짓눌렸었다.
‘묘하군.’
그때였다.
쿠쿠궁!
땅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