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미녀도, 백혼곡, 그리고 귀주.
쿠구궁.
진동은 제법 거셌다.
탁자가 흔들리고, 탁자 위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벽에 걸린 액자가 떨어지고, 집기와 가구들이 틀어졌다.
“지진이로군.”
흑전주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옆으로 이동한 찻잔을 집어들고 말을 이었다.
“한 달 전쯤에도 느꼈는데, 요즘 지진이 자주 나는군.”
후공은 그러냐며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머리는 복잡해졌고, 생각은 많아졌다.
‘지진…… 혹은 어떤 변수.’
진법이 틀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지진이다.
진식이 지진에 의해 틀어진다면 진법의 묘용은 어그러지고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일 수 있다.
지진 외의 변수라면 생물체의 교란.
이는 이미 천화서고에서 한번 겪었다. 육각망이 땅속의 진식을 건드리는 바람에 환기가 역으로 작용해, 천화서고는 육각망의 악취에 뒤덮였었다.
잘 먹긴 했다만…….
이렇듯 진식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 묘체가 어그러지는 일은 가끔 일어난다.
진식으로 펼친 환혼대법이 때마침 지진이나 어떤 생물체에 교란당해 좌표가 틀어지고, 묘용이 다르게 작용한다면 무림맹과 천화서고의 교환이 납득된다.
영기의 원거리 탐지.
탐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영기의 이동.
그리고 혼의 이동.
심히 정교해야 하고, 또한 막대한 기운이 소모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시도한 자가 있다면…….
한데 틀어졌다면……?.
후공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대공자, 혹시 미인도를 보았나?”
“슬쩍 보았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그림입니까?”
“사연은 모르겠네. 한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묘해진다네. 홀린다고 해야 하나. 마치 화폭 속 미녀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네.”
“미녀도의 미녀가 흑전주께서 좋아하는 여인상인가 봅니다.”
“하하하하하, 틀렸네. 그림의 여인이 아름답긴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네. 하하하하하!”
대답이 엉뚱해 흑전주는 한참을 웃었다.
겨우 멈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림 위쪽으로 숫자가 있는데 그것도 괴이하네. 미녀도 일렁이지만 그 숫자도 일렁이거든.”
“나중에 제가 미녀를 만나보겠습니다. 화폭 속 미녀의 용모가 제 성향이어서.”
“하하하하하하!”
흑전주는 다시 터져나갔다.
이내 작별의 말이 오갔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생각이나, 내 언젠가 천화서고에 들르겠네. 그땐 부디 박대하지 말아주게.”
“언제든 환영입니다.”
*
밖에 있는 천공단은 요란했다.
원래도 소란한 천공단이지만 더 소란해진 건 지진이 크게 한몫했다.
“이거 화산 폭발한 거 아니야? 쿠르르, 쾅쾅!”
“흐흐, 그러게. 모산파 장문인 생각난다. 재밌었는데.”
“하하, 맞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살려주게 대공자아아아아아!”
“하하하하, 안 떨어져어어어어! 뜨거워어어어어! 하하하하하!”
“모산파가 그래도 의리는 쩔었지. 안 말렸으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을 거야.”
“맞아, 맞아! 그때 굉장했지.”
모용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뭐야, 모용 형아 그때 없었잖아!”
“있었던 걸로 해줘.”
천공단이 추억이 된 화산의 광경을 떠올리며 떠들어댈 때, 은소소와 당초는 따로 한쪽에 있었다.
화산 폭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들에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 잘할 수 있지?
- 네.
- 내가 신호를 보내면 짖는 거야.
- 네, 누님.
- 반드시 천공단에 들어가야 해.
- 누님, 걱정 마세요. 이 아우는 맹렬하게 짖을 자신이 있습니다.
- 그래, 혼을 담아서.
- 넵.
연습은 충분히 했기에 둘은 자신 있었다.
낭인왕에게 친히 가르침도 받은 터라 자세며 목청이며 완벽에 가까웠다.
- 어, 대공자 나온다.
- 지금 짖을까요?
- 신호한다고 했잖니.
- 아, 맞다.
- 따라와.
흑전주와 함께 나오는 대공자 앞으로 둘이 다가갔다.
“대공자, 드릴 말씀이 있어요.”
“두 분은 천공단에 들어오고 싶은 겁니까?”
“어?”
은소소와 당초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잘됐다 싶었다. 대공자가 알아차린 듯하니 쉽게 풀릴지도.
‘네, 저희도 천공단에 들어가고 싶어요.”
“실망이군요.”
“네?”
“저는 이미 두 분을 천공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분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
“…….”
멍해진 것도 잠시, 은소소와 당초가 웃음꽃과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후공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바라볼 순 없다. 이제 찬물을 끼얹을 차례였다.
“하지만 동행은 아직입니다.”
환호하던 은소소와 당초가 뚝 멈췄다.
찬물을 뒤집은 쓴 표정으로 은소소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요?”
“두 분이 천공단과 동행하려면 허락을 얻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실 테죠?”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은소소와 당초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걱정하는 이.
안심시켜야 할 이들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르는 분까지.
‘외할아버지!’
‘할아버지…….’
은소소가 시무룩해져 주변을 둘러봤다.
환호에 동참하려 다가오던 천공단이, 찬물이 쏟아진 광경에 더 가까이 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천공단은 모두 허락을 맡은 건가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요.”
“누나, 우린 허락 맡았어.”
“맞아. 대사형이 두목 안 따라다니면 죽인다고 했거든.”
거지들이 답하고,
“나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
“나도.”
“나도.”
남궁연을 비롯 천룡의 후예들이 답했다.
은소소가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낭인왕을 바라봤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에 삼협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망나니라.”
“우리도…….”
“나도.”
무산쌍웅과 낭인왕도 차례로 답했다.
은소소는 알아들었다.
망나니라서 누구 허락을 받을 이유가 없고, 이들에겐 사천 당가주 같은 할아버지가 없다.
왜 나는 망나니가 아닌 거야.
왜 내 할아버지는 사천 당가의 가주인 거야.
이상한 원망을 하는 은소소에게 작별인사가 전해졌다.
“은 소저, 당 형! 만나서 반가웠고, 다음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대공자, 제가 천공단인 건 틀림없죠?”
은소소의 눈가가 촉촉해졌기에 후공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냥 천공단이 아니라 천공단 호법은 어떻습니까?”
“하하, 좋아요. 멋지네요.”
“천화서고 형님, 저는요?”
“당 호법?”
“하하하하!”
그제야 어정쩡하게 있던 천공단이 몰려들었다.
“천공단에 호법이 있었어?”
“장로가 높아, 호법이 높아?”
“호법이 높지!”
“굉장하네.”
“천공단의 장로가 천공단의 호법님들을 뵙습니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천공단이 떠나갔다.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모습을 은소소는 끝까지 눈에 담았다.
대공자.
천공단.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모두들 또 봐요.’
***
반나절 후,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제 천공단의 목적지는 귀주.
모두가 예상한 목적지는 무림맹이었지만 단주가 틀었다. 여정은 귀주를 거쳐 무림맹이 되었다.
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천공단이었다.
갑자기 다시 북해로 가자고 해도, 그것도 좋은데요? 라며 따를 천공단이었다.
각각 흩어져 널브러졌다.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하기도 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던 중 낭인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학이다!”
“어디?”
“저기, 저기!”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학을 쫓았다.
“학 타고 다니는 사람을 또 보네.”
“이번엔 두 명이야.”
학을 타고 다닌 걸 본 건 섬서의 북교산.
유령곡이 학을 타고 다녔던 터라, 학에 대한 천공단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어.”
“스님들인가?”
“머리는 없는데 가슴이 있네?”
“요즘 여승들은 학을 타고 다니는 거여?”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후공도 보았다.
‘아미파.’
높이 나는 데다 학 위의 사람은 얼핏얼핏 보였지만, 승복의 특징을 통해 알아봤다.
[주인님, 제가 출동할까요? 학의 눈알을 뽑을 자신이 있어요!]
[그으윽!]
색관조와 금섬이 출전 의사를 밝혔다.
“가만 있거라. 네 눈이 뽑힌다.”
[……네.]
“하지만 날아올라라.”
[제 눈은요?]
“후후, 소리만 듣고 와라.”
[넵! 까르르르.]
학이 워낙에 높이 나는 데다 위로 갈수록 바람의 세기가 거세 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색관조라면 다르다.
청력은 더 뛰어나고, 접근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색관조는 깃털 색을 순식간에 바꾸며 뒤쪽으로 낮게 날았다. 색관조의 영특함에 후공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색관조는 멀리 돌아 학의 후방으로 접근하려는 의도.
어떨 땐 사람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다.
“사저, 저기 사람들 보세요.”
“보고 있다.”
학 위에서도 천공단을 보았다.
아미파의 두 여승은 안력을 돋워 내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누굴까요?”
“글쎄다. 뭔가 묘하구나.”
“그러니까요. 어린 거지에 서생에,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까지.”
“저들도 우리가 보이나 보구나.”
“네, 제법 경지를 이룬 자들 같아요. 어떻게 할까요?”
“후후, 어떻게 하긴. 넌 시비라도 걸 셈인가 보구나.”
“궁금하잖아요.”
“나 또한 궁금하긴 하구나. 특히 저 젊은 서생.”
“맞아요. 서생 차림에 검을 몇 개나 차고 있는 건지.”
“그보다…… 마치 서생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구나. 그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 앞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거리에서요?”
젊은 여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지가 실로 드높구나. 뭐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저들이 백혼곡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최근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도 그렇고, 무심히 지나치려니 마음이 쓰여요.”
“지진은 천지의 재난인걸, 어찌 우연히 마주한 저들과 연관 지을 수 있겠느냐.”
학은 빠르게 날아 천공단을 지나쳐갔다.
천공단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색관조는 학을 조금 더 따라갔다. 하지만 더 이상 대화가 없었기에 이내 선회했다.
[그으윽?]
[그러게. 백혼곡이 뭘까?]
[그윽.]
[맞아. 주인님은 아실 거야.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
[그윽, 그윽!]
“백혼곡?”
[네, 분명 그렇게 말한 걸 똑똑히 들었어요.]
“똑똑히?”
[까르르르르르. 네, 똑똑히요.]
색관조는 주인의 말장난에 한바탕 웃었다.
어느새 곁으로 모여든 천공단이 의문을 발했다.
“백혼곡?”
“나 처음 들어봐.”
“백혼(百魂)이면 백 개의 혼이잖아?”
모두 들어본 적이 없어 갸웃거렸다.
그렇게 되자,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 단주에게로 향했다.
천공단주는 천재.
세상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도 단주는 안다.
책을 많이 읽었을 테니까!
왜 무공까지 뛰어난 거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달리 다른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지는 시선에 후공은 내심 너털거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수염이 없는 걸 깨닫고 자연스러운 척 턱을 매만졌다.
그 모습에 천공단이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제가 알 수 있을 리가요.”
즉시 천공단이 실망을 쏟아냈다.
“아니, 형아! 모르면 진작 모른다고 하면 좋잖아! 내 반짝였던 눈빛 어떻게 할 거야!”
“허허허, 형님! 낚시 실력이 일취월장이십니다.”
“좋다 말았습니다.”
“두목, 너무하십니다.”
“…….”
[까르르르르르르! 낚시, 낚시!]
[그윽, 극극극!]
하지만 후공이 모를 리가.
촉산의 골짜기.
백혼곡.
백 개의 혼을 가둔 곳.
삼백 년 전 한 절세고수가 마두들을 가둬둔 곳이다.
아미의 청절사태.
불가에 몸담은 그녀는 살생을 극도로 싫어해 살생 대신 금지를 만들어 마두들을 가뒀다.
골짜기 전체가 거대 진법.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
의제와 현 사천 당가주인 당명과 함께 그곳에 가보기도 했다. 그때 나눴던 대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후공, 제갈 선배! 아미파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살생이 싫다면서, 이건 죽이는 것보다 더하잖습니까.’
‘내 말이.’
‘아직 살아 있을까요.’
‘살았겠냐.’
그런 대화가 오갔다.
후공의 머리에서 추억이 춤을 추었다.
삼백 년 전의 일인데 아미파는 아직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니 이건 걱정이 많은 걸까, 끈기가 많은 걸까.
알 수 없다.
당장 마음 쓸 일도 아니다.
지금은 귀주.
난화서원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