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50화 (250/460)

250화. 나다.

휘청,

통천회주가 비틀거렸다.

‘힘…… 힘이 빠져.’

그에게 있어 돈은 힘의 증명이다.

한데 모조리 없어졌기에 기운이 쭉 빠지고 머리도 어질거렸다.

겨우 현기증을 추스르고 사방을 둘러봤다.

이렇게 넓었던가?

텅 빈 비고는 넓었고, 그만큼 황량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뭐라도 남아있으면 덜할 텐데, 먼지까지 털어가 여간 깔끔한 게 아니었다. 누가 보면 청소라도 했냐고 할 정도.

최근 두 달 동안 거둬들인 재산만이 아니다. 원래 있던 보물까지 모조리 털렸고, 동전 하나 남지 않았다.

깔끔하고 꼼꼼한 놈이었다.

아니, 놈들이라고 해야겠지.

혼자 힘으로 이 많은 돈과 보물을 옮기는 건 무리다.

그렇게 둘러보던 통천회주는 이내 침투 경로를 알아차렸다.

땅의 한 지점, 흙의 색깔이 다른 걸 발견했다.

나름 다져놓긴 했지만 흙은 흩어졌다가 뭉치면 색이 달라진다.

‘지하를 뚫고 들어왔구나.’

그 지점으로 이동해 발을 굴렸다.

쿠웅!

지면이 푹 꺼지며 무너졌다.

예상대로였다. 길게 이어진 땅굴이 드러났기에 통천회주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네놈들 살려둘 것 같으냐!’

따라가 붙잡는다!

붙잡아 죽여버린다!

너희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곧바로 통로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난관을 맞았다.

통로가 흙더미로 막혀 있었다.

막힌 곳을 만져보던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단단해.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묘용이었다.

빠져나가며 통로를 무너뜨린 것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어찌 도주하며 앞쪽까지 흙을 단단히 굳힐 수 있단 말인가.

놀랍긴 해도 감탄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나도 판다!’

다른 이가 하는 걸 자신이 못할 리가.

화경의 중에 이른 경지는 불가능이 없다.

안광을 빛내는 동시에 전신에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옷자락이 펄럭이고, 두 손에도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상태로 거침없이 흙더미를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파고 또 파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아래쪽으로 갔다가 다시 일직선으로. 한 번씩 방향을 틀기도 했다. 그 가운데 통천회주는 시간도 잊고, 자신도 잊었다. 오로지 이대로 달려가 죽여버린다는 생각 뿐.

온전한 몰입!

그러던 한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

지하수가 터졌다.

너무 몰입해 방향이 틀어진 탓.

수맥을 건드린 걸 뒤늦게 깨달은 통천회주는 밀려드는 물에 잠겨갔다.

“푸확, 어푸, 어푸……. 시발!”

이윽고,

꼬르르르르르르르.

완전히 물에 잠겼다.

**

반시진 후.

통천회의 지도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사태는 이미 들었고, 장로들과 호법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분노를 토해냈다.

상석에 자리한 통천회주도 어느샌가 다시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였지만, 이미 상처받은 호랑이었다. 얼굴의 딱딱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회주님, 수법의 기괴함과 대담성을 볼 때 이는 삼대 대도 중 하나인 지귀객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곽 장로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알려지기로 그자가 땅을 파고드는 솜씨는 두더지보다 더해, 땅속을 이동하는 속도는 신법을 펼쳐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용의자로 지귀객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 생각은 다르외다. 삼대 대도로 불리는 무흔신투, 금취객, 지귀객은 단독 행동을 하는 자들로 알려져 있소. 한데 이번 일은 최소 열 명 이상이 가담한 정황이지 않소이까.”

“한 장로, 그럼 지귀객이 아니면 누가 땅을 이동할 수 있단 말이오!”

“운남에 지천이라는 조직이 있다는 걸 잊었소이까?”

“허어, 그대는 언제적 지천을 말하는 게요! 그리고 운남에 있는 그들이 다시 출현했다 해도, 굳이 귀주까지 올 이유가 무엇이오?”

“운남에 점창파가 버티고 있으니 귀주로 눈을 돌린 것일수도 있지 않소이까.”

지귀객과 지천.

언쟁이 있었지만 그렇게 의견은 좁혀졌고, 나름 그럴싸한 이유와 가능성이 덧붙여졌다.

추론은 이어져갔다.

여러 가능성에 살이 붙고, 인과 관계가 논해지는 가운데 결국 지도부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것이었구려.”

“틀림없소이다. 배후는 난화서원입니다!”

“허허, 선비들이 고약하구려!”

“외부에 도움을 청했을 줄이야!”

귀주에서 유일하게 반기를 든 난화서원이 지귀객이든 지천이든 도움을 청했을 것이란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건 통천회주도 마찬가지.

가만히 듣고 있던 그도 비로소 확신을 갖고 씩씩거렸다.

“그렇게 된 거로군.”

답을 찾았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지하수가 터져 꼬르륵거렸던 걸 생각하면 아침도 길다.

“이 밤, 난화서원을 지운다!”

“존명!”

“존명!”

이내 통천회주의 신형이 밤을 가르며 질주했고, 장로들과 통천회의 정예 칠십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

통천회주가 멈춘 건 귀유산 난화곡 앞.

분지를 이룬 이 골짜기 아래가 난화서원이었다.

짙은 안개로 인해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안개는 자연 현상이 아닌 진법의 묘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화경의 중에 이른 그의 안력으로도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길을 잃게 된다.

한 달 반 전쯤 이미 겪기도 했다.

무턱대고 들어섰다가 길을 잃었고, 겨우 사흘 만에 빠져나왔다.

말이 사흘이지, 먹지도 잠을 청하지도 못한 채 헤맨 사흘은 삼 년과도 같았다.

‘사흘은 그래도 빠른 편이었지.’

그렇다. 누구는 닷새, 누구는 이레만에 빠져나왔다.

심지어 한 명은 이십여 일이 지나 복귀했다. 이십 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하고 안개 속을 헤맨 그는 비쩍 마른 것만이 아니라, 후유증으로 한동안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다.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순 없다.

밖에서 공략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진 통천회주가 외쳤다.

“난화서워어어어어어어어언!”

내력이 실린 그의 음성이 산야를 휘돌았다.

대답은 없었다.

“네놈들의 소행이란 걸 알고 있다. 동전 하나 남겨놓지 않았더구나. 이제 너희도 같아져라. 너희도 당해봐라. 이 밤, 난화서원의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겠다아아아아!”

그 외침과 함께 통천회주가 검결지를 맺었다.

손을 앞으로 뻗어내 순간, 그의 검이 푸른 빛을 띠며 날아올랐다.

이기어검!

검결지를 맺은 기운에 유도된 푸른빛이 안개를 뚫고 들어갔고, 장로와 호법, 정예 검수들의 검공과 장력이 진법을 무너뜨리려 안개를 향해 퍼부어졌다.

그러길 한 시진(약 2시간).

모두 시무룩해졌다.

진이 빠진 터.

기운이 불어닥치면 안개는 갈라지고 흩어졌을 뿐, 이내 다시 짙게 깔렸다.

진법을 와해시키긴 커녕, 내력만 극심히 소모한 통천회는 이제 쉬어야했다.

그건 통천회주도 마찬가지.

그의 내공력이 심후하다 하나, 이기어검은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만큼 무한히 펼쳐낼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하지만 그냥 돌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에,

“난화서원, 오늘의 공격은 그저 경고의 의미였다. 나는 자비로운 자.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단 하루. 내일 밤까지 훔쳐간 재물을 모두 가져온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쩌렁, 쩌렁.

통천회주의 음성이 이어졌다.

“만약 내일을 넘긴다면 각오해라. 귀유산 전체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주마!”

산 전체를 태우면 진법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그런 희망에 통천회의 장로들과 정예들의 눈빛도 다시 살아났다.

“하하하하! 영명하십니다.”

“으하하하하하! 저는 화공(火攻)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하하, 주군께선 다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로군요.”

귀유산을 내려오는 모두의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 산이 불타고 그 불길과 연기 속에 고전할 난화서원을 상상하며 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싱글벙글 돌아가는 길.

반시진 정도 지났을까. 모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

“…….”

멀리 전각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남의 집 불구경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지만…….

“왜 불이……?”

“왜 우리 전각이?”

“이게 뭐여?”

통천회의 전각들이 불타오르고 있었기에,

다들 넋이 나가버렸다.

통천회주도 다르지 않았다.

“안돼에에에에에에에!”

절규를 토해내며 신형을 내달렸다.

**

불을 지른 건 무흔신투.

식은 죽 먹기였다.

화경의 고수가 자리를 비우고, 정예들이 빠져나간 통천회에서 신투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회주의 아들로 역용까지 하고 있었기에, 적당히 기름을 끼얹고 여기저기 빠르게 불만 붙이면 끝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건 아니었다.

[까르르르르르! 타올라라 불길이여!]

[그윽, 극극극!]

통천회주를 따라갔던 색관조가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에 신투는 계획을 변경했다.

계획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이 대공자의 방식이자, 천공단의 방식.

얼마 따라다니지 않았지만, 신투는 척하면 척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불을 지르고 빠져나온 터.

빈손은 아니다.

[어디까지 가! 이쯤이면 충분하잖아요!]

[그윽, 그윽!]

신투의 한 손에는 패물과 보석이 든 보따리가, 다른 한 손에는 나이 든 여인이 들려 있었다.

“이, 이쯤이라니?”

색관조의 말에 신투가 반응하기 전 여인이 기겁했다.

무흔신투가 진정시켰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누가 너의 어머니란 말이냐!”

“하하하하, 알고 있었어? 역시 어머니들이란.”

“내 아들은 어디에 있느냐? 말해라!”

불길이 번지며 대피해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빠져나왔던 그녀는 이내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들에겐 말하는 새가 없고, 느낌도 달랐다.

“댁의 아들은 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어디에?”

“여기.”

무흔신투가 여인을 내려놓았다.

혈도가 점혈된 여인이 널브러진 채 눈을 굴려가며 아들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에 있다고?”

“흐흐흐, 안 보일 뿐이지.”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땅에 묻힌다는 소리.”

“그, 그게 무슨?”

대답은 땅파는 소리가 대신했다.

여인이 눈을 부릅떴다.

“파, 파 묻었다고?”

“똑똑하네.”

“네, 네놈들은 어찌 이리도 악독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까 천공단의 친구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처, 천공단……?”

“깊이 알 것 없고 이걸로 숨쉬어.”

갈대가 물렸고, 여인은 파묻혔다.

**

동이 터오는 시간.

통천회주는 망연자실했다.

드넓은 터전에 솟아오른 전각 중 절반이 타버렸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남은 것이 반이라 해도, 그을리고 부서진 것도 많아 멀쩡한 전각은 몇 채 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주군, 식량 창고가 불타 남은 것이 없습니다.”

“주군, 첫째 공자님과 사모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군, 패물과 보석들을 모두 도난당했습니다.”

불을 끄긴 했지만, 최악의 보고들이 이어졌다.

비고의 모든 재물이 털렸고, 터전이 박살났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이 실종.

대체 누구인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가.

통천회주는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뭔가가 날아들었다.

맹렬한 기운을 품은 채 날아오는 건 하나의 화살.

화살에 무언가 묶여 있었기에, 통천회주가 솟구쳐 낚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화살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통천회주가 바로 펼쳤다.

- 나다.

첫 문구에 통천회주는 현기증이 일었지만 정신을 수습하고 읽어나갔다.

- 통천회주. 그대에게 비무를 청한다. 오늘 정오. 송오산 호절봉. 혼자 오도록. 어길 시 죽음이 임한다. 누구에게 죽음이 임하게 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삐뚤빼뚤한 글씨.

어린 아이의 글씨같기도 하고, 고의로 필체를 속인 것 같기도 했다.

통천회주의 시선은 마지막에 적힌 보낸 이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소천(小天)…… 작은 하늘?”

강호의 절세 고수 중 이런 별호가 있었던가?

정녕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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