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51화 (251/460)

251화. 죽지 말라며!

한편 그 시각,

후공은 여전히 미녀도 앞에 있었다.

‘묘하구나.’

묘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금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지만, 미녀도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한 것이다.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미녀도 위쪽에 적힌 ‘백팔십 일’이라는 숫자는 무슨 뜻인가?

미녀는 누구인가?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다.

이 몸의 천재적인 두뇌도 소용이 없었고, 자령안을 밝혀도 다가가지 못했다.

미인도에 비밀 따위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흑전주가 헛소리를 했을 리도 없고, 다른 한편으로 미인도에는 선명한 영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크흐음……. 그대는 매우 고약하군.”

후공은 그림 속 미녀에게 말을 건넸다.

미녀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바라볼 뿐.

시냇가 바위에 앉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쳐 온다.

주위 풍광은 수려한 산.

그녀의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자리하고, 앞쪽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청량감이 감돌건만, 후공의 마음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 좌측으로 천향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향선이 선명해진다 싶을 땐 이미 도착했다.

색관조가 창가에 내려앉고는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

눈치를 살피던 색관조는, 주인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반기니 까르르르 웃으며 앞에 내려앉았다.

[주인님, 저희가 왔어요.]

[그윽, 그윽!]

“그래, 어서 와라.”

[식사는 하셨어요?]

“됐다.”

[잘 챙겨드셔야 해요.]

“후후,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색관조는 중간중간 들러 충실히 상황을 보고하고 있던 터. 한창 미녀도에 몰입하고 있던 한 번인가는 그냥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후공이 따로 지시한 건 없었다.

그저 큰 방향만 던져줬을 뿐이었다.

[…… 주인님, 천공단이 통천회주를 송오산 호절봉으로 불러냈어요. 까르르르르, 그때랑 같아요.]

“후후, 그렇구나.”

후공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와 같다는 건, 소요파를 공략할 때를 의미했다.

천공단은 목령자를 공략했던 방식으로 통천회주를 다루려 하고 있었다.

[주인님, 그럼 또 올게요.]

“기다려라.”

[……?]

[……?]

색관조와 막 등에 올라타려던 금섬이 갸웃했다.

.

.

.

.

잠시 후,

두 영물은 미녀도를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었다.

“어떠냐?”

혹여 영물의 눈에는 다른 무언가가 보이지 않을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으로 후공이 바라보라 명했고, 기다리다 물음을 던졌을 때 금섬이 극극거렸다.

금섬의 말에 색관조가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오호!

후공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괜히 영물이 아니다 싶어 바로 물었다.

“너희는 뭐가 보이느냐?”

[미인요.]

“그리고?”

[미인이 예뻐요. 금섬도 너무 예쁘대요.]

“다른 건?”

[다른 건 미인의 발도 예뻐요. 금섬도 그렇대요.]

“또 다른 건?”

[풍경이 아름다워요.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윽, 그윽!]

그렇게 답하던 색관조와 금섬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주인이 더는 묻지 않고 빤히 바라볼 뿐인 것이다.

[주인님, 왜요?]

“나가.”

나직한 축객령에 색관조와 금섬이 까르르 극극대면서 날아갔다.

[주인님은 안 예쁘신가 봐.]

[그윽.]

[까르르르르, 주인님은 눈이 너무 높으셔.]

[큭큭큭!]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후공은 침음성을 흘렸다.

두 놈이 영물이긴 해도 모자란 놈들이란 걸 잊고 있었다.

그렇게 후공이 혀를 끌끌 찰 때였다.

솨아아아아아아!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바람에 대나무가 쓸려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들려온 방향은 당황스럽게도 미녀도.

“……?”

시선을 화폭에 던지자, 바람 소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후공은 찰나간 보았다. 그림 속 대나무가 흔들렸다가 잦아드는 광경이었고, 정확히 시선이 닿았을 땐 다시 그림이 되었다.

착각인가?

아니다.

놀랍게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의 위쪽으로 이번엔 구름이 움직였다.

조금씩 이동하는 구름.

이내 바라보았을 때는 대나무와 같아졌다. 시선이 닿자, 구름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멈추었다.

시선이 닿으면 멈춘다고?

움직이고 소리가 들린 것도 신기했지만, 바라보면 멈추는 건 더 기이했다.

그 현상이 이어졌다.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번엔 시냇물이 흘렀다. 시냇물이 멈추었을 땐 그림 속 새가 날았다. 새가 멈춘 후에는 다시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아아아!

대나무 숲이 흔들려간다.

답은 가까워졌다.

후공은 알 것 같았다.

이제 시선을 아무 곳에도 주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는 상태.

그 상태를 유지하며 막연히 시야를 그림에 던져놓고 있으려니,

쏴아아아아아!

졸졸졸…….

짹짹!

그림이 일제히 움직였다.

새가 날고, 구름이 흘렀고, 바람이 대나무 숲을 쓸고 지나갔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까지 더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놀라웠지만, 놀라움은 이어졌다.

시냇물에 닿은 여인이 물장구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튀어오른 물이 그녀의 옷을 적시자 여인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급기야 그녀가 훌쩍 시내로 뛰어들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림인데?

도리어 보고 있는 후공이 황망할 지경.

첨벙, 첨벙 물가를 오가던 그녀가 돌아섰다.

그렇게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초대에 응해주실 건가요?”

“물론.”

들리려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후공이 답하자 여인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좋아요. 기대하죠. 나도 궁금하네요. 나를 볼 수 있는 그대가 누구인지.”

“내 말이 들린다고?”

“호호호호!”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후공이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스으으으윽.

그림 위쪽에 있던 숫자가 바뀌었다.

- 백칠십구 일.

방금까지 백팔십 일이었다. 내내 달라지지 않았었고, 달라져선 안 되는 그림의 숫자가 바뀐 광경에,

“허허…….”

너털거리고 다시 바라봤을 땐 미녀도는 움직임이 멈추었다.

여인 또한 바위 위에 앉아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일 뿐.

잠시 환상을 본 것일까?

꿈을 꾼 것일까?

아니다.

환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하나가 바뀌었다.

백팔십 일이 아니다.

백칠십구 일이 되어 있었다.

*

정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통천회주는 떠날 채비를 갖췄다.

그런 통천회주를 장로들과 호법들이 만류했다.

“주군,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필시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진대 어찌 홀로 가시려 하십니까!”

하지만 알고 있다.

떠나는 이나 만류하는 이나 모두 답은 알고 있었다.

혼자 가야 한다.

이미 적은 인질을 잡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

몰려가는 순간, 그런 정황이 포착된 순간 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두 구의 시체만 받게 될 것이다.

띵을 파고들기도 하고, 불을 지르기도 했고, 언제 어떻게 납치했는지도 파악조차 못 했다.

그러니 함정이란 걸 알아도 갈 수밖에 없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최소 적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통천회주는 한귀로 흘려들었고,

장로들과 호법들은 홀로 신형을 날리는 통천회주를 붙잡지 못했다.

*

송오산 호절봉

산의 정상에 한 소년이 있었다.

고작 열 살남짓.

뒷짐을 진 채 산 아래 풍광을 눈에 담고 있었다. 멀리 창공을 가로지르며 하얀 새가 날아와 소년의 어깨 위에 앉았다.

[…….]

새가 작게 속삭였다.

혼자 오고 있다고 전했기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눈이 차가워졌다.

소년의 입이 열렸다.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통천회주,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가 한쪽 날개로 소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멍청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아, 왜 때려!”

[분위기가 틀리잖아, 분위기가!]

“뭐야, 나 좀 잘하지 않았어?”

[더 싸늘하게, 더 냉정하게.]

“형아 분위기를 내가 어떻게 내! 나 이제 열두 살이야!”

소천개가 반발하며 싸움이 났다.

그런 소천개와 색관조를 진정시킨 건 항마삼협이었다.

- 야, 온다.

전음을 들은 소천개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색관조는 이미 날아올라 하늘을 유영했다.

통천회주의 기세는 광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우우웅!

강대하고 웅혼한 기세가 산야를 뒤흔들었다.

이내 통천회주의 신형이 솟구쳐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내려선 건 삽십여 장 너머.

소천개가 인사를 건넸다.

“에헴, 왔느냐.”

“…….”

통천회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갸웃거리며 좌우를 살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잘못 찾아온 건가? 분명 송오산 호절봉은 이곳인데? 한데 왜 ‘소천’이란 고수는 보이지 않고 어린 거지가 서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다시 들려왔다.

“나야!”

“응?”

“내가 소천이야. 소천개라고 해.”

“네놈의 짓이라고? 설마 반로환동?”

“아니.”

“그럼?”

“그냥 열두 살.”

“이런 미친…….”

통천회주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소천개가 겁을 먹고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얼른들 나와요! 이러다 나 죽겠어!”

“……?”

통천회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혼자일 리가.

그렇게 통천회주가 주변을 둘러보고, 이어 기감을 확장하려 할 때,

“클클클클!”

“흐흐흐흐흐!”

“통천, 통천, 통통통통!”

웃음소리와 함께 신형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여섯.

항마삼협, 무산쌍웅, 낭인왕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통천회주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처음이어도,

‘아…… 내가 오늘 죽는구나.’

운명을 직감했다.

여섯 중 누구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여섯 중 특히 셋은 자신보다 더 강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너희는…… 누구냐?”

“천공단.”

“천공단이라고?”

통천회주의 눈이 커졌다.

그도 강호를 휘도는 소문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듣고 바라보니 그리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한편 의구심도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천공단하고는 다른 것 같군. 천공단은 정의롭다 들었다. 하지만 너희의 행사는 전혀 그렇지 않군. 천공단인 거냐, 천공단 행세를 하는 것이냐?”

도둑질, 납치, 인질극, 방화.

그런 것들을 떠올려보면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등이 웃음을 터뜨렸다.

“천공단은 협의니 정의니 그런 건 모른다만?”

“그러는 넌 정의롭고? 너는 귀주 전역에 거머리처럼 빨판 세우고 다 빨아먹으며 막 살아도 되고, 우린 막 살면 안되는 거냐?”

“상놈의 새끼야, 원래 막 사는 건 우리가 원조야! 수틀리면 납치하고 죽이고 하는 게 우리 두목의 가훈이고!”

후우…….

통천회주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좋다. 천공단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하나만 묻자. 내 아내와 아들은 어디에 있지?”

“잘 있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다오.”

“네놈이 우리 손에 죽는 순간 풀어준다.”

“약속을 지켜다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천회주가 검결지를 맺었다.

스윽.

허리춤에 걸린 검이 빠져나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통천회주가 검결지를 맺은 손가락을 휘젓자, 검이 따라 돌았다.

검끝이 통천회주를 겨냥했다.

자결.

그 의미는 너무도 명확했기에 항마삼협을 위시한 모두가 놀라 다급히 외쳐댔다.

“너 뭐 하는 거야?”

“죽으려고?”

“안돼! 이 새끼야!”

“죽지 마! 죽으면 약속 안 지킬 거야!”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먼저 싸워야 하고, 그다음 절벽 아래로 던져야 했다. 이미 절벽 아래에 그물도 쳐 놓았고, 남궁연과 은앙개등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상황.

“무, 무슨 뜻이냐?”

자결하려던 통천회주가 영문을 몰라 하며 얼떨떨해할 때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낭인왕이 닥쳐들었다.

“야, 죽지 말라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다 순서가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무슨 순서?

죽인다며? 그럼 아내와 아들은 살려준다며?

그렇게 통천회주가 어리둥절 혼란스러워할 때, 혈도가 점혈되었다.

점혈로 몸이 굳자, 기운에 유도되고 있던 통천회주의 검이 떨어졌다.

그런 뒤 여섯은 통천회주를 절벽으로 끌고 갔다.

“자, 가자.”

“큰일 날 뻔했네.”

“강호는 알 수가 없다니까.”

정작 모르겠는 건 통천회주였다.

“뭐, 뭘 하려는 것이냐?”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항마삼협 중 이열이 목을 틀어쥐고 절벽의 끝자락에서 손을 내 뻗었다.

“통천회주, 잘 가라.”

통천회주의 눈에 지진이 났다.

“날…… 죽인다고? 아깐 죽지 말라며?”

“아, 시발! 좀 닥치라고! 분위기가 안 살잖아! 에잇!”

그렇게 던져졌다.

통천회주는 속절없이 추락해가며 절벽 끝에 서 있는 천공단을 바라봤다. 점점 그 모습이 멀어져가고, 작아져 가는 걸 보며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아! 안 죽인다며어어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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