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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256화 (256/460)

256화. 신검의 주인이 될 자.

북현산 초입.

거대한 병풍처럼 서 있는 산을 올려다보며 후공은 감회에 젖었다.

두 개의 굵은 기둥이 입구를 대신하고, 그 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청량감을 내뿜고 있는 이곳은 무림맹.

‘후공, 입구에 심을 나무라면 대나무가 제격입니다.’

대나무 숲을 보자, 귀곡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나무는 진법을 다루기도 좋고, 시원스러움을 드러냄과 동시에 무림맹의 강직함도 은유할 수 있어 그리하겠다고 했었다.

“늦은 건가, 빠른 건가.”

경지로 따지면 늦은 것이고,

시일로 따져보자면 빨리 돌아온 셈이었다.

환혼 당시 생각으로는 최소 이 년, 오 성의 경지에 이르면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경지는 이미 오 성을 훌쩍 넘어섰고, 시일도 채 1년이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게 그대로일까.

그에 답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우습군.”

목소리는 대나무 숲을 따라 좌에서 우로 휘돌았다. 이어지는 음성은 뒤에서 들려왔다.

“무림맹이 그의 용모를 모른다 하여 사칭하다니. 대담한 건지 어리숙한 건지 알 수가 없구나. 만약 네가 진정 천화서고 대공자라면 맹의 진법도 쉽게 돌파할 수 있을 테지. 증명해보라. 내 앞에 나타나보라.”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목소리는 쇳소리로 변조되었지만 누가 말하고 있는가는 명확했다.

맹의 경비대인 지옥참마대의 대주 서율.

미친놈이다.

천공단 정도는 아니어도, 서율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원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경비대주가 되면서 본래 명칭인 수호천강대 대신 지옥참마대로 바꾸어 싶다고 했을 때 놈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경비대의 명칭이 왜 지옥참마대여야 하냐는 물음에, 서율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 맹주께서 계시니 뚫릴 일도 없고, 쳐들어오는 족족 다 죽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옥이고 참마입니다.

너 어째서 당당한 거냐!

니들이 막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호통쳤지만 서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지옥참마대로 결정.

그러니 지금 상황은 서율의 유희요, 미친놈의 말장난일 뿐이었다.

난화서원 때와는 다르다. 난화서원의 선비들이야 움츠러드는 것이 당연해도, 무림맹은 다르다. 고수들이 득실거리는데 두려울 게 뭔가.

그저 이건,

진법을 돌파할 수 있나 보자.

네 실력을 보고 싶다.

이 의미에 불과했다.

천공단은 이미 발작 중.

쌍욕을 하고 있었기에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그러곤,

“아, 제가 착각했습니다. 어젯밤 꿈에 제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맺자, 천공단이 깔깔거렸다.

“총총총! 우리 물러가요. 하하하하하!”

“야, 우리 간다!”

그렇게 되자 당황한 건 서율이었다.

“아니 잠깐만! 가지 마시게!”

당황한 목소리가 진법을 타고 흘러나왔다.

뒤이어 호통 소리도 들려왔다.

“이 새끼야! 뭔 확인을 한다고 지랄이야! 피리에 처맞고 죽어볼래!”

“아니 그게 아니고 난 그저…….”

목소리는 변조되었지만 호통치는 이가 금적자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었기에 천공단이 반가운 함성을 내질렀다.

“금피리 할아버지!”

“선생,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하, 여전하시네.”

무림맹은 그대로인가?

후공은 답을 들은 셈이었다.

달라진 게 없다.

**

무림맹은 뒤흔들렸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온 것이다.

최근 강호에 명성을 휘날리는 존재여서만은 아니었다.

함께 온 것이 신검이기 때문.

맹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수 있었던 사건이 단 두 달여 만에 해결된 것이니 기뻐하면서도 놀라워했다.

그건 기다리던 제갈혜도 마찬가지.

해낼 거라 믿고 있었다곤 해도 눈으로 확인하는 건 또 달라, 기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대공자, 수고하셨어요.”

“네, 제가 수고가 많았습니다.”

“하하하!”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만난 첫 자리, 첫 마디에서 웃음이 터질 줄이야.

그러면서도 제갈혜는 기분이 묘해졌다.

‘왜지? 왜일까?’

제갈혜는 알 수 없었다.

무림맹에 머물면서도 내내 불편하고 허전했는데 대공자를 마주하니 채워지는 것이다. 이곳에는 더 이상 백부가 없고, 백부의 흔적만이 넘쳐나 힘들었는데,

그 그리움이 채워진다.

같은 사람일 수 없는데, 그저 비슷한 말투이고 기질이 흡사할 뿐인데 단숨에 그 존재만으로 백부가 있던 무림맹이 된 것만 같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대공자.”

“네, 소저.”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백부가 떠오르는 거죠?

차마 그렇게는 물을 수 없어,

“무림맹에 와본 적이 있나요?”

“크흠, 처음입니다. 멋진 곳이로군요. 무섭기도 하고.”

“전혀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닌걸요?”

“제가 무서워할 때면 안색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제갈혜가 빙긋 웃었다.

검성 때가 떠올랐다. 비무를 위해 검성이 온다는 말에 당장 도망쳐야겠다던 백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백부의 검을 찾아주어 고마워요.”

후공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고마워할 것까지야.

내가 내 것을 찾았을 뿐인데.

이제 남은 건 검을 온전히 수중에 넣는 것뿐.

시작은 내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겠지.

기침이 많은 친구.

요로선인.

**

맹의 장로는 셋.

요로, 요인, 요공.

그중 대장로는 요로였다.

임시로 맹주 직위를 대행하고 있기도 했기에 후공은 이내 요로선인과 마주 앉았다.

요로는 길게 기른 백발에 뭔가 여러 가지로 많은 친구인데, 그중에서도 단연 많은 건 기침이었다.

“콜록, 콜록, 콜록, 크흐흐흐흐흑, 콜록, 콜록, 콜로오오오옥, 콜록! 대공자, 콜록, 콜록!”

이런 식이다.

수많은 콜록에 의미 있는 말은 한두 마디일 뿐.

이 늙은이와는 대화가 안 된다.

“크흠…….”

후공은 요로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맹에 있을 때는 이 종자를 되도록 상종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콜록, 콜록, 크아아아아악! 콜록, 콜록, 콜로오오오옥! 미안하네. 콜록, 콜록. 늙으니 자꾸 가래가 나와.”

“삼키는 겁니까?”

“흐흐흐, 콜록, 콜록. 뭐 그렇지. 자네, 콜록, 콜록, 의외로 말하는 게 겁이 없군.”

“크흐음…….”

“콜록, 콜록!”

“크흐으음!”

“콜록, 콜록, 끄어어억!”

“크흐으으으음!”

콜록과 크흐음의 대결이 한창 이어졌다.

“콜록, 콜록! 자네 목이 안 좋은가?”

목이 안 좋은 건 너겠지.

후공은 마음으로만 말했다.

요로가 기침이 문제이지, 사람이 나쁜 건 아닌 것이다.

또 콜록거림이 요긴할 때도 있는데, 주로 어딘가에 따지고 분쟁을 해결할 때였다. 까다로운 분쟁 자리에 요로를 보내놓으면 단번에 해결되었다.

아침에 찾아가 몇 마디면 충분한 본론이 막상 끝날 즈음이면 밤이 되기 일쑤라, 당하는 입장에선 고문이 따로 없는 터.

그렇게 해결한 강호의 중재 건이 여러 번이어서 소문이 파다히 퍼져 요로가 온다고 하면 일단 각파며 가문이며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보는 편.

하지만 후공이 그걸 당하고 있을 순 없는 일.

긴 탁자 위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번쾌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는 의중을 드러내며 전음을 발했다.

- 이야기는 전음으로 나누시죠.

“콜록, 콜록. 끄에에에에엑!”

- 하하, 자네 천재라더니 똑똑하구만.

콜록임과 동시에 전음이 들려왔다.

전음은 기침이 없다.

- 허허, 내 친구를 보는 듯허이. 그 친구도 늘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자고 했거든.

그 사람이 나다.

이후 대화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후공은 신검의 행방을 찾게 된 과정을 하나씩 설명했다. 물론 이야기 중에 금취객에 대해선 두루뭉술 넘겨 존재를 은폐시켰고, 점창과 지천의 인질극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요점만 나열했다.

그럼에도 요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기침 소리가 거칠어졌다.

- 자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실로 경이롭네. 고맙네, 고마워. 한데 이야기 중에 과장이 섞인 것 같네만.

전음이 끝나기 무섭게 요로선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후공은 당연히 그 의문을 이해했다.

- 과장은 없습니다.

빠뜨린 건 있어도.

- 아닐세. 그럴 수 없거든. 이 검은 다룰 수 없네. 그 누구도. 자네가 왜 굳이 거짓말을 섞는지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해 보이는군.

찾아온 건 대단한 일이나 그 말은 인정할 수 없다.

허영심인가, 허세인가.

왜 굳이 자신을 돋보이려 없는 말을 지어내느냐는 추궁은, 당연히 후공에겐 예상 가능한 말이었다.

-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후공이 미소를 떠올린 순간,

스르릉!

번쾌친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장검, 중검, 단검.

세 자루는 빠져나와 내전 안을 천천히 휘돌았다.

- 재밌군.

요로선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의자에 등까지 느긋하게 기대며 세 자루의 검을 바라본 채로 전음을 이었다.

- 저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네. 문제는 허공섭물의 묘가 아닐세. 내력을 깃들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네. 진정한 운용은 검기든 검강이든 맺혔을 때의 이야기라는 뜻일세.

후후, 당연히 그리 나와야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과거의 자신에게 철저한 신뢰를 보내고 있기에 후공은 흡족히 여겼다.

그리고 다시 만났으니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을 해주고 싶어졌다.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선물.

-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 말해보게.

- 이렇게!

그 순간, 번쾌친이 자줏빛 광채를 뿜어냈다.

동시에,

크르르르르릉!

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앙!

사납게 울부짖으며 요로를 향해 짓쳐들었다.

“무, 무슨!”

요로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찰나, 그는 황급히 호신강기를 두름과 동시에 소맷자락을 휘둘러 검강을 막아내려 했다.

파앙!

번과 친이 막대한 장력에 튕겨 나갔다.

하지만 쾌는 그곳에 없었다. 후방으로 돌았고,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등과 허리를 쓸듯 스쳐 지나갔다.

스아아악!

“허억!”

경악해 뒤돌아섰을 때는 이미 쾌는 다시 날아올랐고, 요로선인의 등은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쾌가 쓸고 간 건 옷자락. 쾌는 다시 날아올랐고, 그 틈을 다시 번과 친이 파고들었다.

맨살이 되어 시원해져버린 등판에 정신이 팔려 있던 요로가 대응할 사이도 없이, 친이 허벅지를 타고 휘돌았다.

“히이익!”

장력을 뿜어냈을 때는 이미 친은 하의를 거덜내고 날아올랐다. 번은 허리를 휘감아갔다.

요로가 두른 호신강기와 부딪혀 카가강, 소리가 났지만 옷을 찢어내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요로가 사방팔방 손을 휘저어가며 허우적거리는 사이 옷은 점점 너덜너덜해졌다.

“그만, 그만하게! 믿어! 믿겠네! 믿어진다고!”

요로는 얼마나 다급한지 콜록임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번쾌친은 멈추지 않았다.

주인의 다정함.

주인의 장난.

그저 주인은 반가움을 표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딱히 할 것이 없는 검령도 몸을 들썩이며 날고 싶은 의지를 드러냈지만, 주인의 완고함에 가로막혀 살짝살짝 빠져나왔다 들어갔다만 했다.

덕분에 요로는 한동안 춤사위를 벌여야 했고,

번쾌친이 멈추고 검집으로 모조리 돌아갔을 땐, 그야말로 알몸이나 다를 바 없이 너덜너덜해져버렸다.

툭, 툭.

남아 있던 옷조각이 떨어져나가는 가운데 헐벗은 요로선인이 멍하니 바라봤기에,

후공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인, 옷이 낡아 새 옷을 입으시라 배려해드렸으니 탓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요로선인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대신,

“자네…… 후공의 제자인가?”

그럴 리가.

후공이다.

“저는 그저 천화서고 대공자. 서생 나부랭이입니다만.”

후공은 그렇게 오랜 친구에게 선물을 마쳤고, 의미도 전해주었다.

‘요로, 너는 지금의 광경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겠지?’

검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당연히 요로도 떠올리고 있었다.

떠난 친구가 살아있을 때 남겼던 말.

먼 훗날 검의 주인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친구가 남겼던 말이 천둥처럼 머리를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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