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59화 (259/460)

259화. 암부의 부주.

환혼은 천지조화가 아니다.

진법에 의한 환혼대법의 시행.

현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확신에 확신을 더해 보자.

그런 생각 끝에 후공이 입을 열었다.

“군사, 그 외의 진법은 특이점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전체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문제가 일어난 건 말씀드린 한 지점이었습니다.”

정중히 답하면서도 모용곽의 두 눈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왜 자꾸 묻는 거지? 이런 눈동자.

그 마음을 모를까.

후공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흔한 일은 아니기에 관심이 가는군요. 본시 진법의 오행과 구궁은 지질은 물론이고 계절과 날씨, 혹은 달의 기운에도 영향을 받으니,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고 싶어집니다. 직접 해당 장소를 보고 싶은데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모용곽의 눈에 떠올랐던 의문은 옅어졌다.

그저 천재의 호기심이겠거니, 혹은 이 눈앞의 천재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떠올렸다.

그런 기대감은 제갈혜도 마찬가지.

도저히 해결책이 없다 싶은 상황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길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가 답을 찾길, 그래서 백부의 죽음의 비밀이 풀리길 소망했다.

함께 걸어간 방향은 맹주전(盟主殿).

모용곽이 앞장서고, 후공과 제갈혜가 뒤따랐다.

당연하게도 후공은 감회에 젖었다.

자신이 머물던 처소.

거대한 전각이 눈에 들어오자,

잠시 환혼을 잊었다.

잠시 지금의 자신을 잊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같은 길, 땅에 닿는 익숙한 감촉.

늘 느껴왔던 것이어서 마치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처소를 향해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꿈을 꾸었던 걸까.’

호접몽(胡蝶夢).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깨어나 보니 알 수 없어졌다.

나는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자신은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가.

상관없겠지.

나비든 사람이든.

그저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중요한 건, 모습이 아니라 내가 ‘나’인가일 뿐.

하지만 지금은…….

호접몽이 부서져 간다.

와르르르르.

후공은 그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맹주전 앞 천공단 때문.

‘저, 저 미친 것들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바라봤다.

삼배는 진작 끝났는데 아직까지 천공단이 한자리에 모여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상을 차려놓고 그 상 위에 닭이며 과일이 올려져서도 아니었다.

왜?

왜인가?

왜 새랑 두꺼비가 절을 하고 있는가!

니들이 왜?

“일동 일배!”

[후공, 극락왕생하세요오오오.]

[그으으으으으으으윽!]

색관조와 금섬이 나란히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건 꿈이어야 했다. 저놈들 뭘 알고 저러는 건가. 논외로 두 놈의 정중함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일동 이배!”

금적자가 주관자가 되어 외치는 사이, 천공단이 이쪽을 보고 달려왔다.

“형님! 형님도 오셨군요.”

“형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항마삼협이 반기고, 그 뒤로 줄을 이었다.

“형님, 같이하시죠.”

“두목, 왔어! 색관조와 금섬이 끝나면 두목이 하면 되겠네.”

“형아, 여기가 맹주님의 처소였어. 끝내주게 멋지지?”

소천개의 말을 듣자마자 후공은 끝내주게 모조리 패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천공단이다.

다독여질 틈이 있을 리가.

“형님, 여긴 시작입니다. 여기 끝나면 본격적으로 성묘를 갈 생각입니다. 저기 저 높은 산 보이시죠? 저깁니다. 하하하하!”

거기에 모용곽이 기름을 부었다.

“대공자,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고 오십시오.”

넌 또 뭔데!

후공이 모용곽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모용곽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얼른 딴청을 피웠다.

“군사,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좌측입니다. 가시죠.”

그렇게 멀어져가자, 남겨진 천공단이 시무룩해졌다.

“형아는 후공이 싫은가?”

싫은 게 아니고, 내가 후공이다.

“뭐 형님이시니까.”

“뭐…… 두목이니까.”

“그렇지. 형님은 강호 경험이 최근이라 후공을 모를 테니까.”

내가 후공이라고!

듣기 싫어도 들렸기에 고스란히 듣고만 있던 후공이 부들부들거렸지만, 천공단이 알 수는 없는 일.

그저…….

“자자, 빨리 상 정리하고 산에 올라가자고!”

“서둘러!”

“지귀객, 네놈이 앞장서! 넌 백 번 절해. 아니 천 번 해!”

천공단이 우르르 몰려가 정리하고, 또 우르르 사라져 갔다.

“하하하! 대공자, 천공단은 참 재밌는 사람들입니다.”

모용곽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후공의 안색이 펴질 리 만무. 그저 한심하게 모용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재밌는 사람들 중에 군사의 동생도 있는데, 괜찮습니까?”

적당히 해야지,

같이 미쳐 가는데?

모용곽이 미소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도리어 크게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아우에게 들었습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크흠.”

후공은 그저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헛기침을 해 보였다.

무엇을 들었고, 무엇이 감사한지는 따로 물을 것도 없었다.

그런 모습에 모용곽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이미 그는 지난밤 아우에게 들었던 터.

천공단이 되어 공청석유와 금구의 내단을 받았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겪은 모든 일들도 세세히 들었기에, 모용곽은 실상 맹에 쏟아져 들어온 전서를 보기 전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원래도 천룡대전의 일로 대공자에 대해 각별했던 마음은 그로인해 더 커진 터.

이 세상에 누가 그런 영약을 나눠줄까.

대체 얼마나 큰 사람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대공자의 시큰둥한 반응도 마음에 들었다. 왜 대공자가 화가 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입니다.”

어느새 당도한 곳은 맹의 서쪽 외벽이었다.

겉으로는 화단과 벽, 나무들이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진법이 발동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이곳을 지나고 넘어야 맹주전이다.

진법의 영기가 쓸고 지나가면서 충돌. 흑주석이 그 기운에 반응하면서 부서졌을 터.

그와 동시에 후공은 천화서고의 진법도 떠올렸다.

천화서고는 흑주석을 애용하지 않는다.

사용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나, 다수의 진법은 자연 그 자체의 오행과 구궁을 활용한다.

환혼의 묘는 어그러지고 튕겨서 좌표는 천화서고로.

잠들어있는 사이,

무림맹과 천화서고 사이에 환혼.

범항은 망설임 없이 자결.

그리고 나는…….

천화서고에서 독약을 복용해야만 했지.

이제 남은 의문은 환혼대법을 펼친 존재.

‘누구인가?’

서쪽이니, 몇 곳이 떠올랐다.

밀교, 마교, 귀운종.

물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귀운종.

그렇다 해도 밀교와 마교를 예외로 둘 순 없다.

밀교는 온갖 기이한 술법을 연구하는 이들이고, 파골법사만 해도 아직까지 몸을 연기로 화해 작은 열쇠 구멍으로 몸을 빼내는 법을 연구하고 있을 테니.

하지만 밀교가 굳이 무림맹을 상대로?

그런 의문이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마교.

마교 또한 해괴한 놈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마교로 특정하는 건 무리.

그곳에는…….

‘도천강.’

기억 속에서 후공은 오래된 인연,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얼굴도 마치 눈앞에 떠 있는 듯 떠올랐기에, 후공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역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건 귀운종.

현재 맹의 천하십객이 자리를 비운 것도 귀운종 때문이라 하니, 무게추는 자연스럽게 귀운종 쪽으로 흘러갔다.

“대공자, 다른 궁금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잠시 지형지물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군요.”

“네.”

모용곽의 목소리에 실망이 묻어났다.

후공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모용 군사, 이제 맹을 둘러보고 싶군요.”

“네,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이제 가 보십시오.”

“네?”

모용곽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빠르게 깜박일 때, 말이 이어졌다.

“제갈 소저와 단둘이 오붓하게 거닐고 싶으니 가 보세요.”

“……네.”

모용곽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이내 쭈뼛쭈뼛 물러나는 모용곽을 보다가 대공자 쪽을 보며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자, 오붓하게요?”

“네, 오붓하게.”

태연한 대답에 제갈혜가 빤히 바라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제갈혜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이든.”

“흠…… 말하려니 민망하네요.”

“민망하다 싶을 땐 말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제 오랜 경험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오랜 경험이라……. 그대는 꼭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크흠, 그래서 궁금하신 건?”

제갈혜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저 좋아하나요?”

“좋아합니다.”

즉답에 제갈혜가 울상을 지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세상 누가 좋아하냐는 말에 이렇게 빠르게 답한단 말인가. 그것도 건성으로 싱글거리면서.

“안 좋아하는군요.”

“좋아합니다만.”

“됐어요.”

“아니, 좋아한다는데 왜…….”

“가요!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아무 데나 좋습니다. 그보다 아까 말은 진심입니다.”

제갈혜는 답하지 않았다.

친 오라버니가 따로 없었다.

좋아해. 됐냐? 이런 식이 아닌가.

‘대체 모용 군사는 왜 돌려보낸 거람.’

**

잠시 후.

후공은 암부에 있었다.

무림맹 암부(暗府).

원 명칭은 암호해독부.

맹의 천재 집단.

암호를 해독하고, 암호를 만들기도 한다.

맹의 여러 난제를 해결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탓에, 암부의 쓰임새는 유용했다.

과거 안휘 지부장인 몽연몽이 천화서고의 천재를 암부로 영입하려는 목적으로 찾아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총 인원은 다섯.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두뇌라면 눈앞의 노파였다.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노파.

책에 파묻혀 사는 이.

어쩌면 난화서원의 묵영보다 뛰어날지도.

후공이 알고 있는 암부의 부주 화설난은 그런 존재였다.

맹을 둘러보고 싶다고 한 건 암부와 접촉하고 싶어서였고, 암부의 천재 중에서도 이 노파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명성 높은 천화서고의 천재를 이리 마주하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부주 화설난이 차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영광입니다. 불쑥 찾아왔음에도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반가울 수밖에요. 암부의 일원으로 만나게 될 줄 알았거늘 이렇게라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저로선 매우 아쉽지만, 그대의 명성이 천하에 요동치니 어쩔 수 없군요. 그대에겐 암부는 이제 작은 그릇에 불과하기에 그대를 담아둘 수 없겠죠.”

예의상 오가는 인사말들.

그 끝에 화설난이 미소를 머금었다.

“대공자, 제 나이가 몇 살로 보이나요?”

후공도 미소를 머금었다.

나이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할 순 없는 일.

“마흔 살, 많아야 마흔두 살 정도로 보입니다.”

“하하하하하!”

화설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제법 사람을 기쁘게 할 줄 아는군요.”

“설마…… 마흔다섯?”

“하하하하하!”

다시 웃음을 터뜨린 화설난이 흘러내린 백발을 살짝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세요.”

놀랄 일은 없다.

나이는 알고 있다.

“물론입니다.”

“저는 스물셋이에요.”

“어…….”

놀라지 않았지만, 놀란 척해야겠지.

후공은 짐짓 눈을 크게 떠 주었다.

암부의 부주, 화설난.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그녀는,

올해 스물셋.

이 천재는 밝게 웃고 있지만 아픔이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외모를 가져 본 적이 없다.

해답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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