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다시 사천으로. 촉산으로.
놀란 표정을 본 화설난이 웃음을 머금었다.
“대공자, 너무 놀라는군요. 물론 그대를 탓할 생각은 없어요.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요.”
“크흠, 나이를 내려 말한 김에 더 내릴 걸 그랬습니다. 그럼 맞췄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하하하!”
화설난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를 찔렸다. 그녀로선 반응이 뜻밖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늘 같다. 처음엔 경악, 그다음은 연민에 찬 눈동자. 그러곤 안타까워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도 아니면 농담 말라며 다시 묻거나.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는 빠르게 평정을 찾은 걸 넘어 도리어 농담까지 건네니, 놀라운 한편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대는 농담이냐고 다시 묻지 않는군요.”
“농담일 리가요.”
“왜 그렇죠?”
“세상 어디에 이렇게 단아하고 아름답게 늙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다시 화설난이 크게 웃었다.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그 모습에,
‘화설난도 같아졌어.’
제갈혜가 내심 중얼거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대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렇게 된다.
그녀는 안내자로 함께 자리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터.
대공자에게 부주 화설난에 관한 사전 정보를 주지 않은 채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 했는데, 역시나 화설난도 다를 바 없었다.
곁에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백부처럼…….
대공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공자,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죠?”
“물론입니다. 혹시 부주께선 삼악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육각망, 영악초, 독양충.”
“알고 있어요. 흐음, 그대는 삼악을 찾고 있나 보군요?”
질문하는 화설난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공자, 삼악을 찾는 일은 포기하라고 권하고 싶군요. 삼악은 찾기도 힘들지만, 설령 찾았다 해도 섭취하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공능은 이루 말로 할 수 없겠지만,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랍니다.”
“전 이미 삼악을 이루었습니다만.”
“네?”
화설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삼악을 이루었다니. 그게 정녕 되는 것인가?
“그…… 그걸 어떻게?”
“꾹 참았습니다.”
“아, 아니 잠깐만요! 그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어느샌가 화설난의 말투가 발랄해졌다.
여태 노파의 외모에 걸맞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후공이 빙긋 미소 지었다.
화설난의 이런 모습, 이런 말투를 보고 싶었다.
원래 이 모습이 맹주였던 자신 앞에서 보이던 모습인 것이다.
“크흠, 참으면 됩니다.”
“아니 그게…….”
“부주께선 농담이라고 묻지 않는군요.”
“농담은 아닐 테죠.”
“왜 그렇습니까?”
“흐음…….”
화설난은 침음성과 함께 미소 지었다.
아까 자신이 물었던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것이다.
진실일 것이다.
최근 강호를 뒤흔드는 대공자의 명성의 근간이 의문이었는데, 삼악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래서일까.
삼악을 듣고 나니 대공자가 또 달라 보였다.
외모만으론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서생의 느낌이었는데, 강해 보였다.
그의 마음은 어느 정도로 강인한 걸까.
영악초는 그녀 또한 시도해 본 적이 있었기에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삼악 중 난이도가 가장 낮다는 영악초조차 한입 베어물고 쓰러졌었다.
깨어나 보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그걸 해낸 이를 마주하고 있다니.
내심 혀를 내두른 화설난의 생각은 이어져갔다.
그럼 삼악을 거론한 이유는?
설마 그 너머인가? 삼악의 양분.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삼악의 양분이라 불리는 것들은 삼악보다 더 난이도가 높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주, 제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짐작하신 듯하군요.”
“네, 하지만 그건 알아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에요.”
“풍열, 공청석유, 봉양목. 그중 둘은 찾았습니다.”
“어…….”
화설난은 반쯤 넋이 나가버렸다.
천화서고의 천재이니 알고 있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둘을 찾았다니.
“남은 건 봉양목입니다. 난화서원에 의뢰해 두었으나, 서두르고 싶어 부주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난화서원의 묵영이 언젠가는 답을 찾겠지만, 길은 여러 개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 후공의 생각이었다. 또한 화설난은 과거 오래 지켜본 바 묵영보다 더 뛰어난 존재인 것이다.
그런 후공의 기대는 적중했다.
화설난이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고 있어요.”
후공의 안광이 순간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
어느샌가 안광을 추스른 후공이 입을 열었다.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응?”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
그래, 원하는 것이 있겠지.
후공은 짐작할 수 있었다.
돈? 보물? 아니다.
화설난에게 필요한 건, 그녀가 원하는 건 젊음.
단 한 번도 소녀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여인은, 평생을 노파로 살아야 할 스물셋의 여인은 아가씨가 되고 싶어 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할머니로 불리지 않고, 단 한 번이라도 ‘소저’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들어보죠.”
“대공자, 이해해 주세요. 그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욕심이 생기는군요. 풍열을 취하고, 공청석유를 찾아낸 사람이라면 저의 병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요.”
“어렵군요.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화설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 병은 의원이 고칠 수 없어요. 절세고수라도 해결할 수 없죠. 제 병은 두 가지. 하나는 구음절맥이요, 다른 하나는 노화입니다. 그중 구음절맥은 완치되었어요.”
화설난의 눈이 잠시 위로 향했다.
잠시 눈빛이 아련해진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맹주…… 후공께서 구음절맥을 해결해주셨죠. 후공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삼 년 전에 죽음을 맞이했을 거예요. 후공은 제 은인입니다. 그리고 후공은 제 노화 또한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셨죠. 하지만…….”
아직까지 이 모습.
후공은 화설난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다. 그건 해내지 못했다.
누구를 데려와도, 무엇을 써봐도 소용없었다.
그러니 지금도 장담할 수 없다.
그때 못한 걸 어찌 해결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대공자…… 그러니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듣고 있습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답을 찾아주겠노라고.”
화설난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겼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당장은 아니어도 좋아요. 몇 년이 걸려도 좋아요. 그저 약속해 주세요. 제가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원하는 건 희망.
다른 건 없다. 화설난은 가능성만 열어 달라는, 그런 마음을 전했다.
후공은 화설난의 간절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선은 다해 보마,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이미 노력해 보았기에,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화설난이 속으로 삼킨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금새 화설난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당장 눈물을 흘릴 듯 그렁거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후공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봉양목을 얻기 위해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할 수는 없다.
구음절맥을 해결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
당시에는 소림에서 대환단을 얻어오고, 자신의 강대한 내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에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지만 이 문제는 다르다.
“부주.”
“……?”
화설난이 바라봤다.
약속을 하겠지. 반드시 해결해 준다고 약속하겠지.
봉양목이 필요할 테니까.
“봉양목 이야기는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부디 선한 인연이 닿아, 본래 가졌어야 할 아름다운 외모로 돌아오길 마음으로 빌겠습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설난이 결국 눈물을 흘렸고, 제갈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따라 일어섰다.
혼자 남겨진 화설난은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그 밤,
“콜록, 콜록, 콜록!”
후공은 요로선인과 마주했다.
요로선인이 양손으로 머리를 눌러대면서 입을 열었다.
“콜록, 콜록.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니 이해하게. 내 살다살다 천공단 같은 놈들은 처음이네. 콜록, 콜록! 금적자 놈을 원망했는데, 알고 보니 금적자 그놈은 얌전한 거였더군. 콜록, 콜록, 크에에에엑!”
금적자가 머문 두 달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밤낮으로 들려온 피리 소리와 고함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요로는, 완전체가 된 천공단의 맛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콜록, 콜록…… 자네는 대체 어떻게 견디는 건가? 콜록, 콜록!”
“그런가 보다 합니다.”
“콜록, 콜록. 태평한 소리하고 있구만. 내 친구 후공이야 껄껄 웃고 말 것 같지만…… 콜록, 콜록! 난 여간 정신 사나운 것이 아니네.”
정신 사나운 건 비단 요로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은 전체가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천공단 언제 가냐고, 언제까지 붙잡아 둘 거냐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콜록, 콜록.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남고…… 콜록, 콜록, 천공단은 당장 내일이라도 어디로 보냈으면 싶네. 콜록, 콜록!”
- 내일 떠나겠습니다.
- 아니, 자네까지 갈 건 없고.
전음이 들려왔기에 요로선인도 전음으로 답했다.
“콜록, 콜록.”
- 보자고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몇 가지 결정을 지으려는 것이네.
- …….
- 첫째는 지귀객 문제일세. 여러 이야기가 나왔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라네. 맹의 뇌옥에 오 년 동안 감금하자는 쪽으로 굳어졌지.
- 안 됩니다.
요로선인은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 만약 자네가 강경하게 나온다면 풀어주기로 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신검을 회수할 수도 없었고, 지귀객을 찾지도 못했을 테니.
- 삼 년이 아니라, 백 년으로 하죠.
“응?”
전음도 잊고 요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콜록, 콜록! 백 년씩이나?”
“백 년이 좋겠습니다.”
후공은 그리 말한 후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끝날쯤 요로선인은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콜록, 콜록. 괜히 자네가 천공단주가 아닌 게로군. 알겠네.”
- 신검은?
후공이 한쪽 벽에 기대어진 번쾌친을 바라보자, 요로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확정되었네. 이제 천하제일인의 신검은 자네의 것이네.
- 영광입니다.
영광일 리가.
후공은 그저 흡족할 뿐이었다.
찾기는 이미 찾았지만, 이 순간의 의미는 뜻깊다.
번쾌친도 의미를 알아차렸다.
주인의 마음과 이어져 있기에 뛸 듯 기뻐했다.
이제 온전히!
다시 주인과 함께!
언제까지나!
스르르릉!
견딜 수 없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앙!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며 빠져나왔다.
번뜩였다 싶은 순간, 이미 창문을 빠져나갔다.
흡족해하는 주인의 의식을 느끼며 맹의 밤하늘을 질주했다.
그 광경에 요로선인이 너털거렸다.
“허허, 거참. 콜록, 콜록!”
이미 한번 당해본 터라 보았지만, 다시 봐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놀라움은 모두가 같았다.
“와아아……”
“맹주님의 신검!”
“후공…….”
무림맹의 모든 고수들의 시선이 밤하늘로 향했다.
전각 안에 있던 이들도 밖으로 뛰쳐나와 세 줄기 자줏빛 광채를 멍하니 바라봤다.
빛을 뿌리며 밤하늘을 휘젓는 자줏빛 광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두가 탄성과 함께 떠올렸다.
‘맹주…….’
마치 맹주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후공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아련한 그리움이 떠도는 사이로,
크아아아아아앙!
세 줄기 자줏빛에 이어 또 하나의 자줏빛이 가세했다.
**
그 밤, 후공은 요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침을 맞아 서신 하나가 찾아들었다.
“대공자, 암부의 부주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서신을 가져온 제갈혜를 향해 후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받아들었다.
- 대공자, 어제는 제가 무례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약속의 말은 잊어 주세요. 그대의 말. 건네지 않았지만 저에게 들려온 말. 약속은 못 하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 말까지 잊어 주세요. 봉양목을 꼭 찾길 바랍니다. 봉양목은…….
‘촉산.’
화설난은 마음의 소리를 들었나 보다.
후공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답했다.
‘최선을 다하마. 그 말은 잊지 않겠다.’
이제 가야 할 곳은 다시 사천.
백혼곡이 있는 촉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