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그가 알아줬어!
오전 시각.
천공단은 맹에 작별을 고했다.
무림맹은 아쉬움과 후련함이 교차했다.
태생적으로 요란함 과다증으로 태어난 것 같은, 혹은 주눅에 대해선 결핍증에 걸린 것 같은 천공단이 떠나는 건 후련했지만…….
천화서고 대공자가 떠나는 건 왜인지 아쉬웠다.
지난 밤 맹주의 신검들이 밤하늘을 질주하는 것을 보아서일 것이다. 맹주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맹주의 후계자는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한편으로는 대공자라는 사람 자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음에도 대공자는 왜인지 감사해하지도 않고, 들뜬 기색이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당연하다는 태도.
평정심인가, 오만함인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여유있는 모습이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천화서고 대공자!
천하를 덮어버릴 듯한 명성의 실체와 마주친 그러한 소회는, 암부 부주 화설난도 같았다.
그리고,
‘그는 알까.’
떠나는 길.
맹의 지도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조금은 떨어져 지켜보면서 화설난은 생각했다.
봉양목의 주 서식지는 알려주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봉양목이 어떤 생김새인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선 적어두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겠지.
다시 물어오지 않은 걸 보면 알 것이다.
난화서원에 의뢰했다고 했으니 그곳에서 들었을 수도 있다.
‘그는 알까.’
알고 있는 게 맞겠지만,
알아줬으면 하는 것도 있었다.
서신에 빠뜨렸던 또 다른 이야기.
아직 붓에 먹물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붓을 벼루에 되돌려 놓고 다시 들지 않았던, 붓이 남겨야 했을 문장.
- 저도 촉산으로 함께 가고 싶어요.
머릿속에서 마지막 맺음을 ‘싶습니다’라고 적어야 하나, ‘싶어요’라고 적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가 아무 글자도 적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알아줬으면…….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대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전부였지만 그 뒤 대공자의 눈빛은 다른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처럼 나도 들었으니,
그대도 들을 수 있지 않나요?
선인의 승인은 얻었다.
선인은 선선히 승낙해주었다.
거친 기침과 함께 좋은 생각이라고 해주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승인이 더 필요하다.
그런 마음을 담아 화설난은 조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봤다.
**
작별 인사는 길었다.
천공단이니까.
천공단은 말이 많으니까.
무림맹 인사들과 친해지기엔 너무 짧았음에도 친해진 것처럼 굴었다.
무림맹의 사정 따위,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깔깔거렸다.
깔깔거린 이유는 또 있었다.
단주와 동행이 결정되었기 때문.
다시 사천행.
이쯤에서 안강에 있는 천공단 본거지로 꺼지라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동행이 결정되었기에 이는 천공단에겐 선물이었다.
물론 깔깔거리는 대신 마음을 쓸어내린 이도 있었다.
- 선배, 뒷배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소?
지귀객은 무림맹에서 무사히 나가게 된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흑전을 상대할 때 자신의 공로가 인정된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역시 천공단주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들려온 전음에 무흔신투가 미간을 찡그렸다.
- 이 새끼야, 내가 뭐랬냐. 대공자가 어떻게든 막아준다고 했냐, 안 했냐.
- 흐흐, 좋네 좋아. 난 대공자가 꺼지라고 할 때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 금구의 내단까지 준 사람이야. 사람이 커.
- 그렇지. 아무렴.
그때였다.
인사도 거의 마무리될 즈음, 일단의 검수들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맹의 집법당 소속 검수들이었고, 앞장선 이는 맹의 집법 당주.
“지귀객.”
“네?”
“넌 갈 수 없다.”
“네?”
“넌 뇌옥에 갇히게 된다.”
“그, 그게 무슨…….”
지귀객이 하얗게 질렸다.
곁을 보니 방금까지 있던 무흔신투가 안 보였다. 어디 갔나 봤더니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언제 물러났냐!
지귀객의 시선은 옮겨졌다.
대공자를 찾았다.
“대, 대공자님?”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지귀객, 잘 지내라.”
“네??”
지귀객이 휘청였다.
어째서?
어째서 방패가 되어주지 않는 것인가.
금구의 내단까지 주어 놓고. 큰 사람이잖아?
지귀객은 도움을 바라며 천공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도움도 바랄 사람에게 바라야지.
천공단이다.
“하하하하! 꼴좋다. 두더지 새끼!”
“우와아, 이제부터 매일 무림맹 밥을 먹는 거야? 부러워 죽음!”
“천공단이 될 줄 알았는데 무림맹이 되어 버렸네. 하하하하하하!”
“내가 어제 성묘할 때 서른 번 절하고 그만둘 때 딱 알아봤다. 도둑놈의 새끼가 성의가 없더라니!”
“두더지한텐 뇌옥이 딱이지!”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낭인왕이 떠들었다.
천공단의 젊고 어린 층이 그 뒤를 이었다.
“하하하하, 희망을 주고 묻어버리기!”
“즐거웠어요. 십 년 뒤에 보자고요!”
“두더지 아저씨, 너무 상심 말아요. 일 년에 한 번씩은 찾아올 테니까! 나 너무 친절한 거 같아!”
이 개새끼들이 진짜.
지귀객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정도면 거의 잔치였다.
그래도 함께 다닌 정이 있어 걱정은 해줄 줄 알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리~~~.
잔치 맞다는 듯 금적자의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기에,
“야, 이 개새끼들아~~~~.”
결국 참지 못한 지귀객이 고함을 내질렀다.
피리를 왜 부냐고!
뇌옥에 갇힌다는데!
“니들이 정말 사람 새끼들이냐아아아아!”
피리 소리가 뚝 그쳤다.
금적자가 으르렁거렸다.
“어린 놈의 새끼가 말을 그 따위로밖에 못해! 뇌옥에 갇히기 전에 나한테 죽어볼래!”
지귀객의 귀에 그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흐느끼며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무흔신투를 보고 더 서러워졌다.
선배 무흔신투가 싱글벙글 헤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웃고 있는 건가?
같은 도둑놈인 주제에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삐리리리리리~~~~. 삐리리리삐삐!
“아, 삑사리 나버렸네.”
삐리리리리리~~~.
다시 피리 소리가 흥겹게 흘러나왔고, 천공단의 끝도 없는 조롱 속에 지귀객은 울부짖었다.
제발, 피리 좀 불지 말라고!
미칠 것 같다고! 왜 흥겹냐고!
그러는 와중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땅 속으로 도망칠까?
그런 생각도 잠시, 여기가 무림맹이란 걸 깨닫고 포기했다.
여긴 무림맹.
뒷산이 아니어서 땅속에도 진법이 거미줄처럼 흐르고 있다. 파고들다가 조각나버린다.
아니 진법을 어찌 운좋게 피한다 해도 대공자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천주를 쫓아가 멸살해버린 대공자가 아닌가.
상념도 잠시 지귀객은 끌려갔다.
“대공자니이이이이임~~~.”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삐리리리, 피리 소리가 대신할 뿐이었다.
“저기…… 십 년입니까?”
체념한 지귀객이 아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 백 년. 대공자의 요청이었다.
나직히 귀에 꽂히는 집법당주의 전음에 지귀객이 축 늘어졌다.
금구의 내단을 준 건 더 큰 나락을 위한 희망고문이었구나.
그렇게 지귀객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배웅한 건 천공단의 웃음소리와 금적자의 피리 소리.
그리고 화설난의 눈동자도 배웅하고 있었다.
‘재밌는 사람들이야. 그때도 그랬는데…….’
맹주가 살아있을 때가 그랬다.
별의별 강호인들이 다 드나들어 언제나 떠들썩했다.
금적선생도 그때 봤고, 항마삼협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외 많은 이들.
맹주는 친구가 많았고, 모두 맹주를 좋아했다.
물론 맹주는 귀찮아했지만 그렇다고 내쫓지도 않았다.
마치 지금 천화서고 대공자처럼.
‘어?’
그런 생각 끝에 화설난이 시선을 돌리니 대공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왔다.
- 부주, 왜 아직 거기 서 계십니까?
- ……?
전음에 놀라 화설난은 눈이 커졌다.
두근.
그저 전음일 뿐인데 심장이 뛰었다.
무슨 뜻이지? 설마?
- 함께 가시죠. 괜찮다면.
화설난은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었어.
서신에 기록하지 않은 문장을 그가 읽었어.
- 제가 오해한 겁니까?
- 아, 아니에요.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이 나올까 봐 화설난은 황급히 전음을 보냈다.
대공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 드디어 전음을 할 수 있게 되었군요.
- 네? 드디어라고요?
“크흠…….”
후공은 실언을 깨닫고 헛기침했다.
구음절맥을 치료한 후로 비로소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된 화설난이었기에 전음은 멀었다 생각했는데, 그사이 성취가 있었다 싶어 꺼낸 것이 실수였다.
- 구음절맥이라 하셔서.
- 아…….
마치 과거에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려왔던 건 맞지만, 화설난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알아준 것이 좋았다.
동행이 기뻤다.
강호를 돌아보고 싶었다.
구음절맥을 치료해주었던 후공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경공 수준이 오르고, 전음까지 가능해지면 강호를 함께 돌아보게 해준다고 했었는데, 어느 날 훌쩍 떠나고 말았다.
그날, 그날 이후,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른다.
‘후공은 아니지만…… 대신…….’
화설난이 천공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갈군사가 함께 있고, 대공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천화서고 대공자이지만 이것도 좋아.’
대신이 아니다.
같은 사람.
동행을 청한 건 후공.
화설난은 후공에게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
닷새 후.
“누나, 뭐 좋아하는 요리 있어?”
“어…….”
어느덧 사천 북부 평무를 지날 때, 화설난은 곤경에 처했다.
소천개.
이 개방의 어린 거지가 부르는 호칭은 어떻게 된 게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이 노파의 모습임에도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누나’였다. 다른 이들은 ‘부주’라 칭하는데 말이다.
“왜 그래? 누나 맞잖아? 할머니라고 불러줘?”
“그럼 죽일 거야.”
“하하하하! 거 봐, 좋으면서 괜히 그래.”
“넌 내 모습이 이상하지 않니?”
“전혀.”
“그래?”
“응, 이상한 사람들을 하도 많이 만나서 괜찮아. 할머니인데 귀여운 소녀인 사람도 만난 적이 있는걸!”
“누구?”
“북해빙궁의 궁주님.”
화설난의 눈이 커졌기에 소천개가 깔깔거렸다.
“궁주님, 반로환동했어. 귀여워. 근데 난 꼬박꼬박 할머니라고 불러서 얼음될 뻔했어.”
“아…… 반로환동…….”
화설난이 멍청해졌다.
반로환동한 이들이 있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사례들이었다. 현 시대에 반로환동한 이가 있었다니. 그것도 북해빙궁의 궁주라니.
“누나도 반로환동하면 좋겠다.”
“하하, 그건 어렵지.”
화설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지 생각만으로도 아득하다. 게다가 반로환동은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쳐 일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요리는?”
“난 아무거나.”
아무거나, 라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천공단은 일단 대식가들인 것이다.
많이 시키고, 다양하게 주문하니 동행하는 내내 화설난이 불편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역시나,
“여기 주문이요!”
이내 반점의 이 층에 올라 천공단이 요리 주문을 하는데 주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천공단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꽂혔다.
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
벽 쪽 탁자에 앉아 있는 청년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건 또 뭐여?”
“왜 저래?”
“꼼꼼한 거야, 지랄인 거야?”
천공단이 한마디씩 툴툴거렸다.
그럴 만했다.
청년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골라 덜어내고 있는 것이다.
“단주, 저놈 보게. 부자인가 봐.”
얼마나 부자면 고기를 골라내냐며 금적자가 말을 걸어왔다.
“하하하!”
후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자여서겠는가.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겠지.
소림승이니까.
승복을 입고 있지 않고, 머리카락이 있었지만 어설프다.
나름 변장을 했지만,
어설퍼서 후공은 바로 알아봤다.
‘무광.’
소림방장 릉인의 제자가 눈앞에 있었다.
열심히 고기를 골라내면서.
‘반갑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