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그날처럼 부서지다.
은소소와의 대화가 끝난 건 정오 무렵.
그 직후,
파라라라락!
사천당가에서 백여 마리의 전서매가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각각 달랐다.
같은 사천, 혹은 감숙성의 무림맹, 그 너머 섬서, 호북, 하남까지 날아가야 하는 전서매도 있었다.
목적지는 다르지만, 매달고 있는 서신은 같았다.
천화서고 대공자와 천공단.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런 물음이 담겼다.
회신 속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돌아온 전서매가 해답을 가지고 왔다.
- 천공단은 사천의 중강으로 다가가는 중.
당가주는 갸웃했다.
‘사천으로 돌아왔다?’
중강이면 사천의 성도에서 북쪽.
멀지 않다.
‘묘하군.’
그동안 강호에 알려진 천공단의 행보가 워낙에 빠르고 예측불가라 혹시 무림맹을 떠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사천으로 돌아오다니, 가히 예상 밖 행보였다.
천공단주는 소소와 초를 만나려 함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당가주는 고개를 저었다.
두 녀석에겐 그만한 가치가 없다.
자신에게나 사랑스러울 뿐이다.
동행하는 내내 천공단주가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소소가 툴툴대지 않았던가.
천공단의 면면을 볼 때도 그렇다.
천공단은 지금도 차고 넘친다.
각각의 능력이든, 인원이든, 배경이든.
무엇보다 천공단주는 무언가에 연연하는 이가 아니다.
소소에게 명청령수를 선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소소와 초가 금구의 내단까지 받았다고 했으니, 천공단주라는 인물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러니 목적은 다른 데 있을 터.
상관없다.
그래, 목적은 중요치 않다.
그저 빨리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기쁠 뿐.
촤악!
당가주는 흑의 장포를 걸쳤다.
흑련의(黑連衣).
오랜만에 입어 본다.
걸친 순간 묵직함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잠시 몸은 빠르게 적응했다. 묵직함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언제 그랬냐 싶게 깃털을 걸친 것 같아진다.
얼마만인가.
그래, 생각난다. 그때다.
후공이 떠났을 때,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처음엔 이건 무슨 농담이냐며 웃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흑련의를 걸쳤다.
다 죽여버린다.
무림맹 개새끼들, 남김없이 죽여버린다.
자결이라고? 그 후공이?
한 달 전에 만나고 온 나더러 자결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제갈 형님을 잃은 슬픔도 옅어진 걸 아는데, 남겨진 제갈혜를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는 후공이 자결을 했다는 말을 나에게 믿으라는 거냐! 나의 후공이 죽어?
죽였겠지!
장례는 칠일장.
사망일로부터 한참이나 뒤로 미뤄진 칠일장에 참석하기 위해 풍제(風帝)에게 연락을 취했다.
풍제도 같은 생각이었다.
반드시 찾아내,
죽여버린다.
만난 순간부터 풍제가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탓에 숨을 쉬기가 곤란할 정도였고, 풍제가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한 것도 처음 보았다.
하지만 맹에 도착하면서 그런 생각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여차하면 무림맹을 쓸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건만 그저 멍해지고 말았다.
엄청난 인파.
그리고 거대한 슬픔.
전 강호가 온 듯했다.
그리고 넋이 나간 건 무림맹도 마찬가지.
제갈혜의 하얗게 텅 비어버린 동공을 보고 있자니, 현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지.
누가 있어 후공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풍제도, 자신도 같아졌다.
무림맹과 같아졌다.
장례 인파와 같아졌다.
분노 대신 회색빛이 되었고,
제갈혜처럼 눈동자가 텅 비어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1년 전.
겨울이었고, 다시 그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그 1년 사이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강호를 덮어버렸다. 후공의 죽음이 아주 먼 옛날 일인 것처럼, 온 강호가 그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영웅이 가고 새로운 영웅을 맞이한 강호.
그럴 수 있다.
후공도 나타났을 땐 강호가 처음 맞이하는 영웅이었으니.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희한한 일이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떻게 후공의 신검을 다루는가?
어찌 환명의 묘를 보일 수 있는가?
왜 제갈혜와 함께하고 있는 것인가?
왜 제갈혜의 목숨을 구한 것인가?
그리고 천공단에 왜 무흔신투가 있는 것인가?
무흔신투는 후공의 비둘기였고, 제갈혜는 친딸과도 같았다.
실제 이야기를 듣다보면 별것 아닌 의문이 되게 될지도.
그럴지도.
한데 왜 나는…… 이렇게 흥분하는가?
밖으로 나섰다.
스스슷!
그림자가 맺히는가 싶더니 두 호법이 막아섰다.
“주군!”
“주군,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두 호법은 흑련의의 의미를 안다.
홀로 한 문파를 쓸어버릴 정도의 마음가짐일 때라야 흑련의가 필요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한다.
짐작은 어렵지 않다.
전서매에 담긴 내용.
천화서고 대공자와 연관된 일이겠지.
천화서고 대공자,
그는 도대체 어떤 무례를 저지른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두 호법의 눈빛은 근심으로 물들었다.
어느샌가 주군의 얼굴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스스…….
부서져내리며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해져 급기야 눈이 어디에 있는지, 입이 어디에 있는지도 구분이 가지 않고, 얼굴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지경.
이는 귀원공(歸元功).
귀원공이 펼쳐지면 형체는 비산하고 흩어진 잔영으로 얼굴은 식별 불가의 상태가 된다.
그것이 적에게는 공포.
하지만 지금 눈 앞에는 적이 없다.
그저 주군은 격동하고 있음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격동의 상태가 될 때…….
1년 전 그날도 그랬다.
날아든 한 통의 서신.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서신.
주군은 껄껄 웃었다가 이내 멍해졌고, 그다음…….
부서져내렸다.
마치 지금처럼.
그러니 함께 가야 했다.
하지만 틀렸다.
당가주 당명에게 그날은 비통함이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어떤 기대감.
의혹이 떨쳐지지 않는 한 죽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죽음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격동을 금할 수 없었다.
“혼자 간다.”
그 말과 함께 주군이 완전히 부서져내렸다.
두 호법은 시선을 돌려 순식간에 점이 되어가는 주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끼이이이이이이!
하늘을 날던 색황조가 주인을 따라갔다.
***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
천공단은 멧돼지를 잡고 있었다.
중강이 코앞이라 중강에서 반점이든 객잔이든 들어설 수 있었지만, 이번엔 천공단만의 별식 시간을 가졌다.
꾸에에에엑!
돼지의 비명소리 이후 빠르게 해체.
장작불이 타오르고 그 위로 멧돼지가 노릇노릇 구워져 가니, 그러한 광경은 암부의 부주 화설난에겐 선물이 되었다.
‘마치 천공단이 내게 선물을 건네는 것 같아.’
천공단은 늘 그래 왔던 것일 수도 있지만, 화설난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볼수록 기이한 사람들이다.
천공단은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틈만 나면 무슨 내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조용할 시간이 없다. 또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어느샌가 깔깔대고 있는 사람들.
천공단의 등장 방식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숨어 있다가 나타나기. 한 글자씩 끊어서 소개하기. 특이한 자기만의 동작을 취한다든지, 그런 것들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덕분에 천공단의 신입이 된 지귀객이 똑바로 못한다고 많이 맞았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내 실제 나이는 정말 60세이고, 70세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천공단과 동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날아가버렸다.
누구도 자신을 할머니로 대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어느샌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바뀌었다.
소천개는 여전히 누나였지만, 부주라고 부르던 이들도 ‘소저’ 혹은 ‘어이, 거기 아름다운 아가씨!’ 이렇게 부른다.
후공이 데려가주겠다던 강호가 이런 곳이겠지?
옛날 옛적 강호를 주유했던 때가 좋았지, 라고 말하던 후공이었으니까.
“누나! 뭐하고 있어. 왜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려고 하는 건데!”
소천개가 구박해 왔기에 화설난이 팔을 걷어부쳤다.
“나서려던 참이야. 장작불 떼는 건 내가 일등이거든.”
화설난까지 천공단에 가세하자, 장작불 주위의 분위기는 장작불보다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거기에 별 관심없는 이도 있었다.
소림의 무광.
무광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부지런히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천공단이 멧돼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생하는 광경을 본 후로 쭉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고뇌가 깊었다.
멧돼지가 천공단을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맷돼지가 내일의 해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천공단이 나쁘다.
불쌍한 멧돼지.
고기가 되어 버렸네.
그런 고뇌 속에서 염주 돌아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불경을 외우는 속도도 올라갔다.
‘부처님, 소승 결코 멧돼지가 익어 가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꿀꺽, 꿀꺽, 꿀꺽.
군침을 삼키는 속도가 빨라지는 건 어떻게 하려고 그런 개소리를 하는지는 모를 일.
하지만 무광에겐 다 생각이 있었다.
이제 곧.
이제 곧.
다가온다.
‘부처님, 제게 또다시 시련이 옵니다. 중생들을 구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꿀꺽.’
그때 천공단이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왔다.
“완벽해! 완벽한 돼지 구이야!”
“천공단 활동 중 오늘 최고로 잘 구웠어!”
“이봐, 화 소저! 무림맹에서 책만 판 줄 알았더니, 실제론 돼지 굽는 법만 연구한 것 같은데?”
“호호호호호!”
무엇이 저리도 좋을까.
무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쯧쯧, 가련한 중생들.’
그래도 중생들이여 걱정말지어다.
오늘도 내가 먹어서 구해주마.
무광이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오늘 이 멧돼지는 뼈도 남기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완전히 발라먹어 주겠어!”
“이만큼씩 안 먹는 사람은 천공단에서 나가는 걸로!”
“그 정도쯤이야.”
일어나려던 무광이 다시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 띨리고, 염주가 빠르게 돌아갔다.
왜 염주가 잘 안돌아가지? 왜 손이 떨리는 건가?
알고 있다.
중생들을 구제해야 하는데……
중생들이 죄를 짓지 않는다.
‘왜? 왜 다 먹는 거야? 왜 버리지 않냐고! 이 시발놈들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 시간만 기다렸는데.
왜?
제발 좀! 아미타불!
“나무우우우우우우우우~~~ 관세으으으으으음~~~~ 보사아아아아아아알!”
혹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천공단이 깜박 잊은건가 싶어진 무광이 크게 불호를 외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천공단이 즉각 반응했다.
“소림 형아, 시끄러워!”
“시발, 깜짝 놀랐네. 거 조용 조용하게 살자 좀!”
“그냥 좀 와서 처먹으라고오오오오! 아니면 풀이나 뜯어 먹든지!”
“이 상놈의 새끼야, 도대체 언제까지 맞춰 줘야 하냐!”
욕이 한마디씩 퍼부어질 때마다 무광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쪼르르 달려갈 수야 없지.
‘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어리석은 중생들…… 그리고 개자식들…….’
**
서쪽 하늘에 석양이 드리웠다.
포식한 천공단이 악착같이 멧돼지의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색관조와 금섬은 먼저 날았다.
[야, 없다가 보이면 그게 봉양목이야.]
[그윽, 그으윽!]
[근데 진짜 신기하긴 하다. 해님에게 인사하는 나무라니 말이야. 까르르르르르.]
[그윽, 그윽, 극극!]
[뭐? 니가 찾는다고? 개소리 마. 내가 찾을 거야! 내가 제일 잘 찾아! 까르르르르르!]
[큭큭큭! 그윽?]
따라 웃던 금섬이 갸웃했다.
그땐 색관조도 이미 보고 있었다.
[와아, 여기서 저걸 만나네.]
[그윽?]
[색황조야. 나와는 먼 친적 같은 녀석이지.]
번져가는 석양 아래,
색관조와 금섬이 당문의 색황조와 조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