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68화 (268/460)

268화. 고백.

‘미쳐버린 건가?’

형이라니.

당명은 멍해져 금적자를 바라봤다.

들려온 소문보다, 그리고 소소와 초에게 들었던 것보다 천공단의 전반적인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무엇보다 충격인 건 눈 앞의 금적자.

이 강호에 금적자보다 점잖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망가졌다. 사람이 규격이 사라져버렸다.

‘경지는 오른 것 같다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머리를 다친 거냐?’

“형!”

그때 다시 금적자가 형을 외쳤다.

당명은 둔기에 얻어맞은 듯 휘청였다.

호칭도 호칭이지만, 이번엔 눈알이 문제였다.

이 미친 새끼가 눈을 예쁘게 뜬 것이다.

눈을 왜 그렇게 다정하게 뜨는 거냐!

왜 눈을 연속해서 깜박이는 거냐!

처 죽여버린다!

그런 생각도 잠시 당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순 없다.

당명은 이내 꺼지라고 손짓했다.

“네!”

금적자가 쓸데없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삐리리리, 삐리리삐~~~ 피리를 불며 멀어졌다.

피리소리가 경쾌했기에 당명은 다시금 부르르 떨었다.

이게 다 저 애송이 때문이겠지?

당명은 천공단주를 바라봤다.

그래, 저놈이 문제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걸 추천한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발언. 천공단보다 더한 놈이라 할 수 있다. 단주가 저 지경이니 천공단의 상태가 이 모양이겠지.

한데 이상하다.

난 왜 마주할 때 마음이 진탕된 걸까.

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진 걸까.

당명의 시선은 한동안 고정되었다.

천공단주, 애송이가 곁에서 뛰노는 새와 두꺼비를 보며 미소짓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왔다.

어떻게 봐도 애송이인 놈이 손을 들어 보였기에, 당명의 기분은 즉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

익숙한 느낌, 익히 봐온 동작이다.

후공이 저런 식이었다.

시선을 받아 눈이 마주치면 대형은 ‘여어~’ 하는 식으로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대체 뭐하는 놈이지……. 왜 자꾸 거슬리지?’

*

목적지는 촉산.

천공단주는 나무 하나를 찾는다고 했다.

‘봉양목이라…….’

당명으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대단한 나무는 아닐 텐데…….

효능이 특별한 나무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나무를 당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하더냐?

- 물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짐작은 가요.

신형을 날려 이동하는 가운데, 당명은 제갈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유일하게 정상인 제갈혜를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습득하고자 함이었다.

- 어떤?

- 아마도 대공자는 삼악을 이룬 듯해요.

- 하하, 설마.

- 대공자가 지나온 길을 취합해보면 그래요. 드문드문 천공단을 통해서 듣기도 했고요. 육각망은 천화서고에서, 약왕문에서는 독양충. 영악초는 그 전에 찾은 듯해요.

- 찾는 게 문제가 아닐 텐데?

- 삼악이 아니면 대공자의 급상승한 내공력을 설명할 수 없어요.

- 허허…….

당명은 너털거리고 말았다.

삼악은 이룰 수 없다. 그게 상식이다. 누구도 실패를 탓할 수 없다. 그냥 그건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안되는 것이다.

그도 삼악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실패했다.

독양충이었는데, 후유증으로 한 달을 고생했다. 자랑거리가 아니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천공단주 말이다. 애초에 미각을 상실한 것 아니냐?

- 하하, 그렇지 않아요. 미식가예요. 상실한 건 미각이 아니라 겁이에요. 사람이 겁이 없어요.

- 하긴 내게 하는 걸 보면…….

- 숙부께 한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래?

제갈혜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잔악했던 유령곡의 행사.

휴화산에서 모산파를 만났던 일. 화산이 폭발하는 가운데 조마조마했던 순간들, 북해에서 만난 반로환동한 북해빙궁의 궁주와 빙벽에 갇혀 있던 현이신녀가 이야기에 등장했다.

당명은 중간중간 전음도 잊고 탄성을 발했다.

소소에게 듣긴 했지만, 건너 들은 소소의 말과 직접 겪은 제갈혜의 이야기는 차원이 달랐다.

겁을 상실했다는 말도 당명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화산폭발 때가 그렇고, 북해빙궁의 숙원을 해결하는 방식도 놀랍다.

- 어떻게 저 나이에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 거의 산전수전 다 겪은 전대고수의 행보로구나. 아니, 그보다 더하다.

- 숙부라면 똑같이 해낼 수 있겠죠?

그 말에 당명이 피식 웃었다.

- 나? 천공단주보다 백배는 더 잘해낼 수 있다.

- 하하하.

- 후후.

해낼 수 없다.

그건 제갈혜도 알 것이고, 당명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제갈혜는 그저 말을 예쁘게 한 것뿐이었다.

그 절반.

최대치로 잡아도 삼분의 이 정도를 완수할까 말까다.

겪어온 이야기를 세밀하게 듣게 되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산폭발 때 모두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반로환동한 소녀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 대형이라면 가능할지도.

- 그렇겠죠?

- 당연하지.

그러면서 둘의 시선은 앞서 달리는 천공단주에게 향했다.

- 숙부, 무슨 생각하세요?

- 아무 것도. 넌?

- 저는 우습게도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혹시 대공자가 백부는 아닐까 하는. 백부가 환생해서 천화서고 대공자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 어디 아픈 거냐?

- 하하하!

- 후후, 환생했다면 이제 1살이겠지. 청년의 모습일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멍청한 소리다. 똑똑한 제갈혜는 아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것이다.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있다.

소망이 크거나, 그리움이 크거나.

그도 아니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 넌 천공단주를 좋아하는가 보구나.

- 좋아해요.

대답에 망설임이 없어, 당명이 놀랐다가 제갈혜의 표정을 보고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짐작했다.

제갈혜의 표정이 영락없이 손녀인 은소소의 표정인 것이다.

- 대공자는 별 관심이 없나 보구나.

- 그건 아니에요. 누가 바라보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면 언제나 대공자가 저를 보고 있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그래?

- 네, 저를 좋아한대요. 근데 그것뿐이에요.

- 저놈 사내 맞지?

“하하하하!”

제갈혜가 전음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명이 바로 타박했다.

“야, 전음, 전음!”

그 대화를 들은 천공단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후공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제갈혜와 당명이 함께하니, 마치 과거 어느 때인가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좋구나.’

**

그날 저녁은 주루에 들었다.

환영식은 이미 거하게 마쳤지만 그때는 술이 없었기에, 다시금 술과 함께하는 환영식이 열렸다.

무려 천공단의 신입이 사천당가의 가주다.

천공단으로선 몇 번이고 환영식을 하고 싶은 마음.

이날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였다.

“아, 뜨거! 시발, 뭐하는 짓이야!”

쨍그랑, 소리와 함께 고함이 터져나왔다.

국물을 옮기던 점소이가 발을 헛디뎠고, 넘어지면서 손님에게 국물을 쏟아버린 상황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죄송하다면 다야? 누구 죽일 일 있어? 이거 안 보여? 살갗이 뻘겋게 됐잖아!”

점소이가 당황해하며 연신 굽신거렸고, 주루의 주인까지 달려와 사과했다. 배상하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손님의 호통은 그치지 않았다.

“고작 그걸 받고 떨어지라고? 장사 이렇게 할 거야?”

그 모습에 천공단이 누구 할 것 없이 인상을 찡그렸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상놈의 새끼가 큰 소리야.”

오늘은 천공단의 거물 신입이 들어온 날.

물론 아무 날이 아니라도 신경질을 냈을 천공단이지만, 명분까지 있으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가만 안 둔다.

“형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낭인왕이 박차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당명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조소를 머금었다.

‘별 시답지 않은 일에 폭력을 쓰려는 건가.’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대형의 방식은 폭력이 아니었다.

무심히 넘기거나, 그도 아니면 돈을 준다.

그냥 세상 만사 같잖은 것.

그렇게 바라보자니,

“이 정도면 되겠어?”

당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돈을 줘?’

낭인왕이 돈을 주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적당히 넘어가자고 흥정하고 있었다.

‘뭐여……?’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는지, 화를 내던 손님이 급 친절해지면서 덕담이 오갔다.

- 이게 무슨 일이냐?

당명이 황당해 전음을 보냈다.

- 숙부, 왜요?

- 원래 천공단 이런 식이냐?

- 네, 자주 봤어요. 의외죠?

- 늘 이런 식이라고?

- 네. 근데 너무 놀라시는 거 아니에요?

제갈혜는 알 수 없었다.

강호를 함께 활보한 적이 없으니 알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당명에겐 익숙한 광경.

대형의 방식, 자신들의 방식.

그 방식이 천공단에서 드러난 것이다.

우연이겠지.

그저 성향이 겹친 것이겠지.

그럼에도,

‘거슬려……. 심히 거슬려.’

**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젖어들어야 한다.

환혼의 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당명에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다면 더 빨라질지도.

그것이 후공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 시간을 겪고 지나온 사람이 있다.

여러 단서, 여러 징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황들.

그것을 이미 겪어 온 한 사람.

제갈혜.

그날이 오늘이다.

**

“제갈 군사, 군사는 대공자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남자로서?”

“네.”

제갈혜는 두 여인과 함께 있었다.

설영, 화설난.

화설난의 물음에 제갈혜는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생각에 잠겼고, 설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언니, 얼른 이야기해봐요.”

“다 아는 이야기라서…….”

“저는 모릅니다만.”

화설난이 재촉했다.

제갈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대공자를 좋아하고, 대공자는 관심이 없고. 딱 이 정도?”

“대공자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여자로서의 매력은 없나 봐요.”

“말도 안 돼. 제갈군사가 매력이 없다면 이 세상 어떤 여인도 매력이 없는 거예요.”

“그건 틀림없죠.”

화설난의 말에 설영이 맞장구치곤 바로 말을 이었다.

“언니, 기다려봐요. 어느날 갑자기 대공자가 고백할 수도 있어요.”

[까꿍!]

“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세 여인이 바라보니 색관조였다.

[까르르르르, 아가씨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고 있어요.]

“놀러 왔니? 들어오렴.”

[놀러도 왔고, 전할 이야기도 있답니다.]

“전할 이야기?”

[네, 주인님께서 제갈 아가씨를 보자 하셔요. 까르르르르르, 이 밤에, 이 야심한 밤에.]

그 말에 설영과 화설난이 난리가 났다.

“어머! 어머!”

“어머, 어쩜 좋아!”

서로의 팔과 어깨를 두드리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방금 이야기 나눴던 ‘어느 날’이 오늘이냐며 웃음꽃을 피워냈다.

담담한 건 제갈혜뿐이었다.

고백?

웃기지도 않는다.

대체 천산의 후예와 암부의 천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혜는 이내 대공자와 마주했다.

객방이 아닌 밖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

오간 대화는 없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꽤나 걸어 객잔도 보이지 않는다.

긴 침묵에 먼저 인내심을 잃은 건 제갈혜였다.

“대공자, 이야기를 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이야기는 위에서.”

대공자가 밤하늘을 가리켰다.

달빛 아래 구름이 흐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허리가 감겼다.

“허업!”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올랐고, 잠시 후 제갈혜가 눈을 떴을 땐 황금빛 구름 위였다.

제갈혜는 입이 쩍 벌어졌다.

와아, 굉장해!

대체 대공자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두근, 두근.

어쩔 수 없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아까 나눈 설영과 화설난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정말 그런 것일까.

대공자는 내게 고백을 하려는 것일까?

그녀의 짐작은 맞았다.

후공은 고백을 위해 이 장소를 택했다.

그래, 고백이다.

후공은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불렀다.

“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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