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백혼곡에는 괴물이 있다.
제갈혜가 물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왜 청성의 장로를 파묻었냐고?
별일 아니었다.
매우 사소한 일이었고, 청성의 운규에게도 명분과 사정이 있었다. 그건 그러니까 남궁세가의 호법인 칠비단혼 때와 같았다.
청성제일검 구양진인의 초대였다.
사천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구양진인이 청하라 했고, 운규가 그 임무를 맡아 찾아왔다. 청성에 함께 가자고 정중히 요구했다.
그 요구를 정중히 거절.
따로 일정도 있기에, 굳이 차 한잔 나누려 청성까지 가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칠비단혼이 그랬던 것처럼 운규도 억지를 부렸다. 청성을 무시하는 거냐고, 호의를 무시하는 거냐며, 반드시 청성에 가야 한다면서 막아선 것이 화근.
묻혔다.
땅을 판 건 당명.
죽어 보면 사람은 달라지기 마련이라, 운규도 부활한 후에는 새사람이 되었다. 공손해졌다. 당명은 이렇게 공손한 사람이었냐며 운규를 향해 삿대질하며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때 그날의 당명처럼,
“하하하하하하하하!”
제갈혜가 전음도 잊고 박장대소했다.
웃을 수 밖에 없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말 틀린 말 하나 없는 것이다.
그때 땅을 팠던, 그때 웃음을 터뜨렸을 당 숙부가 여기 이 자리에서 돼지 뒷다리를 든 채 굳어버린 것이다.
그 웃음소리에, 뚱하니 둘러보던 청성의 장로 운규와 일청의 얼굴은 더욱 뚱해졌다.
‘금적선생…… 제갈 군사…….’
‘그럼 이들은…… 천공단이라는 건데…….’
강호에 천공단에 관한 소문이 진동하고, 천공단에 금적선생이 있다는 건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듣던 것보다 천공단에 사람이 많은 건 의외다.
무슨 노파가 있고, 스님도 보여서 천공단의 조합이 더욱 기괴해졌다 싶은데…… 그보다는,
이상한 사람이 보인다.
뒷모습이긴 해도 저게 여기서 보이면 안 되는 건데…… 한데 어떻게 봐도 당가주의 흑련의가 아닌가.
문파 하나쯤 쓸어버릴 각오일 때면 입는다는 당가주의 흑련의가 왜 여기서 보인단 말인가.
천공단이 흑련의를 훔친 것인가?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당가주?”
장로 운규가 불렀다.
뚝, 뚝, 뚝.
당명의 대답은 떨어지는 땀방울이 대신했다.
돼지 뒷다리에 땀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암향야?”
뚝뚝뚝뚝.
불린 별호에 땀방울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제발 가. 그냥 가라고!
모른 척해 주란 말이다!
당명의 땀방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거기 당가주 맞지 않소?”
“…….”
“나 청성의 장로 운규요. 가주,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왜 흑련의까지 걸치고 돼지를 잡고 있는 거요? 족발을 왜 당신이 들고 있느냔 말이오!”
다 구경만 하고 있는데, 왜 당신이!
지나던 길, 갑자기 멧돼지들이 폭주해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와 봤더니 돼지를 잡고 있는 당가주를 보게 되었으니 자꾸 물을 수밖에 없다.
그 광경에,
- 이야, 재밌다!
- 흐흐, 개 재밌네.
- 당가주 땀 떨어지는 속도 보라고.
- 시발, 이런 건 뭐라도 씹으면서 봐야 하는 건데. 먹을 게 없네. 흐흐…….
그 광경은 천공단에겐 꿀이었다.
모가지 힘이 장난이 아닌 신입이 참교육당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당가주가 난처해할수록 천공단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이곳엔 어려움을 보면 참지 못하는 이가 있다.
중생 구제에 미친 사람이 있다.
난처한 상황을 소림이 지나칠 수 있을 리가.
“험험, 나무관세음보살! 저기 족발을 들고 있는 분은 사천 당가의 가주님이 맞습니다.”
무광이 일러바쳤다.
구제 대상은 당가주가 아니라 청성.
‘소림 너…….’
당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가 돌아서면서 활짝 웃었다.
“하하하하, 청성의 두 장로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야 지나가던 길이었소만…… 가주는 무슨 일이오? 왜 천공단과 함께 있고, 혼자 돼지를 잡고 있는 것이오? 그 땀은 또 뭐요?”
“허허, 이야기하자면 길어서…….”
“길어도 괜찮으니 들어봅시다. 우리 남는 게 시간이오.”
그냥 꺼지라고 좀!
당명이 내심 외칠 때 다시금 어려움을 보면 참지 못하는 소림이 나섰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승이 설명드리겠습니다.”
당명이 무광을 죽일 듯 노려봤지만, 부처님의 제자는 태평히 상황을 설명했다.
간략한 설명이 끝났을 땐,
청성의 두 장로가 터져버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배를 움켜쥐고 삿대질까지 하면서 운규와 일청은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그 대단한 그대가 천공단이 되었단 말이오? 그니까 천공단주가 된 게 아니라, 천공단의 일개 일원이 되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하나 보오.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무량수불! 무량수부우우우우울! 으하하하하하하!”
운규가 파묻힌 건 청성이 다 아는 일.
이 웃음과 삿대질은 그날의 복수였다. 서 있는 채로 당가주를 파묻은 것만 같아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
“그만 웃지?”
당명의 음성이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얼굴까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졌기에 운규와 일청이 웃음을 뚝 그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하하하하하하하, 못 참아! 안 돼, 안 된다고! 으하하하하하하하!”
“가주, 풍제에게 허락은 맡았소? 풍제가 알면 죽이려 들 텐데, 정말 괜찮은 거요? 으하하하하하하하!”
“…….”
당명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하아…….”
나오느니 한숨.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그 말대로였다.
이런 날을 맞이한다.
환명만 아니었어도,
대형의 신검만 아니었어도.
천공단은 임시라는 말을 하는 건 구차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이제 웃는 건 청성만이 아니라, 천공단까지 가세했다.
심지어 제갈혜까지 깔깔거리고 있었기에…….
‘……망했네.’
아니다. 망하지 않았다.
그때처럼 당명의 곁에는 후공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제갈혜의 웃음소리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밝았다.
그리고,
.
.
.
.
.
.
멧돼지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가운데 청성과 천공단이 둘러앉았다. 물론 멧돼지를 굽는 건 당명인 가운데…….
“대공자, 촉산에 가는 것이라면 조심할 것이 있네.”
“촉산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촉산에는 괴물이 살고 있거든.”
“괴물?”
후공은 운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지만 짐짓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해주었다.
“그렇다네. 괴물이지. 촉산의 백혼곡에 괴물같은 마두들이 살고 있다네.”
알고 있다.
촉산의 골짜기.
백혼곡. 백 개의 혼을 가둔 곳.
골짜기 전체가 거대 진법.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
삼백 년 전 아미의 청절사태가 마두들을 가둬두었다.
백혼이라곤 해도 실은 아흔넷이라고 했던가.
“대공자, 그 마두들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네.”
“도, 도사 할아버지, 그거 정말이에요?”
후공이 반응하기 전 소천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천개뿐이 아니었다. 천공단 모두가 발작을 일으켰다.
“백혼곡? 거긴 우리가 최근에 지나쳐온 것이잖아?”
“와아아, 아미파의 학을 탄 여승들이 백혼곡 뭐라고 했던 게 그 마두들 이야기였던 거네?”
“뭐야, 그러니까 백혼이란 건 백 명의 마두들이 살고 있다는 거잖아? 이거 좀 무섭네!”
“근데 이상하지 않아? 왜 여태 마두들을 안 잡고 내버려 둔 거지?”
쏟아지는 의문에 장로 운규가 껄껄 웃었다.
낚시가 성공한 것이다.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걸려드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당명이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아니, 무슨 삼백 년 전 이야기를…… 쯧쯧.”
뭐라고?
삼백 년 전 이야기?
즉시 천공단이 실망을 쏟아냈다.
“에이 뭐야, 난 또 진짜라고. 괜히 긴장했잖아!”
“허어…… 도사님들이 너무하네.”
“이렇게 사람을 낚아버린다고?”
“나무아미타불 ㅅ…….”
진지하게 듣다가 저절로 몸에 힘까지 들어갔던 무광까지 욕을 애써 삼켰다.
하지만 여전히 진지한 사람도 있었다.
남궁연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한데 기이합니다. 아미파는 왜 아직까지도 백혼곡을 위협 요인으로 여기고 백혼곡을 순찰하고 있는 건지요?”
운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껄껄 웃었다.
“그야 유훈이기 때문이지. 삼백 년 전 천하제일고수는 아미의 청절사태였네. 그녀가 백혼곡에 진법을 설치하고 마두들을 가두었는데 대대로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선조의 유훈을 아미가 무시할 수 있을 리가.”
거기까지 들으니 천공단은 김이 샜다.
“쩝, 뭐야 어쨌든 쓸데없는 이야기였잖아.”
“괜히 쫄았잖아. 내 간덩이 얼른 다시 커지도록 해.”
“삼백 년이면 도대체 몇 번을 죽을 세월인 거야?”
그런 천공단을 바라보며 운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씨를 살렸다.
“그래도 강호의 일은 모르는 법. 불가사의한 일이 태연히 일어나는 게 강호가 아닌가. 무엇보다 최근 촉산 부근에서 큰 지진이 수차례 발생했고 아직 여진이 남아있으니, 혹여 그 지진이 진법에 영향을 끼쳤다면 마두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일으킨 불씨는,
“시발, 뭔 개소리야!”
“거 적당히 좀 합시다!”
“아니 1절만 해야지, 아주 노래를 몇 번 부르는 거여 대체!”
“삼백 년이라며, 삼백 년! 이게 재밌어? 웃겨?”
“나무관세음보살…… 개소리, 개소리! 개소리는 그마아아안!”
바로 천공단과 나무관세음보살에 제압당해 사그라들었다.
***
그로부터 열흘.
촉산에 천공단이 가까워졌을 무렵,
휘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
촉산의 북쪽, 촉산과는 꽤 멀리 떨어진 어느 골목 어귀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컸고, 휘파람의 음률은 처음 들어보는 구슬픔이 감돌았다. 누구라도 휘파람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출 만했지만, 밤길을 걷는 이들 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큰 휘파람 소리임에도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었다.
휘파람 소리에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이 있었다.
“사형, 들려요?”
“그래. 휘파람 소리. 한데……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겠구나.”
복귀하던 청성의 젊은 두 제자가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구슬프네요. 무슨 사연이 있는 휘파람 소리 같습니다.”
“그것보다…… 이상한 점이…….”
“네?”
“이거…… 우리만 듣고 있는 것 같다.”
“그, 그럴 리…….”
반문하던 사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멈춰설 만한 음률인데 지나가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는 것이다.
“설마…… 전음인가요?”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런 자각 끝에 사형과 사제는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감을 극대화에 휘파람의 근원을 찾아보려 했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누군가?
누가 노리고 있는 것인가?
선의인가, 악의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피가 빠르게 식어갔다.
“가자.”
그 말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빠르게 번화가를 벗어나 외곽을 질주, 청성산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휘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
휘파람 소리가 따라왔다.
슬픔이 깃든 휘파람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신형에 박차를 가했다.
“더 빨리!”
“네!”
사형의 재촉에 사제가 대답했고, 이제 청성산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스악!
뭔가가 굴러떨어진 소리에 사제를 돌아보던 청년이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떨었다.
사제가 달리던 동작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 상태로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머리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달리던 동작 그대로 멈출 수 있는가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소리.
휘파람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휘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
“누, 누구냐!”
분노와 눈물 속에 검을 빼들었을 때, 들려왔다.
휘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
-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 슬픔에 젖은 사람……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