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안녕.
그 밤, 청성산.
청성파의 산자락에 지어진 암자에 휘파람 소리가 휘돌았다.
휘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
하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
오직 한 사람의 머리를 울려대는 소리.
전음인 듯 전음이 아닌…… 그럼에도 전음이 분명한 휘파람 소리에,
번쩍.
암자에서 좌정하고 있던 구양진인이 눈을 떴다.
두 눈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나왔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휘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
휘파람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구양진인은 의미를 이해했다.
자신에게 휘파람 소리를 자랑하려는 것이겠는가.
이는 초대.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친구인가, 적인가.
적이겠지.
구슬픈 음률 아래 흐르는 건 죽음의 그림자.
위치는…….
이백여 장 너머.
놀라운 공능이다.
이백여 장 너머에서 전음을 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상승의 경지에 오른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이기에,
응해 주마.
네가 청성에 닿지 못하게.
암자를 나서 신형을 쏘아갈 때 뒤쪽에서 애검이 검집째로 날아들었다. 구양진인은 좌수를 뻗어 붙잡았고, 이후 그의 신형은 빛살이 되어 나아갔다.
삽시간에 청성산을 벗어났다.
휘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
휘파람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긴 아직 아니라고, 멈추지 말고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멈춘 건 하나의 산을 더 지나 두 번째 산야.
시간은 고작 일다경이 지났을 뿐이나, 이미 청성산에선 멀어졌다.
어둠에 잠긴 숲에서 휘파람 소리가 커졌다.
이제 휘파람은 전음이 아닌 그저 소리.
구양진인이 소리를 쫓았다.
모습은 볼 수 없다.
아직 적은 숲에 가려져 있고, 기척은 하나.
구양진인이 조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꽤나 뜸을 들이는군.”
“아이야, 넌 성격이 급하구나.”
휘파람 소리가 멈추고, 비로소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구양진인이 갸웃했다.
자신의 나이 칠십이 되어 가거늘 아이라니, 상대의 나이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때 숲에서 한 사내가 빠져나왔다.
너풀거리는 머리는 검고, 피부가 백옥같은 청년이었다. 구양진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어떻게 봐도 청년의 모습이었기에 떠오른 건 하나.
‘반로환동?’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 슬픔에 젖은 사람……. 이제 절망을 안겨줄 사람……. 그러는 너는 누구지?”
“내가 누구냐고?”
구양진인은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자신을 정확히 지목해 불러낸 이가 자신을 모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말장난을 하려는 것인가.”
아이라고 부른 것도, 오래전 사람이라고만 말한 것도 생각해 보면 그저 말장난. 하지만 실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청성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신 앞에서, 자신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 앞에서도 상대는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지 않는가.
도리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을 뿐.
다가서며 청년이 입을 열었다.
“몰라도 상관없겠지. 중요한 건 네가 지금의 청성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 것. 그런 너를 죽이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 그래, 그것이면 된다.”
“후후, 오만한 자로군.”
“뭐가 좋을까?”
“……?”
난데없는 소리에 구양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청년이 말을 이었다.
“기다려? 울어라? 공포에 젖어라? 히히히? 아니, 아니야. 유치해. 아니, 아니야. 오히려 유치한 게 더 나을지도. 더, 더, 더! 더한 절망을 위해. 그래, 그게 좋겠군. 그게 좋겠어.”
“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너의 얼굴에 새길 글자. 아마 놀라겠지?”
스르릉.
쓸데없는 소리.
계속 들어줄 순 없다.
구양진인이 검결지를 맺는 순간, 검이 떠올랐다. 서슬 퍼런 푸른 빛에 숲이 일순 밝아질 정도였다.
강기를 두른 검이 쏘아졌을 때, 청년이 웃었다.
“정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히히히히히!”
**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제발 도망쳐야 해!”
사제를 잃은 청성의 제자, 백무가 울부짖었다.
사제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이 쫓아와!
“백무, 정신 차려라!”
그런 제자의 어깨를 잡고 청성의 장문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백무의 동공은 하얗게 텅 비어 있을 뿐, 몸부림칠 뿐.
“놔!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시발, 모두 도망쳐야 한다고! 오래전 사람이 온단 말이다!”
“하아…….”
장문인이 깊게 탄식했다.
이 대화만 수십 번.
도대체 이 밤, 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백청은 어디 가고 백무 혼자 돌아온 것인가. 오래전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건가? 물어도 대답은 오직 하나.
- 도망쳐.
대체 무엇으로부터?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았으면 사람을 못 알아본단 말인가? 답은 들을 수 없다.
결국 혼혈을 점했다.
무너지듯 고개를 떨구는 제자를 안아들고 외쳤다.
“부근을 샅샅이 뒤져 백청을 찾아라!”
청성의 검수들이 쏟아져나갔다.
귀환은 빨랐다. 일식경도 지나지 않았다. 빠르다고 좋아할 순 없었다. 검수들이 들고 온 건 백청의 시신. 목은 없었다. 그저 목이 사라진 몸만 들고 왔다.
대체 누구인가.
백청을 죽이고, 백무의 정신을 뒤흔들어버린 자.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
전대 고수가 청성을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가볍게 볼 수 없다. 청성 장문인과 장로들이 암자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사숙에게 고하고 대비해야 한다.
청성제일검이 나서야 한다.
암자에 이르러 문 밖에서 예를 갖췄다.
“사숙, 장문인 운광입니다. 사숙께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대답에 장문인이 미간을 좁혔다.
‘혈향?’
왜 짙은 혈향이 방 안쪽에서 풍겨오는가.
이미 장로들도 동요했다.
‘설마?’
‘누굴 죽이신 건가?’
‘이미 적을 처리하셨단 말인가?’
몇 번 더 불러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기에 장문인이 나섰다.
“사숙,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장문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뒤따르던 장로들도 소스라쳤다.
“헉!”
“흡!”
“이 무슨…….”
사숙이 보였다.
좌탁 위에 있었다.
머리만 놓여 있었다. 이미 좌탁은 피로 흥건했고, 혈향은 사숙의 피.
하늘이 무너졌다.
청성의 하늘이…… 무너졌다.
대체 누군가?
어떤 자이길래, 이렇듯 무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미친 자이기에 죽이는 것도 모자라 사숙의 뺨에 글자를 남겨놓았단 말인가!
‘안녕.’이라고.
***
햇살이 쏟아지는 촉산을 여승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헉, 헉, 헉!”
숨이 가빠지고 진기가 흐트러졌지만 그녀는 신형을 멈출 수 없었다. 학을 타고 날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학은 죽었다. 그리고 휘파람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휘이이이이~~ 휘이이이이~~.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 제발 그만 쫓아와!’
그녀의 옷은 이미 군데군데 찢겨나가고 더러워졌지만, 옷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문제는 휘파람 소리다.
그리고 사매다.
다친 사매가 걸을 수 없으니 자신이 더 힘을 내야했다.
“헉헉, 사매……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으면 돼.”
사매의 대답은 없었다.
그래, 괜찮아. 대답하지 않아도 돼. 아니, 대답하지 마.
내가 더 열심히 달릴게.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
“무겁냐고? 아니, 아니야. 무겁지 않아.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사매를 업고 달리고 있지만 효경은 괜찮았다.
달리다 죽는 한이 있어도 사매를 포기할 순 없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런 소리 하지 마.
“헉헉헉, 사매 들려? 휘파람 소리 말이야. 계속 들려. 왜 계속 들리지? 미쳐버릴 것 같아.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사매의 몸이 처졌기에 효경은 손에 힘을 줘 들어올리고 더 단단히 받쳤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사매의 몸이 차갑다.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사매 포기하면 안 돼. 힘을 내. 아미로 가는 거야. 아미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근데 이상하지? 왜 산을 벗어날 수 없지? 촉산이 험준해도 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왜 휘파람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거지?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
효경은 정신없이 내달렸다.
무작정 내달리면 산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 사매 아니겠지?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아니라고 말하라고! 그럴 수 없는 거잖아! 백혼곡에서 사람이 나올 순 없는 거잖아!”
삼백 년이다.
그런데 나타났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들었다.
휘파람 소리,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는 말.
“미안해 사매. 내가 잘못했어. 화 내서 미안해. 근데 미칠 것 같아. 사매는 대답이 없고, 촉산은 벗어날 수 없고, 휘파람 소리는 계속 들려. 응? 학을 왜 안타냐고? 사매, 대체 무슨 말을 떠드는 거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학은 죽었어. 죽었다고.
봤잖아. 학의 하얀 깃털이 온통 붉게 변한 걸 봤잖아!
“하하하하하하하하! 아주 오래전 사람, 옛날 사람. 하하하하하하하하! 사매, 기뻐해. 길을 찾았어! 드디어 아미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보여!”
효경의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절벽.
더 이상 길이 없고, 창공이 보일 뿐이지만 그녀는 신형에 속도를 더했다.
“하하하하하하! 사매, 함께 돌아가자!”
순식간에 절벽에 가까워진 그녀가 몸을 날렸다.
달리던 속도가 있어 한참을 나아간 그녀가 아래를 바라봤다. 까마득한,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지면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사매 보여? 저기 저 아래가…… 아미야.”
그렇게 추락해갈 때,
처억.
붙잡혔다.
효경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붙잡은 사람의 외모가 뜻밖이었다.
나이 많은 노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은…… 청년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 사매라도…… 효연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이 사람, 무서워.
추락하지 않아.
하늘에 어떻게 떠 있을 수 있는 거지?
“제발…… 사매만…… 살려주세요.”
“걱정 마라.”
후공이 답했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후공이 효경을 안은 채 신형을 솟구쳐 절벽에 내려섰다.
촉산의 초입에 도달했을 때 여인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 따라와 보니 아미의 여승이었다.
그때 그 여인.
백학을 탔던 여인 중 하나였다.
효경이 업고 있던 사매를 내려놓았다.
“사매, 괜찮아. 좋은 분을 만났어. 이제 우린 살았어. 사매도 들었지? 살려준다고 말한 것 말이야.”
“…….”
후공은 내심 탄식했다.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녀의 사매는 없다.
그녀는 혼자였다.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사매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백혼곡.
목이 날아갔고, 학이 죽어 있던 곳이었다.
“단주!”
“형님!”
“두목!”
“대공자!”
“대공자님!”
뒤늦게 천공단이 곁으로 다가왔다.
당명은 더 빨리 올 수 있었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천공단과 함께 올라오라 말해두었던 터.
“다, 당신들…… 누, 누구?”
그런 천공단을 보며 효경이 주춤 물러났다.
“안돼. 도망쳐야 해.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 도망쳐야 해.”
효경이 아무것도 없는 빈 바닥에서 사매를 들어올렸다.
“사, 사매. 가자.”
하지만 갈 수 없다.
후공이 효경의 어깨를 붙잡았다.
효경의 눈이 두려움으로 뒤흔들렸다.
“사, 살려주세요.”
분명 살려준다고 했던 청년의 눈빛이 자줏빛으로 물들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빨려들어갈 것 같아 효경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후공의 자령안은 폭주.
무서운 기세로 효경의 혼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머리를 울리는 휘파람 소리보다 더 크게, 더 강렬하게 뒤흔들었다.
원래 머물던 공포보다 더한 공포로 휘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아왔다.
안온한 평온.
무서웠던 자줏빛 광채가 따뜻하게 느껴지면서 그녀가 소리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매는…….’
죽었지.
비로소 떠오른 기억과 함께 그녀가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대로 자줏빛 안광에 진탕되었다.
효경은 안정을 찾았지만,
자령안을 본 사천당가의 가주 당명의 눈동자는 미칠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