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당대의 천하제일인은…… 언짢다.
후공은 아미의 여승을 내려다봤다.
‘휘파람 소리…… 오래전 사람, 옛날 사람.’
그녀가 달리며 외치던 소리들이다.
오래전 사람이라…….
그 오래전이 삼백 년 전을 말하는 것일까?
백혼곡에 갇혀 있던 마두가 나온 것인가?
믿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자신은 그보다 더 믿기 힘든 환혼의 당사자가 아닌가.
확인해보자.
“낭인왕.”
부르면서 여승을 바라봤기에 낭인왕이 알아들었다.
“네, 형님.”
바로 달려와 여승을 업었다.
뒤따라 제갈혜도 다가왔다.
후공이 갸웃해 보이자, 제갈혜가 전음을 발했다.
- 백부님, 아미의 여승에게 천년자패가 도움이 될까요?
후공이 빙긋 웃었다.
그 생각을 못했다.
천년자패는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해독은 물론이고 심신을 정화하며 기운을 북돋는다.
공포에 질려 뒤흔들린 여승의 심지가 자령안에 의해 돌아왔다지만 허약해져 있으니, 천년자패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 넌 똑똑해졌구나.
- 저는 원래…….
- 푼수같았지.
- 백부님은 너무해…….
제갈혜가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공자, 제 천년자패가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곤 목걸이를 벗어 여승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공이 천공단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백혼곡으로.”
신형을 날리자, 천공단이 그 뒤를 따랐다.
어버버해진 건 두 사람.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소림의 무광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천공단과 합류한 이래 겪은 일마다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인 것이다. 원래 여정에 있어 사건사고라면 반점에서 고기를 골라내다 시비가 털려 얻어터지는 것이 전부였거늘…….
사천 당가주가 천공단이 된 파격을 본 것이 엊그제인데, 이번엔 마두였다. 그것도 오래전 백혼곡의 마두.
- 거지 시주. 정말 삼백 년 전의 마두가 나온 걸까요?
곁을 달리는 은앙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 모르지. 하지만 마두가 나온 거라면 우리 스가 힘 좀 써 줘.
- 아미타불…… 스가 뭡니까? 님 자는 어디 가고?
- 우리 사이에 어색하게 님은 무슨 님. 스로 하자고. 스스스!
- 이 거지 새끼가…….
“하하하하하하!”
은앙개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뭔 재미난 이야기를 했냐며 천공단이 관심을 보였지만,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당명은 무광보다 더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
제갈혜의 곁으로 다가가 전음을 날렸다.
- 혜야, 보았느냐?
- 어떤……?
- 대공자의 자줏빛 안광 말이다.
- 전 여러 번 봤어요.
- 그 말이 아니라, 저건 대형 특유의 안법이다.
- 그런가요? 그럼 화산파는요?
- …….
그 말에 당명의 말문이 막혔다.
자하신공을 익힌 화산파의 절세고수도 안광은 자줏빛으로 타오르는 것이다.
안광의 빛깔로 대상을 특정짓기는 무리.
하지만 천공단주가 환명을 다루고 신검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묘해지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다.
정말 대형이 환생이라도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당명은 고개를 절레거리곤 다른 의문을 물었다.
- 천년자패가 왜 네 손에 들어가 있는 거냐?
대공자에게 대차게 까였는데 왜?
흑전의 경매품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면 신검 다음으로 천년자패. 진귀하기 이를 데 없어 누군가에게 선선히 내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왜 혜에게 넘어간 것인가?
제갈혜가 빙긋 웃었다.
- 숙부, 일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대공자가 저를 좋아한다고요.
- 뭔 소리야!
- 하하, 받은 건 천년자패만이 아니에요.
공청석유도 받았다.
물론 받은 것 중 최고는 백부에게 받은 고백.
하지만 당명이 알 수는 없는 일.
당명은 혼란만 가중되었다.
혜의 태도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 하나.
어떻게 된 게 까인 뒤로 더 밝아진 것 같은 것이다.
얼굴 한쪽에 늘 수심 한줄기가 남아있었는데, 이제 그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그런 사이 백혼곡 앞에 도착했다.
삼백 년 전 마두들을 가두었던 골짜기. 골짜기 아래쪽은 볼 수 없었다. 시야가 차단되었다.
안개인 듯 구름인 듯 짙게 깔려 골짜기를 뒤덮고 있는 탓이었다. 이것이 진법의 묘용 때문이란 건 따로 설명이 없어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안개 사이사이 뇌전이 번쩍이며 한 번씩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나오려는 자는 저 뇌전에 갈려나갈 테지.
후공도 넓게 퍼진 안개를 잠시 응시했다가 몸을 돌렸다.
진법을 살피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곳엔 학의 사체와 목 없는 여승의 주검이 있지 않는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수습.
천공단에게 지시하자, 천공단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땅을 파 학을 묻었고, 누군가는 나무를 잘랐다.
다섯 그루의 나무를 자른 후 칼질해 다듬었고, 나무 못도 만들어 순식간에 관작을 만들었다.
깨어날 아미의 여승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배려였다.
이어 색관조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맡겨주세요, 주인님!]
당명도 그 의미를 이해했다.
촉산의 순찰.
백혼곡의 마두들이 빠져나온 것이라면 부근에 있을 수도 있기에 혹시 모를 위협을 미리 탐지할 필요가 있었다.
‘흐음…… 애송이가 제법이네.’
아니 솔직히 천공단주에게 감탄했다.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거늘, 정녕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상황 판단이 빠른 것이다.
거기다 태연함까지.
마치 수십 년 강호를 활보한 노고수 같으니, 정녕 괜히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천공단의 행태도 새로웠다.
도대체 함께 얼마나 구른 건지, 척이면 착일 정도로 일 처리가 매끄러웠다.
그런 생각과 함께 당명이 색관조의 반대 방향으로 색황조를 날려 보내자, 찬사가 들려왔다.
“가주, 손발이 척척 맞는군요.”
“흥!”
당명이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누굴 칭찬하는가.
후공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주, 제가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틈은 찾았나?”
틈은 진법의 틈.
“대충 짐작 가는 지점은 있습니다.”
“그럼 함께 가세.”
“아닙니다. 저와 가주 중 한 사람은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당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위에 한 명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이해했지만, 그보다 당명은 아래쪽이 더 걱정이었다.
“만약 백혼곡에 마두들이 남아있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
“하하, 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걱정은 무슨.”
“이런…… 아니었습니까? 뭐 어쨌든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혹여 마두들을 만나게 되면 제가 도망치라고 크게 소리칠 테니, 그땐 천공단과 함께 도망치시면 됩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설마 자넬 구하려 뛰어들까 봐?”
“하하하하!”
후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도망치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당명은 뛰어들 것이다. 당명은 그런 놈이다.
옛 생각도 나는지라,
후공은 당명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쩝.”
당명이 입을 쓰게 다실 때,
이미 후공의 신형은 솟구쳐올랐다.
환명을 연거푸 딛고 안개 위에 떠오른 채 보았고, 찾았다.
‘흐음, 역시…….’
틈이 열려 있었다.
지점은 안개 중심부.
동그랗게 소용돌이치듯 구멍이 보인다.
구멍의 크기는 사람 셋이 동시에 나와도 될 정도.
후공이 구멍을 향해 신형을 던졌다.
파라라락!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이며 떨어져내리는 가운데, 후공은 백혼곡의 정경을 한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건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드넓은 분지, 시냇가가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놀랍구나.’
문제는 여섯 채의 모옥.
삶의 흔적, 생활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곳곳에 밭이 일궈져 있었고, 여러 울타리도 보였다.
오리 떼가 모여있는 울타리에 돼지 울타리까지.
돼지가 열 마리가 넘었다.
인기척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만약 삼백 년을 여기에서 보낸 것이라면, 진법의 틈이 열린 걸 보았다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환명을 딛고 내려선 후공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하늘을 뒤덮은 안개 그리고 작은 구멍.
“흐음…….”
높이가 제법이었기에 솟구쳐 빠져나갈 걸 감안하면 마두들의 무공 수준이 가볍게 볼 수 없는 수준임을 짐작하게 된다.
여섯 개의 모옥을 차례로 살폈다.
체취가 짙다.
간간이 보이는 모발의 향을 파악하니, 총 인원은 여섯.
모옥 내 의복이랄 것은 없었고, 특이점도 보이지 않았기에 각각의 향만 채취한 후 모옥을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작을 피운 흔적, 그리고 저 너머 세 개의 동굴.
하나의 동굴로 들어가자 동굴 벽에 여러 낙서가 보였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많은 바를 정(正) 자.
대충 훑어봐도 수십만 개의 바를 정.
한 획이 하루라고 치면 얼추 이백 년이 넘고, 삼백 년은 되지 않는다.
삼백 년을 채우지 않았다고 탓할 순 없다.
이백 년이 넘게 기록했다는 것도 놀라울 지경.
한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지?
그 의문도 잠시,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삼백 년의 흔적, 그동안의 낙서가 보였다.
한쪽 벽에 온통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아미……. 끝도 없이 아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중간중간 하나의 이름이 끼워지듯 적혀 있었다.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청절, 청절, 청절, 청절, 청절, 시발, 청절, 청절, 아미, 아미, 아미. 죽여버린다. 청절,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아미,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아미, 아미, 아미…….
삼백 년 전 천하제일인.
글자마다 아미의 청절사태에 대한 분노가 절절히 묻어났다.
하루하루 바를 정 자로 날을 새기면서 분노도 함께 새겨넣은 흔적이었다.
후공은 동굴을 나와 두 번째 동굴로 향했다.
그곳에는 더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 온갖 요리 이름이 가득했다.
나가게 된다면 그들이 먹고 싶은 것들이었다.
다른 벽면에는 하고 싶은 것들도 한가득 기록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누굴 죽일 것인가.
어떻게 죽일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아주 소소한 일상에 대한 소망도 보였다.
그러다 찾았다.
‘생령과(生靈果)?’
그런 이름을 붙였나 보다.
생령과와 함께 기록된 낙서는 이들이 여태까지 어떻게 지냈으며, 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다.
- 아미의 청절이 우리에게 선사한 건 지옥. 갇힌 후 우린 이곳에서 끝도 없이 싸웠다. 죽고 죽이고 또다시 죽고 죽였다. 그리하여 남은 건 여섯. 더 이상의 살육은 의미 없다. 살아보자. 그래, 살아보자. 희망을 갖고.
- 희망은 없다. 희망 따윈 없어. 세월이 흐른다. 계속해서 흐른다. 이렇게 죽게 되겠지. 복수도 하지 못하고 죽게 되겠지.
- 이상한 과실을 찾았다. 우습다. 우습게도 이곳에서 기연을 얻었다. 정녕 우스운 일이다. 놀랍게도 우린 젊어졌다. 백발의 머리는 흑발이 되었고,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아무도 우릴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군. 우린 그걸 생령과라고 이름 붙였다.
- 생령과는 기연이 아니다. 이건 저주다. 지독한 저주다. 청절은 알고 있었을까? 청절은 알고 있었겠지? 그 망할 년은 알고 있었을 거다. 생령과 때문에…… 생령과 때문에 우리는 몇백 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지독한 저주……. 지옥이, 지옥이 따로 없다…….
- 만약 빠져나갈 수 있다면 다 죽인다. 다 죽여버린다. 아미, 청성, 사천당가를 쓸어버리고…… 그렇게 사천을 쓸어버리고, 그다음은 호북. 아마 그때쯤이면 그 시대의 천하제일인과 마주하게 되겠지. 흐흐흐흐, 좋아. 기대되는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대의 천하제일인을 갈기갈기 찢어죽여 주마. 모두가 절망하겠지? 히히히히히.
“크흠…….”
후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당대의 천하제일인은 그 글귀가 못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