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75화 (275/460)

275화. 휘이이이이이이~~.

색관조는 하늘 높이 날았다.

주인님이 말했다.

높이 날아야 한다고. 이번에 만나게 될 상대는 일전에 만난 흑전의 전주보다 더 대단할 거라고.

주인의 말은 언제나 옳다.

색관조는 금구의 내단을 흡수해 이전보다 더 강맹해졌음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깃털 하나조차 잃지 않겠어!

[금섬아, 이번엔 봉양목을 찾는 게 아니야. 사람을 찾는 거야. 알겠지? 눈 부릅떠. 빨리 도망쳐야 하니까!]

[그윽! 그윽, 그윽?]

[노인이냐고? 멍청아, 당연하잖아. 삼백 년이 지났으니 거의 사백 살 가까이 됐을 거라고. 어휴, 넌 어째 생각을 안 하고 사냐.]

[큭큭! 그윽??]

웃던 금섬이 한 지점을 내려다보며 앞발을 두드렸다.

노인이었다. 한 노인이 촉산을 오르고 있었다. 신법이 어찌나 빠른지, 지나온 길에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으잉?]

색관조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형이 흐르듯 움직여 희미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색관조는 선명히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 보자!]

[그윽.]

색관조가 방향을 선회해 노인을 향해 쇄도해 갔다.

***

노인은 청성의 장로 운규.

색관조의 인도로 백혼곡에 도착한 운규의 등장에, 당명을 비롯한 천공단의 안색이 굳어졌다.

장로 운규의 행색이 말이 아닌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도대체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온 것인가!

최근 함께할 때 보았던 선풍도골의 풍모는 온데간데없고 머리가 거의 산발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안색이며 눈동자도 어딘가 정신이 나가 보이니, 이는 필시 청성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인사고 뭐고 당명이 물었다.

“운 장로, 무슨 일이오?”

“암향야, 사숙이…… 사숙이…….”

운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당명은 들은 것만 같았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장로 운규의 사숙이라면 청성제일검 구양진인이다.

구양진인이 당했다고?

화경의 극에 이른 그 구양진인이?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사숙은 등선하였소.”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는 의미였기에 당명뿐 아니라 천공단 모두가 얼어붙었다.

“하아…… 그 밤 내가 본 건…….”

운규가 탄식과 함께 청성에서 보았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설명했다.

그저 놓인 사숙의 머리.

뺨에 새겨진 ‘안녕’이라는 글자.

비록 암자였다곤 해도, 청성은 그 누구도 적이 다녀간 것을 알지 못했다. 자른 머리를 들고 암자 안 탁자에 올려놓고 글자를 새길 때까지도 몰랐다는 점에서 청성이 받은 충격과 절망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밤 청성은 전서를 띄웠다.

아미파로, 무림맹으로 연락을 취했다.

운규가 출발한 것도 그 밤.

사천당가의 가주가 천공단과 함께 촉산으로 향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형을 날려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말을 쏟아낸 탓일까.

슬픈 감정을 토해낸 탓일까.

운규는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한데 이곳은……?’

우측으로 짙은 안개가 드넓게 깔려 있는 걸 보고 백혼곡임을 깨달았다. 삼백 년 전 백여 명의 마두들을 가두어 둔 곳이 아닌가?

‘왜 이곳에? 관은 또 뭔가? 어…… 그러고 보니 천공단주는?’

운규가 그렇게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고, 이어지면서 운규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

자신이 농담 삼아 천공단을 향해 던졌던 백혼곡 마두들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청성제일검인 사숙의 죽음이 그러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안녕이라는 글귀도.

아미가 들었다는 휘파람 소리도 같다.

청성의 제자 백무도 실성해 그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

도망쳐야 한다고 끝도 없이 소리쳤지 않는가.

운규의 시선은 백혼곡의 짙은 안개로 향했다.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니길, 마두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길.

백혼곡으로 들어간 천공단주가 돌아와 들려줄 말이 그저 오래전 유골들뿐이었다는 것이길 바랐다.

그 순간,

하나의 인형이 안개 위로 솟아올랐다.

운규의 눈이 커졌다.

‘천공단주!’

솟아오른 신형이 기이하게 틀어지며 안개 위를 딛고 섰기에, 운규의 커진 눈은 더 커지고 말았다.

“무, 무슨…….”

왜 허공에 떠 있는 것인가?

떠 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안개가 지면인 듯 걸어왔기에 운규는 얼이 나가버렸다.

이게 천공단주의 무위…….

설마 허공답보라고?

아는 척 인사라도 건네야 했지만, 운규는 천공단주가 눈앞에 이르렀음에도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멍해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운규를 후공이 지그시 바라봤다.

그 모습에 왜인지 압도된 운규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들어보죠.”

그 말에 운규가 정신을 차리고 경위를 설명했다.

후공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유희.’

불행 중 다행이다.

몇몇 희생이 있었지만, 대규모 학살은 아직이다.

놈들 입장에서도 서두를 일은 아니겠지.

놈들은 서서히 조여 가고, 서서히 절망을 심어주는 단계를 밟고 있는 중이다.

그 근간은 모든 걸 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또 서두르지 않는 이유 중 결정적인 건, 놈들에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점이다.

백혼곡 내 동굴에 빼곡이 적어 놓았던 것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들.

장장 삼백 년을 갇혀 지냈으니 바깥 세상에 나온 감회에 취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터.

하지만 사람은 금방 적응한다.

그러니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다.

이내 후공은 백혼곡에서 보고 살핀 바를 들려주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허어…….”

“생활의 흔적이라니…… 말도 안돼…….”

“사, 살아있었어…….”

“생령과?”

“여섯 명이나?”

“젊어진 거야?”

삼백 년 전에도 이미 절정의 마두였던 그들이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 것인가.

청성의 장로 운규도 절망에 빠졌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숙을 생각해 보면, 이제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하나의 희망이라면…….

“대공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천화서고 대공자.

겁도 없이 백혼곡에 홀로 들어갔다가 나온 이.

그리고 방금 전 보인 대공자의 놀라운 신위를 떠올리며 운규가 물었다.

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도망쳐야 합니다. 모두. 신속하게.”

“……?”

대답이 예상을 벗어나 운규가 눈만 깜박였다.

후공은 그런 운규를 무시하고 당명을 바라봤다.

“가주, 다음 목표는 사천당가입니다.”

운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당명은 이해했다.

숨겨진 뜻까지 이해했다.

아직은 유희.

청성이 전부 당한 것이 아니다. 절망을 위해 구양진인을 참수했다. 그러니 놈들의 목표는 당가가 아니라 사천당가의 가주. 자신이다.

자신을 찾기 전까지는 당가 전체를 쓸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부디 그러하길.

그랬으면 좋겠다.

이내 당명이 손을 입에 가져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후 색황조가 날아와 주인이 내민 팔에 내려앉았다. 당명은 망설이지 않고, 기다리는 중에 준비해둔 짤막한 서신을 색황조의 발목에 매달았다.

“가장 빠르게! 쉬지 말고 날아라!”

귓가에 속삭이니 색황조가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사천당가.

그런 당명의 빠른 처신을 후공은 흡족히 여겼다.

천공단 이전…… 자신의 방식, 우리들의 방식에 익숙한 당명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거 어느 한때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도 잠시,

후공은 운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로께선 가주의 서신을 보셨을 테지요? 청성도 똑같이 하시면 됩니다.”

“알겠네.”

뒤늦게 이해한 운규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후공은 천공단을 바라봤다.

“천공단 일부는 동행하고, 일부는 잠시 이탈합니다.”

이어 누가 동행하고, 누가 이탈하는지 설명했다.

이탈은 약체에 속한 이들.

남궁연, 은앙개를 비롯한 젊은 층이었고 제갈혜와 설영, 화설난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한마디로 걸리적거린다는 의미.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승은 천공단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소승도 함께하겠습니다. 부디…….”

“이 새끼가!”

갑작스런 욕설에 무광이 돌아봤다가 점혈되었다.

점혈한 건 남궁연.

눈을 껄렁하게 뜨고 무광을 노려봤다.

무광이 분노를 토해냈다.

“남궁 시주, 지금 뭐하는 짓이오?”

“뭐하는 짓이긴. 생매장하는 소리지.”

두목의 방식이 어떠한지 보고 배운 것이 많은 남궁연이다. 두목은 어설프게 위기를 자초하는 이가 아니다. 지켜줄 수 없을 땐 멀리 둔다. 매우 단순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는 숱하게 보아왔던 터.

땅은 이미 파헤쳐지고 있었다.

땅을 파 본 경험치가 많은 천공단이 삽시간에 구덩이를 팠기에 남궁연이 무광을 던져넣었다.

“아미타! 나무관셈, 아니 시발놈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냐! 으읍, 우웁!”

욕을 하는 중에 이미 흙더미가 덮쳐왔다.

무광이 당황해 소리쳤다.

“진, 진짜로 묻어버린다고요? 사, 살려주세요! 부처님, 이 사람들이 저를 산 채로 묻습니다. 이게 대체…… 우읍! 잘못했…… 우우읍!”

천공단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죽어라!”

“파묻어야 제맛이지!”

“하하하, 꼭 죽어봐야 강호 무서운 줄 아는 놈들이 있어요!”

그러한 광경에 두 사람이 멍해졌다.

파묻혀본 적이 있는 청성의 운규가 눈을 연신 깜박거렸고, 파묻어본 적이 많은 당명은 내심 너털거렸다.

‘허…… 사람을 묻어? 이놈들 뭐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인 것이다.

아니, 자신이 많이 하던 일이었다.

- 너희 원래 이런 식이냐?

당명이 곁에서 깔깔대며 구경하는 소천개에게 전음을 보냈다.

- 우리요? 네, 우린 사람을 묻어요.

- 왜?

- 형아에게 배웠어요. 무섭죠?

무섭긴.

늘 하던 일인데.

그저 당명은 당황스러울 뿐.

형아라면 천화서고 대공자를 말하는 것일 텐데, 대공자에게 배웠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또 다시 등장했다.

대형과 천화서고 대공자의 공통점.

그런 당황스러운 마음을 알 길 없는 소천개가 어깨로 툭 쳤다.

- 할아버지, 너무 걱정 마요. 진짜 죽이는 건 아니거든요. 겁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묻어서 겁주는 거!

그게 당황스럽다고!

- 할아버지, 진정하시고요. 제가 선물 하나 줄게요.

- 응?

- 강적을 만나는 거니까.

그러면서 소천개가 품에서 환약을 내밀었다.

- 아이쿠, 이거 때가 묻어버렸네.

- 뭐냐?

- 약왕문의 원신단이에요.

- 원신단?

당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왕문의 원신단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당명은 현 약왕문주인 용악과도 잠시 함께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기력을 급상승시켜 경지를 일정 시간 단숨에 끌어올리는 묘용을 지닌 것이 원신단.

용악은 대형에게 원신단을 내밀었다가 너나 많이 먹어라고 한 소리 듣고는 시무룩해졌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은 용악에게 원신단을 받았고, 도움도 받았다.

문제는 약왕문이 원신단을 결코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어떻게 거지의 수중에 원신단이 있을 수 있느냐였다.

소천개가 배시시 웃었다.

- 하하, 할아버지 놀라는 것 좀 봐. 이거 원신단 맞아요. 약왕문은 형아를 은인으로 여기거든요. 아주 못 줘서 안달이지. 나한테 이거 세 개나 있어요.

- 뭐?

- 자, 받아요.

당명이 멍해져 원신단을 받아들었다.

때가 묻긴 했지만, 확실히 원신단이 틀림없었다. 형태며, 향이 원신단이다.

- 할아버지, 마두들 꼭 잡아요.

- …….

여전히 멍해져 있던 당명은 들려온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주, 출발하죠.”

소리를 따라 바라보니 천공단주가 미소 짓고 있었다.

“…….”

**

그 밤,

휘이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이…….

휘파람 소리가 사천당가를 휘감았다.

짙은 흑발에 하얀 얼굴의 청년이 멀리 언덕 너머에서 사천당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번엔 무엇이라 적을까……. 어떤 글귀가 좋을까. 또 다시 안녕? 아니야, 조금 더 새롭게. 더 즐겁게. 청성보다 더한 글귀를 남기고 싶은데…… 그래, 그게 좋겠군. 히히히히히히히!’

휘이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이…….

그 휘파람 너머,

아직은 멀리,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사천당가의 색황조가 전력으로 나아갔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