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76화 (276/460)

276화. 그가 표적이 되어 주었다.

휘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

공포는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반드시 느려야 한다.

그래야 증폭된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건 머릿속에 공포를 각인시키는 작업.

휘파람을 부는 파양마군의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밤의 표적은.

당가주!

당가주는 오늘 밤 죽는다.

청성제일고수가 죽었던 것처럼.

청성이 경악했던 것처럼, 이 밤 당가도 같아질 것이다.

스스슷! 스슷!

당가의 대저택에서 수많은 신형이 쏟아져나왔다.

휘파람 소리를 찾으려 함이다.

하지만,

‘후후후후…….’

찾을 수 있을 리가.

그의 장담대로였다.

당가의 검수 일곱이 파양마군의 곁을 그냥 지나쳤다. 전혀 보지 못했다.

휘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이~~.

휘파람 소리는 이곳에서는 작아지고 저 멀리 반대편에서 크게 들려왔기에, 스쳐 지나갔던 당가의 검수들이 신형을 멈췄다.

누구 할 것 없이 안색에 수심이 가득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누구길래 슬픈 음조의 휘파람 소리로 사천당가에 죽음을 드리우는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강적임엔 틀림없다. 무엇보다 휘파람을 부는 이의 신법이 기괴할 정도로 빠르지 않은가.

“저쪽으로!”

당가의 검수들이 다시 되돌아와 파양마군을 스치고 지나갔다.

곁에 있었지만 당가의 검수들은 그저 상대가 빠른 신법으로 멀리 휘저으며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웃음이 난다.

그렇기에 우습다.

삼백 년을 지나 강호에 나오니 파양마군은 모든 것이 즐거웠다.

강호가 이리도 즐거운 곳이었다니.

어수선한 모습들, 당황해하는 모습들, 분주한 모습들…….

보기 좋다.

삼백 년을 갇혀 있던 그에게 이 강호는 흥미로운 놀이터.

휘이이이이이~~, 휘이이이이이이이~~.

‘흐흐흐흐…… 처음은 청성, 두 번째는 당가, 사천의 마지막은 아미. 맛있는 건 마지막에. 맛있는 건 마지막에. 떡 안의 앙금은 마지막에…… 흐흐흐흐.’

생각할수록 즐거워 파양마군은 미소를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대화 소리에 파양마군의 미소는 사라져갔다. 점점 시무룩해졌다.

“가주께서는 별일 없으시겠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돌아오실 기약이 보이지 않으니 하는 소리 아닌가.”

“흥! 천화서고 대공자가 뭐라고……. 며칠 내로 돌아오시겠지.”

“어? 휘파람 소리가…….”

파양마군은 휘파람까지 멈췄다.

당가주가 없다.

다른 이에게 선수를 뺐겨 심기가 불편해졌다.

‘천화서고 대공자?’

대공자라는 호칭을 생각해 보면 어린놈일 터.

이 시대의 강호에 샛별이 떴나 보군.

당가주가 맞이하러 갈 정도면 제법 한 수를 갖추었다는 뜻이겠지.

“……천화서고 대공자.”

그려둔 그림이 어그러졌다.

파양마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 좋다. 절망의 순서를 바꾼다. 오늘 밤 당가를 지운다.’

돌아온 당가주가 절망을 맞이하도록.

청성과는 반대로.

아마도 놈은 미쳐버리겠지? 히히히히히히히!

그렇게 다섯 걸음을 떼던 파양마군이 멈췄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절망의 깊이는 하염없이 깊겠지만, 이리 되면 공포의 양이 너무 작다.

‘그래, 다시 오자. 하루 이틀만 기다려 보자.’

지금 당장은 술이 당기기고 하고.

유폭하를 먹고 싶기도 하니까.

스읏!

파양마군이 신형을 솟구쳤다.

뭔가 번뜩인다 싶을 때, 이미 그의 신형은 한줄기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파양마군이 나아가는 길,

색황조가 파양마군과 엇갈렸다. 파양마군만큼이나 빠르게 밤의 창공을 가로질렀다. 이제 곧 목적지. 당가가 보였기에 색황조가 쏘아져 갔다.

끼이이이이이!

색황조의 울음은 뛰쳐나온 장로의 팔에 내려앉아서도 잦아들지 않았다.

장로 당악이 빠르게 색황조의 발목에 묶인 서신을 풀었다.

내용인즉,

- 보는 즉시 도망쳐라. 흩어져라. 전력을 다해. 상대는 백혼곡의 노마두들. 결코 머뭇거려선 안 된다. 만약 작은 여유를 챙길 수 있다면…….

당악의 눈이 깊어졌다.

***

“여기 주문.”

“헤헤헤헤, 손님. 부르셨습니까요.”

“유폭하로 삼 인분.”

“헤헤헤, 동행이 오고 계시나 봅니다. 그럼 요리는 천천히…….”

“혼자다.”

“헤헤, 하긴 저희 반점의 유폭하가 맛이 좋긴 합니다.”

“먼저 술부터.”

“헤헤, 넵!”

웃으며 돌아선 점소이가 입술을 달싹이며 불평을 토해냈다. 어린놈의 새끼가 혀가 짧아도 너무 짧다며 구시렁거렸다.

다 들렸다.

하지만 들었음에도 파양마군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이 맛이지.’

투닥투닥 불평불만.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실감난다.

반점 내 식사를 하는 이들의 모습을 여유롭게 한 번씩 바라보며 파양마군은 술잔을 채웠다.

천천히 들어 향을 음미하고, 조금씩 나눠 마셨다.

술이 흘러드는 느낌이 좋다.

술은 언제나 옳다.

이 좋은 술을 삼백 년 동안 마셔 보지 못했다.

물론 유폭하도.

알맞게 튀겨진 새우를 집어들어 양념장에 찍어 입안에 넣자 고소함이 입안 가득 번져갔다.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술과 안주를 함께하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없었다.

아니, 아니다.

오늘을 최고의 날이라 부를 순 없다.

당가주의 목만 썰고 왔어도 맛이 더 좋았을 텐데……

썰어버린 머리를 들고 당가주의 뺨에 ‘까꿍’이라고 적어 두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이 밤 당가는 공포 속에 눈물바다가 되었을 텐데…….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천화서고 대공자…….’

순서를 바꿔야 하나? 그놈부터 죽여야 하나?

아니, 아니야. 어차피 그 애송이 놈은 당가주가 맞이하러 가지 않았는가. 지금쯤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당가주는 아주 의기양양 복귀하겠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고 오겠어.

그 생각의 끝,

‘이런…….’

파양마군은 유폭하를 문 채로 멈췄다.

이게 삼 인분이나 되는 마지막 새우여서는 아니었다.

의기양양, 그 생각을 못 했다.

절망의 깊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백혼곡에서도 비슷했다.

생령과라 칭한 과실을 먹어서 젊어지고는 뛸 듯이 좋아했다가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젊어졌을 뿐이다.

생명이 연장되었을 뿐이었다.

생명의 연장이 지옥의 연장이란 걸 깨닫고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그래, 그거다.

나락으로 보내 주마.

당가주, 너도 같아져라.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반점 안에 웃음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파양마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텅 빈 의자를 보며 분통을 터뜨린 건 점소이.

“이 새끼 어디갔어? 아오오오오오! 개자식, 깨끗하게도 먹었네. 내가 이런다. 싸가지 없이 말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오오오오, 주인어른! 손님 하나가 먹고 튀었습니다요!”

**

“절망이지, 절망. 삼백 년의 절망, 또 누군가의 절망!”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돌아온 당가주의 참담한 얼굴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기에, 파양마군은 절로 노래가 나왔다.

“모두의 절망! 청성이 절망하고, 당가주가 절망하고, 아미가 절망하고, 온 세상이 절망하고! 그렇게 절망, 절망, 절망, 절망, 히히히히히히, 절망, 절망 또 절망……. 우리들처럼 너희도 절망!”

그렇게 당가가 가까워졌을 때,

파양마군의 노래는 그쳤다.

“뭐여……?”

당황한 나머지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인기척이 없는 것이다.

자는 것이 아니었다. 휘파람 소리에 그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잘 수 있을 리가. 아예 숨결조차 새근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개미조차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 고요함에 파양마군이 대저택으로 신형을 날렸다.

달라진 건 없었다.

방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저 술 한 병과 유폭하를 먹고 왔을 뿐인데…… 사라졌다.

꿈인가?

그럴 리가.

그도 아니면,

누군가 우리들을 알아차린 것인가?

그건가? 아미인가? 아미의 여승인가? 그년은 미쳐버렸을 텐데? 의사소통이 될 리 없는데? 심지어 우리의 얼굴을 본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이라는 말만으로 유추했다고?

그도 아니면 누군가 백혼곡에 들어가 확인해봤다고? 구멍은 진법의 한 중앙. 발견했다고 해도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파양마군은 한참이나 서성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겠지? 쫓아가? 그러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발, 한두 놈만 죽이는 걸론 안돼! 다 죽여야 해!”

그러다 찾았다.

보였다. 대청 앞 종이 쪼가리였다.

인지한 순간, 이미 파양마군의 손에는 구겨진 서신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래, 전서가 날아들었구나. 우리들의 이야기.’

펼쳐 내용을 살폈다.

- 보는 즉시 도망쳐라. 흩어져라. 당가의 복장, 당가의 흔적을 숨기고 전력을 다해 도망쳐라.

파양마군의 눈이 조금씩 커져 갔다.

‘내가 올 걸 알았다고?’

서신의 내용이 이어졌다.

- 상대는 무서운 자. 강한 자. 잔혹한 자. 결코 머뭇거려선 안 된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의 눈에 띄어선 안 된다. 그자는 미쳤다. 사천을 피로 물들이려 한다. 내가 돌아갈 때 부디 절망하지 않도록 부디 모두…… 살아남아라!

서신은 변경되었다.

백혼곡 노마들의 표적이 다른 곳으로 향하도록.

파양마군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천화서고…… 대공자!”

숨이 거칠어졌다.

내 먹이를 감히 건드려!

사천당가, 아미, 청성은 우리들의 것인데 감히!

“이 개새끼가!”

파양마군의 외침이 밤의 적막을 뚫고 멀리 퍼져갔다.

“기다려라! 천화서고 대공자아아아아아아!”

밤을 찢어발기는 외침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분노와 함께 내력이 실리니 마을을 넘고, 산을 넘을 정도.

그 외침을 들은 이들이 목을 움츠렸다.

객잔에서 술을 나누는 이들 중 몇몇은 술잔을 놓치기도 했고, 먼저 잠든 자들은 깨어나 가족끼리 모여 서로 끌어안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안도의 한숨이 되었다.

도망친 사천당가의 가솔들과 식솔들은 백혼곡 노마들의 표적이 자신들에게서 천화서고 대공자로 옮겨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된 사실은,

가주는 천화서고 대공자와 함께 있다는 것.

흑련의를 입고 나아간 가주는 천화서고 대공자와 함께 백혼곡의 노마들을 상대하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천화서고 대공자가 표적이 되어 주었다는 점.

고마운 사람…….

감사의 마음이 솟아났다.

“내 먹이다! 우리의 먹이란 말이다아아아아아!”

맛있는 건 나중에,

맨 마지막에.

아미는 모두 함께! 다같이!

하지만 빼앗으려는 놈이 있기에 그놈부터 없앤다.

파양마군의 신형이 쏘아져갔다.

밤을 가로질러 파양마군이 도착한 건 청성.

놈이 청성에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 속에 청성에 이르렀다.

사천당가가 미리 감지하고 종적을 감췄으니, 청성을 먼저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도착했을 때…….

“…….”

파양마군은 얼이 나가버렸다.

없다.

아무도 없었다.

당가처럼 청성도 사라져버렸다.

다 죽여버렸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도주!

천화서고 대공자…….

이놈 대체 뭐하는 놈인가?

놈이 이미 다녀간 흔적이 보여 파양마군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전각의 한쪽 벽면에 놈이 남겨 놓은 글귀가 보이는 것이다.

피로 휘갈겨 쓴 듯한 붉은 글자들이 선명했다.

- 청성은 들어라.

너희가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사천당가, 청성…… 너희는 결국 내 손에 죽는다.

나 천화서고 대공자의 손속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어디로 숨든, 언제까지 숨든, 찾아낼 것이고, 죽일 것이다.

“허어, 허허허허!”

파양마군이 헛웃음을 흘렸다.

천화서고 대공자…….

이쯤이면 인정하게 된다.

마두계의 샛별이 떴다.

나이도 어린 놈이 대체 얼마나 잔혹하고 악랄하면 이 지경이란 말인가!

“허허허허…….”

도주한 청성을 지금 쫓아다니고 있다고?

헛웃음을 짓던 파양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삼백 년 전의 마두는 어린 마두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재밌구나, 재밌어! 천화서고 대공자, 천화서고 대공자! 널 갈기갈기 찢어죽여 주마!”

그 소리를 밤의 창공이 들었다.

[쯧쯧, 미친 새끼 말하는 것 좀 봐라.]

[큭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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