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81화 (281/460)

281화. 격돌의 밤.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을 아미파가 들었다.

아미는 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천화서고 대공자, 나의 아미다! 나의 아미를 건드리지 마라!”

“우리의 아미를 죽이지 마라!”

계속 들려오는 외침.

처절함과 간절함이 여기까지 전해져온다.

누구인가?

아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밤은 무엇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돌변해 잔혹한 실체를 드러낸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청성 장문인과 당가주가 가담하고 있는 것도 경악스러운데…….

난데없다.

저 멀리 도움의 손길이 가공할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아미라 했다.

우리의 아미라고 불렀다.

어쩌면 무림맹일지도.

무림맹의 천하십객일지도.

아미파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고 있는 이가 후공이라면 좋겠지만…….

후공이라면 천화서고 대공자를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을 테지만…….

더 이상 후공은 세상에 없으니 그건 헛된 기대.

그래, 괜찮다.

천하십객이면 충분하다.

십객은 화경을 넘어선 이들.

모두가 현경에 도달한 이들이다.

십객 중 한 명이 한 문파와 견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러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천당가주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실상 가장 무서운 이는 사천당가주.

천하제일인의 무리 중 하나.

후공의 아우 중 하나.

이미 오래 전 현경에 이른 당가주라지만…….

십객 중 둘이라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십객은 당가주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가주만 돌아선다면 천화서고 대공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틀렸다.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니다.

당명은 이미 그의 대형과 함께 있는 중.

후공과 함께 있었다.

아직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이미 깊은 신뢰가 당명의 마음에 새겨지고 있었다.

“누군가…….”

후공이 아미파를 둘러보았다.

“……너희를 구하러 오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말을 이었다.

“……누구라도 소용없다. 누구도 너희를 구할 수 없다.”

기대감을 품어가던 아미파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심한 목소리는 아미파의 고수들을 휘돌아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 잔잔하면서 서늘한 음성에 아미파의 낯빛이 질려가고, 쏘아져가는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아직은 안 돼!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다오!’

‘제발, 제발! 아미의 누구도 죽이지 마라!’

구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미를 구한다.

하나라도 다치게 둘 순 없다.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아미는 자신들의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

여섯이 함께 천천히 그리고 하나씩 살점을 찢어나가야 하니까.

삼백 년의 고통만큼이나, 그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도록 울부짖고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천공단.”

후공의 나직한 목소리에 천공단이 즉시 반응했다.

신형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후공이 나아가 천공단을 뒤에 두었다.

그 순간,

두 인영이 날아들었다.

저 멀리서부터 흐릿함이 짓쳐든다 싶을 때,

쿠웅!

거칠게 두 청년이 지면에 내려섰다.

두 청년,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이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뒤쪽의 아미파를 돌아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늦지 않았다.

우리가 아미를 구했다.

그런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아미파는 누구 할 것 없이 주춤.

나타난 이들이 천하십객이 아닌 것이다.

처음 보는 얼굴, 그것도 청년!

그리고 경이로운 신법.

- 누구?

- 이들은 누구입니까?

- 천하십객은 아닌데…….

- 천하십객이 아니라면 이 두 젊은이는 대체…….

소리없이 수많은 전음이 아미파 비구니들 사이로 오갔다. 그리고 그런 전음의 끝,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그, 그들이구나.’

‘백혼곡이…… 사실이었어!’

‘백, 백혼곡의 마두들이…….’

‘대, 대공자의 말이 맞았구나. 한데 그럼…… 대공자는 왜?’

이미 전해 들었다.

백혼곡의 마두들이 젊어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령과!

그래, 생령과다. 마두들이 그 과실에 생령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래서 삼백 년을 살 수 있었노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미는 커다란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와 함께 혼란함도 말로 할 수 없이 가중되었다.

대공자가 장문인을 공격한 것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인 것이다. 대공자의 손에 들린 장문인은 이미 피칠갑이고, 아미파를 피로 물들인다고 말한 것도 방금이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상황만 놓고 보자면 이보다 기괴한 일이 없었다.

아미파를 서로 죽이겠다고 대치하는 상황이다.

백혼곡과 천공단.

문제는 이들 중 누가 승리를 쟁취한다 해도 아미로서는 결코 반가울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 끝에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우린…… 뭔가…… 놓친 게 있어.’

‘숨겨진 무언가가 있어…….’

‘또 다른 진실이 무엇이지?’

‘당가주…… 그래, 암향야…….’

아미는 자신들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그 자각의 핵심은 다시 돌고 돌아 당가주였다.

천하제일인의 의형제 중 하나.

이 강호를 쓸고 다녔던 사인방 중 하나.

후공이 아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후공에 대해선 존경을 넘어 경외의 시선을 보내던 당가주가 아닌가.

그런 당가주가 아미를 쓸어버리는 일에 동참한다?

그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그건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숨겨진 의미.

다른 의미가 있어!

찰나의 시간,

아미는 그 의미를 헤아리려 노력했다.

소리 없이 수면 아래 오가는 전음 속에, 한 가닥 희망을 누구에게 품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갔다.

청성 장문인, 당가주.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

아미에 위험을 알려온 이들이다.

그들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내면을 보자. 감춰진 것을 보자.

아미파는 험악하게 당한 장문인의 모습은 잠시 잊기로 했다.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이 같을 순 없는 일.

아는 바가 한정되어 있고, 겪은 바가 다르니 그들에겐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피칠갑이 된 비구니.

퉁퉁 부어오른 얼굴이 된 탓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음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목에 걸린 백팔염주.

아미의 장문 영부다.

삼백 년 전 천하제일인, 자신들을 몰아세우고 결국 가둬버렸던 청절사태의 목에도 저 백팔염주가 걸려 있었다.

요리 중 최고의 요리.

아미 장문인이 피떡이 되어 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놈이 했다는 생각에 파양마군은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숨이 붙어 있지 않는가.

살아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제 이 순간부터는 누구도 잃지 않는다.

모든 아미를 지킨다.

“아미는 두려워 마라.”

내가 왔다.

우리가 왔다. 우리가 온 이상 누구도 너희를 다치게 할 수 없다.

파양마군의 결의에 찬 목소리에 아미파가 전율했다.

이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다.

파양마군의 시선이 천공단을 훑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며 경지를 가늠하다 멈춘 건 한 곳.

“네놈인가? 천화서고 대공자?”

“그래.”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넌 누구지?”

“아미파를 지키는 자라고 해두지.”

지켜보는 아미파는 점점 더 확신에 찼다.

내막과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대공자가 상대를 모른 척하고 있지 않는가.

후공이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미파를 지키는 자라. 재밌구나, 재밌어. 그래, 너희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게 아니지. 어차피 순서만 다를 뿐 다 죽음을 맞이할 테니. 먼저 나선 만큼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지귀!”

즉시 지귀객이 다가왔다.

“보관해두어라.”

“네!”

지귀객은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이제 격돌.

아미파의 안전은 기괴하게 확보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아미 장문인 멸화사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일.

그 장소는 두말할 나위 없다.

땅 속.

피투성이가 된 멸화사태를 안아든 순간,

구르르르르르르.

순식간에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하로 깊숙하게 들어가 한 지점에서 멈춰 공간을 넓히고 확장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단정히 멸화사태를 내려놓아 눕힌 후,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장문인, 잠시만 이곳에 계십시오. 다 잘될 겁니다.”

“…….”

부어오른 눈으로 멸화사태가 바라봤다.

애써 참던 눈물이 맺혀 그녀의 눈에 지귀객의 모습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대공자의 전음.

그리고 나타나고야 만 백혼곡의 노마들.

그들이 청년의 모습인 것도 놀랍고, 그들의 무위도 경악할 수준으로 보인다.

대공자가 옳았다.

당가주와 운학진인이 옳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걱정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훨씬 수월하게 적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대공자는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가 악을 연기하며 아미파의 원망까지 한몸에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공자의 전음도 떠올랐다.

- 이 하루를 너의 마음에 깊이 새겨주마.

이미 새겨졌다.

잊을 수 없는 하루.

생이 다하는 날까지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손이 다가왔다.

지귀객이 멸화의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장문인, 울지 마십시오. 대공자님은 강합니다. 저는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오겠습니다.”

“…….”

지귀객의 신형이 이내 사라졌다.

멀리 간 건 아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만들어 놓은 토굴 주위를 경화시켜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틈틈이 공기가 통할 구멍도 미세하게 뚫어놓았다.

‘지귀객…….’

울지 말라고 했지만 멸화사태는 다시금 눈물이 흘러나왔다.

강호 삼대 대도 중 하나인 지귀객.

대도라 불려도 한낱 도둑에 불과하다 하찮게 여겼는데, 자신보다 나았다.

그리고 다정하다.

천공단이어서…….

천화서고 대공자 아래에 있는 사람이어서겠지.

그는, 대공자는 훨씬 다정한 사람일 테고.

*

지귀객이 지면을 뚫고 올라왔을 땐, 이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땅을 뚫고 나왔음에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의 눈이 타오르고 있었다.

각기 붉고 푸른 불길의 안광 속에서 기세까지 극한으로 끌어올리니 한참이나 뒤쪽에 거리를 두고 있던 아미파의 고수들이 주춤대며 계속해서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 맞서 나선 이도 둘.

당가주 당명이 히죽거리는 가운데, 흑련의가 바람에 흔들리듯 거칠게 너풀거렸다.

그 태도는 어떻게 봐도 여유가 넘치고 기뻐 보였다.

기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당명에겐 백혼곡의 마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광경을,

이제 비로소 보게 된다.

‘대형의 신검……. 번쾌친을 다시 보게 되는구나.’

차분한 기운은 오직 후공뿐.

시선을 파양마군 쪽으로 둔 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후공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 단주, 누가 먼저 끝내는지 내기하는 건 어떤가?

- 내기라…… 가주, 천공단 다 되셨습니다.

- 허허, 그렇게 되나? 뭐 어쨌든 할 건가, 말 건가?

- 후후, 해보죠.

옛 생각이 떠올라 후공이 미소지었다.

그것도 잠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천공단은…….”

금적자를 위시한 천공단 모두가 귀기울였다.

후공이 말을 이었다.

“……아미파를 남김없이 쓸어버린다.”

그와 동시에,

네 줄기 자줏빛 광채가 포악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앙!

카르르르르르르릉!

크르르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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