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어쩌면 영원한 악(惡).
콰악,
물컹한 느낌,
이윽고,
쑤우욱!
두 눈이 뽑혀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극진마군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마혈까지 제압되어 굳어진 상태임에도 고통은 마비를 뛰어넘었다.
극진으로선 예상치 못한 고통.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고통.
백혼곡에서 빠져나올 때만 해도 세상을 피로 물들일 생각이었는데, 고통은 오직 이 시대의 강호가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눈알이 뽑혀나갔다.
그것도 그토록 바라던,
그토록 간절히 가고 싶었던 아미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다니…….
꿈이겠지?
하지만 타들어가는 눈의 통증은 현실이라고 부르짖고 있었고, 극진마군은 꿈이라면 깨고 싶어 미칠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래, 꿈이 아니다.
“흐흐흐흐…….”
비릿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눈을 뽑은 자.
자신을 우롱하듯 농락한 자.
이놈은 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이리 강할 수 있는 것인가?
정녕 격전 중 일격조차 가하지 못했다. 전혀 닿지 못했다. 부서지고 부서지며 흩어져 마치 허상을 좇는 것만 같았다.
마음으로 물었을 뿐인데,
대답이 들려왔다.
꽈직.
안구가 으깨지는 소리.
그리고,
“사천당가의 가주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극진의 비명은 더 처절해지고 커졌다.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파양마군이 틀렸다.
사천당가, 청성파, 그리고 아미까지 천화서고 대공자는 그 모두를 멸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시선을 돌려 백혼곡의 표적이 자신이 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하하, 그런 줄도 모르고…….
하하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뇌 없는 허수아비처럼 기고만장한 꼴을 보였구나.
급기야 극진마군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매미가 된 것인가.
아니, 매미보다 더하다.
매미는 칠 년을 땅속에서 웅크렸다가 세상에 나와 칠 일을 살다 떠나는데, 자신은 삼백 년을 갇혀 살다 열흘도 못 살고 죽음을 맞는다.
그러니 우습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극진마군의 웃음소리는 서서히 잦아들어갔다.
이미 내부 장기가 뭉개져버린 터. 마지막 숨결에 웃음을 터뜨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죽음.
웃음의 끝.
아미파는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환호하는 이도 없었다.
아미의 그 어떤 비구니도, 그리고 천공단조차 멍해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환호하기엔 현실 같지 않아서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 격전을 보긴 했는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는데…….
하나도 본 것이 없는 것이다.
현경에 이른 고수들의 대결을 처음 보았다.
이것이 현경인가?
그런 충격에 휩싸여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바라봤을 뿐이었다.
화경에 이른 이들이 여럿이었지만, 그들도 어떤 싸움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부서져 흩어지던 당가주가 더 이상 부서지지 않나 싶을 때, 이미 당가주는 눈을 뽑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천화서고 대공자.
그의 격전은 그저 사람의 형체를 띤 두 개의 푸른 불덩이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의 형체도 사라져 그저 불덩이.
어떻게 사람이 불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그 불길 속에서 타지 않을 수 있는가.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멀리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서있는 곳까지 전해져, 그 뜨거움에 한참이나 뒤로 물러서야 할 정도였는데 말이다.
그러니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런 경탄이 환호성마저 삼켜버려 아미가 깊은 침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카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르르르르르르릉!
속박에서 벗어난 검령과 번쾌친이 뒷북을 쳤다.
자줏빛 광채를 찬란하게 빛내며 아미의 밤하늘을 질주하다 잿더미가 된 파양마군을 쓸어갔다.
감히 주인을 죽이려 한 자.
주인을 몰아세운 자.
다시금 이별을 강요한 자에게 분노를 토해내며, 이미 죽어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잿더미를 다시 분쇄해갔다.
그 뒷북에,
후공은 미간을 꿈틀.
‘니들 지금 뭐하냐?’
뭐하긴요.
적을 섬멸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듯 검령과 번쾌친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간 건 아니었다.
‘꺼져라. 난 너희에게 크게 실망했다.’
순간, 번쾌친이 뚝 멈췄다.
자줏빛도 순식간에 잃고 망연자실 떠 있다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꺼지란다고 꺼질 수는 없는 일.
투드득, 떨어져내려 죽은 척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앙!
검령 혼자 신나게 잿더미를 휘저어갔다.
그것도 잠시, 혼자만 그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검령이 이내 빛을 거두고 번 곁으로 추락해 죽은 척했다.
‘쯧쯧, 한심한 놈들.’
그쯤에서 천공단이 현실을 자각했다.
아미는 그대로였지만, 본 것이 많고 겪은 바가 많은 천공단의 회복력은 빨랐기에,
“우와아아아아! 형님이 끝내버리셨어!”
“천공단주 만세에에에에에!”
“백혼곡의 마두를 태워버리셨다고오오오오!”
“으하하하하하하, 아미여! 강호여! 경외하라!”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삐리리리리리, 삐리리리리리리리!
피리 소리까지 요란하게 불며 다가오는 천공단을 바라보며 후공은 내심 혀를 찼다.
여기에도 한심한 놈들이 한 다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천공단.”
무심함 속에 언짢음을 감지한 천공단이 달려오다 뚝 멈췄다.
후공이 말을 이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요? 천공단주의 말이 우습습니까?”
응?
해야 할 일?
“……?”
천공단이 갸웃한 것도 잠시, 퍼뜩 머리를 스쳐 간 생각에 서로 바라봤다.
그거다!
‘천공단은 아미를 쓸어버린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금적자를 위시한 천공단이 아미를 바라봤다.
지금 피리나 불고 환호할 때가 아니다. 아미의 대가리를 깨버려야 한다.
“가자고!”
“머리통 날려버리자고!”
“죽여버려어어어어!”
아미는 주춤했다.
하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도망칠 수 없다.
눈앞에 현경의 고수가 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그보다는…….
도망칠 이유가 없다.
이제 온전히 아는 것이다.
아미는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과거의 유훈.
삼백 년 전의 유훈에 붙들려 몰살당할 뻔했다. 굳은 각오가 경지를 보완해주는 건 아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해도 아미를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저 개죽음.
유훈을 남겼던 선조가 바란 것도 그런 결과는 아닐 테지.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아미가 천공단을 맞이했다.
저항 없이, 어떤 반항도 없이 천공단의 맹공을 받아냈다.
저항이 없다고 살살 다룰 천공단이 아니었다.
애초에 제정신인 사람이 없기도 하고, 단주의 명은 절대적이기에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이미 단주가 아미파 장문인을 피칠갑 내는 과정도 목도했기에 그처럼 아미를 몰아붙였다.
비명이 터지고, 머리도 터졌다.
푹푹 칼도 박혔다.
예외는 없었다. 장로들은 물론이고 이제 갓 아미에 들어선 어린 여승까지 나뒹굴었다.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했음에도 몇몇은 도주하기도 했다.
“흐흐, 어디 가냐!”
“클클, 달빛에 머리가 반짝여서 잘 보인다만!”
“크어어어억!”
그런 광경에 당명은 너털거리며 고개를 절레거렸다.
“허허…….”
천공단은 정녕 미친놈들 같은 것이다.
악귀들이 따로 없었다.
한데 이상하다.
왜 이리도 재밌는 것인가.
왜 예전 대형과 함께 강호를 종횡하며 패고 다니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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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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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경 후.
아미의 대연무장에 모든 아미가 모였다.
땅속 깊이 보관되어 있던 아미 장문인 멸화사태도 보였다.
그들 중 성한 얼굴은 없었다.
하지만 원망의 마음은 그 누구도 품지 않았다.
아직 끝이 아닌 것이다.
백혼곡의 여섯 마두 중 고작 둘이 죽었을 뿐이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여전히 악인의 면모를 가장하며 백혼곡을 상대하려 한다.
아미를 피로 물들인 것도 그 일환.
그리고 이제 아미는 도망쳐야 한다.
힘겨운 일을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떠넘기고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걷게 된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이제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미 장문 멸화사태가 한 걸음 내디뎠다.
터지고 부어오른 눈을 뜨고 대공자를 바라봤다.
그곳엔 무심한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멸화는 대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멸화, 이 하루를 너의 마음에 깊이 새겨주마.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 말대로다.
분명 이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자신도 아미도.
대공자의 모습도 이제 달라 보인다.
분명 젊은 모습인데도 거대해 보이고, 강호의 선배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전대 고수가 반로환동한 것처럼도 보였다.
무엇이든 상관없겠지.
이미 천화서고 대공자는 거인.
모두가 부정한다 해도 멸화에겐 이미 그리 보였다.
“대공자…….”
멸화가 입을 열고,
모든 아미가 숨죽였다.
“……아미파는 오늘 크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하루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잊지 않겠습니다. 모든 아미가 한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과거의 유훈보다 더 크게 이 밤을 새긴다.
그 말의 끝에 아미가 입을 모아 감사의 마음을 큰 목소리로 전하려 할 때였다.
“조용.”
대공자의 나직한 한마디에 모든 아미가 주목했다.
대공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너희의 친구가 아니다. 여전히 악. 어쩌면 영원한 악.”
“…….”
“…….”
아미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는 대공자가 말하는 의미를 낱낱이 이해하는 탓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악이 아니다.
친구다.
그저 아직은 아니라는 말.
마음이 복받친 건 여전히 악, 어쩌면 영원한 악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미 듣지 않았던가.
이제 사천 전역에 거짓 소문이 휘몰아칠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악명을 모두가 알게 될 터였다.
백혼곡이 들을 수 있게,
백혼곡이 아미를 추적하지 않게,
그렇게 한다고 했다.
“아미파는 누구 하나 남김없이 죽일 것이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공자는 여전히 악으로 남아 백혼곡을 상대하려 한다.
“청성파와 사천당가도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누구도 청성과 당가, 그리고 너희를 구할 수 없다.”
차라리 그렇게 믿으라고 말한다.
마음까지 속여 진실이 되게.
그러다…….
그러다…… 나쁜 결과를 맞이한다면,
백혼곡에 의해 대공자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해명해 줄 이들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대공자는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영원히 악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언제까지든 악으로 회자되게 될 것이다.
“말하려거든 그렇게 하라. 이 밤 너희의 외침이 멀리 퍼져나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아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 속에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천화서고 대공자여!”
모두의 함성.
내력이 실린 아미의 외침이 산야를 뒤흔들고 그 너머 민가로까지 퍼져갔다.
“아미는 결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피를 기억하고 떠올려 반드시 너를 다시 찾을 것이다! 너에게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아미는 너에게 반드시 되돌려주겠다!”
온전히 감사의 말을 할 수 있길.
조만간 다시 볼 수 있길.
그런 소망을 거짓 분노에 담아 아미가 마지막으로 더 큰 소리를 냈다.
울음이 곳곳에서 터지는 가운데…….
“그러니 천화서고 대공자여! 부디 살아남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