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흐흐흐, 안녕.
아미의 외침을 많은 이가 들었다.
그 외침은 민가의 잠을 깨웠고, 아미산 곁을 지나는 이들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아미파의 피맺힌 절규.
복수를 다짐하는 소리.
그 대상은,
천화서고 대공자!
*
사천성 중부 단파현.
현에서 가장 큰 도박장인 도성원에 전서매가 날아들었다.
‘이 아침에?’
전서매를 맞이한 중년 사내가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서둘러 전서를 확인한 사내의 안색은 이내 하얗게 질려버렸다.
곧바로 원주를 찾아가 보고하니, 원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건 대체 뭔 신박한 개소리냐?”
백발에 뚱뚱한 체구의 원주가 손에 든 전서를 흔들어대며 수하를 비웃었다.
“이걸 나보고 믿으라고? 그러니까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미파와 청성파, 그리고 사천당가를 쓸어버리려 한다?”
“전서에 써 있는걸요.”
“우리 하오문의 친구인 그 천화서고 대공자가?”
“네!”
“아니 이 새끼가 처돌았나?”
원주가 때릴 듯 손을 들었다.
수하가 두 팔을 들어 막는 시늉을 했다.
원주의 폭언이 이어졌다.
“야 이 새끼야! 정신 안 차리냐! 뭐든 역사가 증명하는 법이야! 사람에게도 역사가 있는 거고. 그 사람이 지나온 길, 그 사람의 과거 언행이 현재를 말해준다 이 말씀이지. 그럼 우리 대공자는 어떠냐? 솔직히 대공자가 여태 보여준 게 어디 한두 개냐! 그래, 안 그래?”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죠.”
수하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근데 표정이 왜 그대로여?”
“원주님, 청성파가 고요하고 사천당가도 쥐죽은 듯 조용하다는 정보가 들어왔지 않습니까요. 무서워서 들어가 확인까진 못해봤어도 아예 사람이 안 사는 것 같다고요. 그리고 아미파 건은 직접 들은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요. 지금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역사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고작 일 년 반 전 검성이…….”
검성이 마화했다.
결코 마화할 수 없는 인물 중 하나가 검성.
인품이며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할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검성이 마을 몇 개를 피로 물들이고, 소림의 백팔나한도 핏덩이로 만들었다.
“만약 후공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 피해는 말로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 그건 그래.”
원주의 낯빛이 시무룩해졌다.
조금 설득당해 버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람 일 모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전해져오는 소식도 묘하긴 했다.
천공단은 확실히 사천에 있다.
문제는 그 천공단이 분리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점.
젊은 층만 따로 움직이는데 요란함이 없다.
소란스럽기가 말로 할 수 없다는 그 천공단이 조용조용 이 객방 저 객방 전전하며 옮겨 다니고 있었다.
함께 움직이지만 몰려다니지도 않는다.
따로인 듯 함께인 듯 움직인다.
무언가 경계하는 듯하고, 튀어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받았다.
뭘 두려워하고 있지?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리고 청성파 부근에서도 누가 내지른 것인지 모를 외침을 들었다고도 했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죽여버리겠다는 외침.
“원주님, 대공자가 마화했다면 우리 하오문도 무사할 수 없습니다.”
“아니야! 개새끼야, 그럴 리 없어!”
원주는 강하게 부정하고 뜨락의 담장 너머 떠 있는 아침 해를 가리켰다.
“저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대공자가 마화할 리는 없어! 저 태양이 사라질 리 없으니 대공자도 당연히…….”
원주가 말을 멈췄다.
태양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태양을 가린 건 한 사람.
도대체 언제 나타난 건가.
귀신인가?
분명 방금까지 없었는데 자신의 눈앞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곁에 또 한사람이 서 있었지만 원주의 눈에는 청년 외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원주가 덜덜 떨었다.
아는 얼굴이다.
천화서고 대공자.
하오문에 천화서고 대공자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누구 있을까. 만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수백 번은 넘게 본 얼굴이다.
침을 꿀꺽 삼킨 것도 잠시,
“대, 대공자님! 사, 살려주십쇼!”
원주가 바로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쿵!
수하는 그보다 빨라 진즉에 쿵쿵 머리를 찍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후공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만족스럽기도 했다.
잘못된 정보, 온전치 못한 정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법. 하오문이 그럴진대 백혼곡은 어떠하겠는가.
“역시 하오문이군. 너흰 내 손에 죽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구나.”
“으허어어어엉…….”
수하가 울음을 터뜨렸다.
“대, 대공자님, 부디 옛 정을 생각하시어 목숨만은…….”
“우리 사이에 정이 있었나?”
“으허어어어어어어엉…….”
수하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원주는 달랐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뭐여? 살기가 없잖아. 그리고 바쁠 텐데 내가 뭐라고 나까지 몸소 죽이러 와? 말도 안 돼.’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 올려다보니 대공자가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또 보이는 건,
대공자 뒤로 이제야 신형을 내려서는 천공단의 면면들.
누구할 것 없이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또 한 사람도 비로소 보였다.
그를 본 순간 원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발, 암향야…….’
계 탔다.
이게 대체 무슨 영광인가.
후공의 세 아우 중 하나.
현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세고수.
같은 사천에 있어도 마주하기 힘든 사천당가의 가주인 것이다.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대공자가 사천당가까지 쓸어버린다고 했는데 그 곁에 당가주가 있으니 뭘 더 망설이겠는가.
‘그럼 그렇지. 우리 대공자가 누구인데. 캬아, 만나는 사람마다 어마어마하구만.’
원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잇! 놀랐잖나!”
후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원주, 서운합니다. 제 신망이 고작 이 정도였던가요?”
“아……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사실 그건 다 이 새끼 때문이라네.”
그러면서 원주는 아직도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수하에게 호통쳤다.
“대공자가 뭐가 어째! 당장 안 일어나냐, 이 호로새끼야!”
욕을 한 사발 토해낸 후 원주가 돌아섰다.
이미 얼굴은 싱글벙글.
“대공자,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가 뭘 해야 하지?”
**
하오문이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소문.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일.
표적을 바꾸는 일.
백혼곡의 마두들의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이야기를 전했다.
여태 벌어진 상황을 듣고 경악한 하오문 원주를 뒤로하고 나오는 길.
당명이 물끄러미 대공자를 바라봤다.
‘이 친구…… 볼수록 묘하단 말이야.’
얼굴도 다르고, 나이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대공자가 거침없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고 있자니 마음은 자꾸 기묘해진다.
“가주, 왜 그렇게 보십니까?”
“한 사람이 떠올라서.”
대형.
후공이 떠오른다.
“그렇습니까. 그보다 내기에서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만.”
“후후.”
당명이 웃음 지었다.
누가 먼저 적을 쓰러뜨리냐는 내기를 했었다.
이긴 건 대공자.
“원하는 걸 말해 보게.”
“앞으로 형님이라고 부르십시오.”
“쯧, 거 자네, 보기보단 집착이 심한 편이구만.”
당명이 혀를 찼다.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왜 싫습니까?”
“싫어. 형님은 무슨…….”
“조만간 그렇게 부를 날이 올 겁니다.”
“안 와! 절대로 안 와!”
“하하하하하!”
당명이 걸음까지 멈추고 소리치는 모습에 후공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날은 온다.
조만간.
그래, 조만간.
**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이야기 되는 말들은 모두 한 사람의 악행에 관한 것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미쳐버렸다는 말이 오갔다.
무공의 경지를 급하게 끌어올리려 무리한 탓에 마화했다는 말들이었다.
위세가 대단해 이미 아미파가 곤경에 처했고, 청성과 사천당가도 찾아다니고 있다고도 했다.
한편 암향야의 종적도 묘연하여 진즉에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고, 암향야가 없는 사천에서 천화서고 대공자를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불안에 떨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기에,
“콜록, 콜록, 콜록!”
요로선인도 들었다.
청성이 무림맹에 보내온 서신.
청성제일검인 구양진인이 변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받고 맹의 십이대주와 함께 청성파로 향하던 와중이었다.
“콜록, 콜록! 대체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이냐!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돌아?”
요로선인으로서는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누구인가.
신검의 선택을 받은 자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만났고, 그 됨됨이도 확인했지 않았던가.
그런 대공자가 구양진인을 죽였다고?
“소문만은 아닙니다.”
“콜록, 콜록. 왜?”
“황급히 청성파만 확인했습니다만, 그곳에서 대공자가 남긴 글귀를 찾았습니다.”
“글귀?”
중도에 맞이하러 온, 무림맹 사천지부장의 말에 요로선인이 갸웃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설명에 요로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흐음…….”
청성이 텅텅 비었고, 아무도 없단다.
청성이 급히 대피했다는 점에서는 마음이 놓였지만, 근심은 더 커졌다.
“콜록, 콜록. 알 수 없군. 알 수 없어.”
“선인,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청성으로 가시겠습니까?”
“콜록, 콜록…….”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요로는 잠시 침묵했다.
청성은 확인했으니 굳이 갈 이유가 없다.
남은 건 당가와 아미인데…….
***
그날 저녁.
아미의 북쪽 아현현.
아미파에서 마차로 사흘 길인 현의 모처에도 소문이 돌았고, 그 이야기는 네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백혼곡의 네 마두.
독마군, 신륜염제, 유령마군, 권황신마.
모두 청년의 외모.
지난밤 확인을 위해 아미파로 떠난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의 귀환이 늦어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들이었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변수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기에, 신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아미로 향했다.
“파양과 극진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아마도 놈을 쫓고 있을 테지.”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후후, 파양마군이?”
“하긴. 죽였겠군.”
걱정은 없었다.
걱정이라면 다른 걱정뿐.
파양마군의 성정이 걱정이다.
이 시대에 악의 화신인 양 날뛴다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죽이는 것이야 별 문제될 게 없지만, 기분이 들뜬 파양마군이 아미파까지 모조리 쓸어버린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미는 백혼곡 최고의 요리.
반드시 여섯이 함께 먹어야 한다.
만약 파양이 먼저 먹어치운 것이라면 삼백 년을 함께한 파양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마차로는 사흘 길.
하지만 그들이 아미산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밤이 지나지 않았다.
산을 빠르게 올랐다.
아미파가 점점 가까워지며 네 마두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았다. 기감을 최대화하여 탐지하며 나아가는 길 심히 고요한 것이다.
그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식을 터뜨렸다.
“설마?”
“젠장!”
“안 돼!”
소리는 없지만 벌써 후각이 자극되었다.
혈향이다.
그것도 짙은 혈향.
대체 얼마나 많은 이가 죽은 것인가!
‘파양이 혼자 아미파를 끝내버렸다고?’
‘그럴 순 없다. 그래선 안 돼!’
아미파의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싶은 순간, 넷은 신형을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보았다.
정녕 뜻밖의 광경.
아미파의 드넓은 대연무장.
그 한가운데 커다란 장대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한 청년의 시신이 매달려 있었다.
누군지 알아보았기에 모두 얼어붙었다.
보았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신형을 내려 천천히 연무장 중앙으로 다가갔다.
두 눈이 뽑혀 있는 청년.
그렇다해도 어찌 얼굴을 못 알아볼까.
삼백 년을 본 얼굴이다.
극진마군이다.
그리고 도발!
극진마군의 얼굴에 글귀가 남겨져 있었다.
극진의 한쪽 뺨에는 웃음의 말.
다른 한쪽 뺨에는 인사.
- 흐흐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