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촉산으로 오라.
쿠웅!
네 마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낯빛은 진중해졌고, 반면 안광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안녕.
파양마군이 청성제일고수의 뺨에 남겼다던 글귀가 자신들에게 되돌아왔다.
의미는 간단치 않다.
천화서고 대공자! 이놈은 미쳤다.
어쩌면 파양마군보다 더한 놈일지도.
그런 놈이 도발해왔다.
놈의 목표는 이제 자신들.
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아낸 걸까?
놈에 대해 알아보자.
신륜염제가 손을 들어올렸다.
백혼곡 최고 서열,
삼백 년 전 마교 교주. 마제라고도 칭해진 신륜염제의 손짓에 세 노마의 신형이 흩어졌다.
흔적을 찾아나서며 흩어졌던 세 노마는 이내 한 지점으로 모였다. 원래 아미파 장문인의 전각이 자리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잔해조차 희미한 그곳에서,
“한 명이 아니다. 둘.”
격전의 흔적을 찾았다.
발자국을 훑어보며 극진마군의 신법 특성을 떠올리며 알아냈고, 상대의 움직임도 유추했다.
“상대는 최소 현경의 중. 신법이 놀랍군.”
권황신마가 나직이 파악한 바를 밝혔다.
독마군과 유령마군은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감이다. 극진마군이 맞이한 자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흔적이 있어도 너무 옅고 또 드문드문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농락당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극진마군이 현경 초기인 예의 경지란 걸 감안하면, 상대는 최소 현경의 두 번째 단계인 중에 이르렀다고 봐야 했다.
진경과 화경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면,
화경과 현경의 격차는 하늘 그 너머의 하늘.
그렇기에 현경의 예와 중의 경지도 화경의 예와 중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 시대에 현경의 중에 이른 고수를 보게 되다니.
그런 의문도 잠시, 다른 흔적을 살폈다.
잿더미.
누군가 재가 되었다.
누가 재가 된 것인가?
의문은 무의미하다. 당연히 이 잿가루는 파양마군.
극진마군의 주검을 보았으니 이 잿가루는 파양마군이라고 봐야했다. 그뿐 아니다. 파양마군이라는 증거도 버젓이 남아 있었다.
“어이가 없군.”
유령마군이 잿가루 속에서 작은 돌조각 둘을 집어들었다.
묵빛과 적빛이 혼합된 색상을 지닌 돌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고, 잘린 단면이 매끄러웠다.
파양마군이 목에 차고 다니던 화용석이었다.
화(火)의 기운을 지니고 있으며, 혈교 교주의 신물.
그러니 어이없었다.
누구라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파양마군이 정작 잿더미가 된 역설의 광경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흥미롭군. 화정을 능가하는 불의 기운을 다루면서도 검까지 쓰는 자라니.”
파양마군을 태워버린 건 천화서고 대공자일까?
그럴지도.
파양마군은 극진마군과는 격이 다르다.
극진의 백혼곡 서열은 6위. 파양마군은 세 번째 서열.
그렇다면 천화서고 대공자의 경지 또한 현경의 중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둘이 아니라 셋인가.”
이내 주변을 훑다 새로운 흔적을 찾아냈다.
땅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이다. 장력에 의해 파인 구멍이라기엔 너무 깊었다. 독마군이 몸을 던져 구멍을 따라 들어갔다.
소득은 없었다.
소득이라면 땅굴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이었고, 마지막 지점에 작은 방처럼 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
그것만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유추하는 건 무리였다.
그저 경각심만 높아졌다.
세 사람이 신형을 돌렸다.
파악한 바를 안고 신륜염제에게 돌아갔을 때, 그들 앞에 새로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극진마군의 상의가 벗겨져 있었고, 그 가슴팍에 새로운 글귀가 남겨져 있었다.
- 나 천화서고 대공자. 백혼곡에 전한다.
클클클, 너희는 삼백 년을 갇혀 있었다지?
둘은 죽였으니 너희는 이제 고작 둘.
‘놈은 극진마군을 고문했구나. 극진은 넷이 아니라 둘이라고 둘러댔고.’
그렇게 생각했다.
- 먼저 아미와 청성, 사천당가를 쓸어버리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가 내 복수를 방해하니 너희부터 끝내주마. 사흘 뒤 촉산의 일별봉(日別峰)으로 오라.
놈의 초대.
장소와 시간.
반가운 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글귀가 심기를 긁었다.
- 기회는 준다. 생령과를 가져와라. 클클클, 그러면 살려준다.
고문당한 극진마군이 결국 생령과에 대해선 말했나 보다.
하긴 삼백 년과 청년의 외모에 대한 의구심을 해결하려면 생령과밖에 없긴 하다.
그러한 고문 속에 두 눈을 뽑은 건가.
이 강호도 미쳤다.
삼백 년 전 강호도 미쳤는데,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우우웅.
기음이 터져나온 건 신륜염제 쪽이었다.
손바닥 위에 금빛 쟁반 같은 원반이 놓여 있었다.
염제가 원반을 띄웠다.
머리 위까지 떠오른 원반이 확장되었다.
촤앙, 촹!
겹겹이 층을 이뤄 포개져 작은 형태가 되었던 원반이 점점 커져 커다란 솥뚜껑처럼 커졌다.
빙글 빙글 회전하며 금빛을 찬란히 빛냈고,
촤앙, 촤좡, 촤장!
원반의 테두리에 톱니가 튀어나온 순간, 사라졌다.
눈으로 좇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금빛이 번쩍이며 이어진다 싶은 순간, 전각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쿠쿠궁, 쿠구궁.
아미의 수많이 전각, 불당이 모조리 허물어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가히 순식간.
츠아아아아앙!
아미를 폐허와 잿더미로 만든 금륜은 다시 주인의 손으로 빨려들듯 되돌아왔다.
척.
신륜염제의 손에 닿자, 금륜은 다시 톱니를 숨기고 작은 원반이 되었다.
신륜염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놈부터.”
***
“콜록, 콜록.”
“어서 오십시오!”
밤을 꼬박 새며 아미파로 향하던 요로선인과 맹의 십이대주는 반점에 들었다. 수면을 취하지도 먹지도 않고 달려온 길에 잠시 휴식의 시간이었다.
“손님들,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콜록, 콜록. 아무거나. 빨리 준비할 수 있는 것으로.”
“하하하, 넵! 엄청나게 빨리 준비하겠습니다요.”
말한 대로였다.
빨리 나왔고, 소면이었다.
후루룩 마시듯 한 젓가락을 뜰 때, 아까 접대한 점소이가 만두를 들고 다가왔다.
“이건 저희의 성의입니다.”
“응?”
요로선인이 갸웃하며 점소이를 바라봤다.
점소이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작게 소근거렸다.
“고수님들이시죠? 저희 주인 어른께서 강호 고수들에겐 잘 보여한다면서 드리는 겁니다.”
“콜록, 콜록! 그건 알겠는데.”
“네?”
“왜 하나야?”
요로선인이 접시 위에 놓인 하나의 만두를 보고, 함께 온 십이대주를 눈으로 가리켰다.
왜 열세 개가 아니냐고!
웃던 점소이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걸 왜 나한테 그러냐, 혹은 열세 개나 요구하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얼굴을 하고는 휙 돌아서 가버렸다.
당황한 건 요로선인이었다.
“허허, 뭐하는 놈이야.”
만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이 여간 먹음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호의를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콜록, 콜록. 이거 누가 먹거라.”
요로선인이 만두를 가운데로 옮겼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원래 그렇지 않던가. 마지막 남은 하나는 누가 먹어야 할지 애매한 것처럼, 맹의 십이대주도 소면만 축냈다.
그렇게 소면을 다 먹은 후, 만두만 덩그러니 남게 된 상황.
서로 눈치만 보던 중 천기항마대주가 용기를 냈다.
만두를 집어 들어 반으로 쪼개 나누려다 갸웃했다.
만두 속에 종이가 들어있는 것이다. 바로 펼쳐 확인하고는 눈이 커졌다.
“응?”
거기엔 빼곡이 두 문장이 담겨 있었다.
- 소문은 사실이 아님. 네 청년을 조심,
쪽지를 건네 받은 요로선인이 명을 내리기도 전에 세 명의 대주가 점소이를 잡으러 튀어나갔다.
“누구 말씀이십니까요?”
“아까 주문을 받은 점소이. 이마에 사마귀가 있는.”
“네? 사마귀요? 그런 점소이는 우리 반점에 없습니다만.”
주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의 말대로였다.
반점의 일 층에서 이 층과 삼 층까지 살폈지만 점소이는 찾을 수 없었다.
반점 밖으로 나가 주변을 탐색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하오문이구나.’
요로선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탈하게 돌아온 세 명의 대주를 탓하진 않았다.
중요한 건 의미였다.
소문이라면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대한 것이다.
‘역시 그렇겠지?’
한데 네 청년은 뭔가?
뭘 조심하라는 거지?
아직까지 의문도 남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는 것이다.
청성의 구양진인이 죽은 건 실제 일어난 일이고, 청성에 남은 글귀도 그렇다.
믿음과 불신 사이 마음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려 할 때, 들어서는 손님들과 마주쳤다.
네 명의 청년들이었다.
누구 할 것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청년들.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기운.
백혼곡의 네 마두였지만 요로선인이 알 수는 없는 일.
나가는 통로는 좁아, 한 줄로 섰음에도 요로는 그중 권황신마와 어깨가 부딪혔다.
들어서던 권황신마가 돌아서며 갸웃했다.
그건 요로선인도 마찬가지였다.
부딪혔다 싶은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
분명 처음 보았고,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아본 건 상대의 경지.
‘설마…… 현경?’
그런 생각을 동시에 떠올렸다.
놀란 건 요로선인 쪽이 더 컸다. 상대가 고작 이십 대의 청년인 것이다.
이런 느낌, 이런 기운은 최근 두 번째.
얼마 전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받았다.
극도로 정제된 기운.
전혀 외부로 표출되지 않아 그저 먹물 가득한 서생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기운만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대공자가 화경을 넘어섰다고 생각했거늘, 뜻하지 않는 곳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너 누구냐?”
권황신마가 물었다.
눈에 살기가 차츰 번져갔다.
요로가 미소를 머금었다.
“콜록, 콜록. 그저 지나가는 늙은이일세. 부딪힌 건 미안하네.”
“누구냐 물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뭐 그리 궁금한가.”
권황신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살기가 짙어진 그의 눈이 요로를 바라봤다가, 먼저 나간 열두 명의 검객을 바라봤다.
죽이는 데까지,
십 초식.
먼저 눈앞의 늙은이를 죽이는 데 구 초식.
그다음 열두 명의 검객은 일 초식.
‘후후후…….’
기운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 권황신마,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신륜염제의 전음이 들려왔기에 권황신마가 기운을 가라앉혔다.
“꺼져라.”
“허허, 고맙네.”
요로선인이 웃으며 돌아섰다.
어느샌가 등줄기는 축축해졌다.
머리로 떠오른 건 만두 속 쪽지.
- 네 청년을 조심.
‘방금 마주친 네 청년이 모두 현경이라고?’
누구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애써 갈무리하고 십이대주 쪽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맹의 십이대주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쪽지를 보았지만 연관 짓지 못했다. 그저 예의 없는 일반인과 사사로운 시비가 붙었다고만 생각했다. 이런 일은 흔한 것이다.
후공도 그랬고, 요로선인도 마찬가지.
일반인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런 생각과 그런 지나온 길이 자신들의 목숨을 살린 걸 알 길 없는 십이대주가 요로선인을 뒤따랐다.
좌측으로 멀리 촉산을 둔 채 신형을 날리던 그들이 멈춘 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 후였다.
끼이이이이이이이!
“선인, 색황조입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아름다운 깃털을 지닌 새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색황조가 보인다는 건,
색황조의 주인이 부근에 있다는 뜻.
사천당가주가 살아있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눈앞에서 사람의 형체가 부서져내리며 나타났다.
“암향야를 뵙습니다.”
“사천 당가주께 인사 올립니다.”
“가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십이대주들이 눈앞에 형체를 드리우는 당명을 향해 예를 취했다.
요로선인만 뚱하니 갸웃하다가 소리쳤다.
“명아,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인사고 뭐고 당장 설명해라!”
“하하하!”
당명이 한바탕 웃고는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백혼곡의 이야기, 여섯 마두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미와 청성의 또 다른 진실이 담겨 있었기에,
요로선인의 눈동자는 거의 지진.
“명아…….”
“왜 그러십니까?”
“나 아까 죽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