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스며들다.
촉산의 동쪽 현.
그곳 한 객방에서 세 사람이 자리했다.
서로 간에 인사는 생략되었고, 빠르게 말이 오갔다.
주로 말한 건 대공자였고, 요로선인과 당명은 귀를 기울였다. 말이 끝났을 때 당명은 침묵을 지켰지만 요로선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좁혔다.
“콜록, 콜록! 대공자,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들으신 대로.”
“듣긴 했지. 콜록, 콜록! 하지만 왜 그래야 하나?”
요로선인은 어이가 없었다.
대공자가 금번 촉산의 결전에서 자신을 제외시킨 것이다. 결코 고맙다거나 다행이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생각조차 못 한 일이라 몹시 언짢아졌다.
“콜록, 콜록, 콜록, 크으으으윽, 콜록!”
요로는 불만을 거친 기침으로 대신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의 경지도 현경.
비록 현경 초기인 예에 불과하다지만, 백혼곡의 마두는 아직 넷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중 하나라면 자신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한데 빠져 있으라니,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콜록, 콜록……. 자네 날 무시하는 건가?”
요로가 눈을 매섭게 빛냈다.
“네.”
“크에에엑, 콜록, 콜록! 커어어어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요로가 당황해 사래가 걸렸다.
네, 라니!
요로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반발했다.
“콜록, 콜록. 자네 정녕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무림맹주네. 그런 내가 왜 자네의 지시를 들어야 하지?”
“아하, 무림맹주?”
후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같잖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대단한 무림맹주께서 그동안 뭘 했습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여태 선인께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걸로 압니다만.”
“…………………….”
넌 그동안 뭐했냐는 말.
백번 맞는 말이어서 요로의 말문은 콱 막혔다.
그렇다.
대공자가 다했다. 백혼곡의 실체를 파악한 것도, 청성과 아미, 사천당가를 구한 것도.
하지만 보통은 겸손을 보이지 않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치적을 드러낸다고?
이런 사람이었다고?
의미야 모를까.
그 마음을 모를까.
대공자의 걱정하는 마음이 보인다.
거만함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진심은 전해진다.
그래도 그렇지!
“끄응.”
요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지나온 길이 증명. 신검의 회수며, 지금 사천에 불어닥친 혈겁까지 대공자의 손길이 닿으며 무마되고 있다. 이쯤 되면 대공자가 무림맹주라 불려도 될 만한 행적.
“콜록, 콜록…… 자넨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그래, 좋네. 얌전히 구경해주지. 하지만 궁금해지는군. 콜록, 콜록…… 이제 어떻게 할 참인가?”
상대는 넷, 우리는 둘.
요로는 승산이 있느냐 물었다.
“승산은 없습니다.”
“응?”
요로의 눈이 커졌다.
콜록임도 잊고 바라보는 오래된 친구의 모습에 후공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놈들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만난다고?”
“네, 행운을 빌어주십시오.”
**
저녁이 되었다.
내내 좌정하던 후공은 운기를 거둬들였다.
미리 준비해둔 흑의를 걸치고 밖으로 나서려니 하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괜찮겠나?”
어느샌가 눈앞에서 당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라 후공은 하마터면 손을 들어 어깨를 두드릴 뻔했다.
손을 들어올린 김에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받았다.
“무섭습니다.”
“하하하!”
당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젊은 친구는 여유를 이렇게 드러낸다.
볼수록 묘하고, 대할수록 친근하게 느껴지니 왜 그런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무리하지 말게. 셋이 아니라 넷이어도 괜찮으니.”
이미 들었다.
대공자는 넷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혼곡 마두들의 숫자를 줄이려 한다. 놈들에게 다가가 스며들어 마두 중 하나의 목을 따려 한다.
아미파가 버티는 바람에 원래 계획이 틀어졌다.
원래라면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 최선. 하지만 이제 놈들은 따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찾아가야 한다.
상대의 허를 찌른다.
대형의 방식, 우리의 방식.
그렇기에 당명은 지금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지만, 마음에 든다하여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건지는 끝내 말하지 않을 참인가?”
“정해진 건 없습니다. 그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대응할 뿐.”
“최고의 전략은…….”
“줄행랑.”
“하하하하하!”
말이 이렇게 잘 통하면 어쩌자는 건가.
당명은 다시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속에 걱정을 떨쳐냈다.
웃음 속에 간절히 행운을 빌었다.
그런 당명을 뒤로하고 후공은 신형을 날렸다.
그 모습을 천공단이 지붕 위에서 눈길로 배웅했다.
금적자와 항마삼협, 무산쌍웅이 단주의 무사귀환을 염원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었다.
낭인왕은 훌쩍 신형을 날려 따라붙었다.
후공이 시선을 앞으로 둔 채 물었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아직 촉산의 서쪽 촉령현. 대운루입니다.”
하오문의 시선 속에 백혼곡 네 마두의 위치는 수시로 천공단에 보고 되고 있었다.
후공이 혀를 찼다.
“쯧쯧, 결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술타령이라니. 성의가 없는 놈들이로군.”
“흐흐흐…….”
낭인왕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런 낭인왕을 후공이 흘겨봤다.
“웃음이 나와?”
“…….”
낭인왕이 웃음을 뚝 그치고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웃으면 죽어.”
“…….”
“또 쪼개면 쪼개버릴 거야.”
“……네.”
낭인왕이 목을 움츠렸다.
형님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건 징조.
낭인왕은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고 있었기에 스멀스멀 두려움이 피어났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한순간,
검령과 번쾌가 검집째로 분리되었다.
촤르륵!
세 자루 신검은 자줏빛 광채를 검집 안에서 드리운 채 주인의 몸을 한 바퀴 선회하고는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땅을 휘저어가며 지하를 관통해가며 주인을 뒤따랐다.
머문 건 소맷자락에 있는 친뿐.
그와 동시에,
우드드드드드득.
교릉을 시전한 후공의 몸이 흉측하게 변해갔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 형태도 달라졌으며 눈도 틀어졌다. 등은 이미 볼록해져 곱추의 모습이 되어 눈을 희번덕거렸다.
‘화공신타.’
낭인왕이 곁눈질로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처음 본 것이 아님에도 이런 형님의 모습은 적응이 안 되는 것이다. 북교산에서 성숙노괴를 줘패던 모습도 생생히 떠올랐다.
“내 모습 어떠냐?”
“머, 멋지십니다.”
“무서운 게 아니고?”
“어…… 무, 무섭습니다.”
“그래도 여자들이 나 좋아해.”
“그, 그런가요?”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죄, 죄송합니다.”
삐질.
낭인왕이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 형님의 이 공법은 뭘까?
모습이 바뀌면 성격도 바뀌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녕 아예 딴 사람 같으니 낭인왕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나만 보면 여자들이 줄 서! 줄 서면서 새치기하면 죽여버린다고 막 싸워!”
“맞습니다! 여자들이 좋아 죽습니다!”
“너는 어떠냐?”
“네?”
“여자들이 너 좋아하냐고?”
“……그다지.”
“그렇게 생겨서 그런 거다.”
“네, 제가 못생겨서 그렇습니다.”
“힘내라.”
“……네.”
“너 이 새끼, 대답이 왜 그 모양이야?”
“네! 힘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힘내는 거야. 남자는 자신감이야.”
“네!”
“힘내서 오늘 죽는 거야. 알겠지?”
“맡겨주십시오. 장렬히 죽겠습니다!”
“흐흐흐, 귀여운 새끼.”
“…….”
낭인왕은 울상이 되었다.
오늘 누가 죽을 것이냐는 형님의 말에,
왜 자신이 호기롭게 나선 것인지 낭인왕은 벌써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시발, 얌전히 있을걸.’
추억 속 화공신타는 웃겼는데,
그건 추억의 보정이었다.
다시 보니 너무 무서웠다.
‘많이 아프겠지?’
***
같은 술이라도 맛은 늘 다르다.
어느 날은 쓰고, 어느 날은 달다.
하루의 길이도 같지 않다.
어느 날은 길고, 어느 날은 짧다.
삼백 년 전 마교교주.
신륜염제에게는 모두 전자였다.
술은 쓰기만 하고, 하루는 길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이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
놈이 판을 휘어잡고 있다. 놈이 쥐고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따라가고 있는 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술은 쓰고, 시간은 더디게 흐를 뿐이었다.
약속된 날짜.
만나게 될 장소.
모두 놈이 정했다.
당장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술을 마실수록 언짢음은 커져만 갔다.
놈이 마인이란 점도 언짢다.
잔혹한 놈이라 난해하다.
마인은 정에 얽매이지 않으니 약점을 찾기 쉽지 않고, 제멋대로라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며 따라온 건 현 시대의 마교.
도대체 이 시대의 마교는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놈이 교주로 앉아 있기에 스무 살 애송이가 강호를 뒤흔드는 것을 방관하고 있는 것인가.
삼백 년 전이라면…….
자신이 마교 교주로 있는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더뎌…….’
그건 함께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령신마, 권황신마, 독마군도 그저 말없이 술잔을 비울 따름이었다.
침묵 속에 여러 의문들이 술잔에 넘실거렸다.
놈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다 강호의 별이라 불리던 천화서고 대공자가 마화(魔化)한 것인가.
놈은 과연 촉산의 일별봉에 나타날까?
그때였다.
콰앙!
멀리서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고함소리도 터져나왔다.
“말을 안 해!”
“사, 살려주십시오.”
“이 새끼야,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저, 정말 모릅니다.”
흔한 강호의 소란.
신륜염제는 피식 웃고 술잔을 채웠다.
하지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진 못했다.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천화서고의 애송이가 사천 바닥을 미쳐 날뛰고 있는데 모른다고?”
천화서고 대공자?
놈이 언급되면 술잔을 가져갈 순 없는 일.
이미 권황신마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주군, 제가…….”
권황신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신륜염제가 손을 들어 제지한 탓이었다.
“아니, 모두 함께 간다.”
이미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을 잃었다.
따로 움직인 대가였다. 놈의 무위를 정확히 모르니, 이제는 함께 움직여야 한다.
들려온 대화 내용만으론 누군가 천화서고 대공자를 찾는 것이나, 이것조차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주루의 별실에서 빠져나와 신형을 날렸다.
도착해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흉악한 곱추가 중년 도객을 거의 반죽여놓고 있었다.
쿠쾅!
“으아아아아아악!”
하나의 객잔이 얼마나 험악하게 집어던졌는지 벽이며 천장이며 거의 다 부서져 형체가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사람들이며 행인들이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는 상황에서도 살벌한 폭행은 이어져만 갔다.
“이 새끼야, 말해! 천화서고 놈 어딨어?”
던져졌다가 다시 멱살이 잡힌 중년 도객이 피를 게워내며 힙겹게 입을 열었다.
“모, 모릅니다. 믿어주십시오.”
“정말이야?”
“저, 정말입니다. 제,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럼 죽어.”
“어어어…… 제발 살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우드득.
곱추가 목을 돌려버린 순간, 중년 도객이 축 처졌다.
곱추가 도객을 내팽개치고는 몸을 돌려 눈을 희번덕거렸다.
“뭘 봐, 이 새끼들아! 눈 안 깔아!”
사람들이 겁에 질려 주춤 물러났다.
그 모습에 곱추가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귀여운 새끼들.”
그러다 한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신륜염제와 눈을 마주친 다음이었고, 그 곁에 선 권황신마와 유령마군, 독마군까지 보고는 뒷걸음질쳤다.
“네, 네놈들 뭐야?”
“너는 누구지?”
신륜염제가 되물었다.
“난 화공신타. 유명해.”
“유명할 것 같군.”
“무슨 뜻이야? 살짝 기분 나쁜데?”
곱추가 미간을 찡그렸기에 신륜염제가 피식 웃었다.
“내가 술 한잔 사고 싶은데, 어떠냐?”
“술을 사준다고?”
“그래.”
“왜?”
“네가 마음에 든다.”
“난 네놈이 마음에 안 드는데?”
“마음에 들 거다.”
“왜?”
“우리도 너와 같은 사람을 찾고 있거든.”
적의 적은 아군.
곱추의 경지가 현경에 이른 걸 알아보았기에 신륜염제는 관심이 갔다.
하지만 곱추는 잠시 망설였다.
후공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