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안착.
신륜염제가 미소를 머금었다.
곱추, 화공신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주춤 물러서며 불신과 두려움을 보이면서도 화공신타의 눈동자만큼은 극도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빛이요, 혹여 이 만남이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도주하려는 모습이어서 신륜염제는 도리어 신뢰가 갔다.
“네놈들도 천화서고 놈을?”
화공신타가 물어왔다.
아직 경계하는 눈빛은 여전했다.
신륜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 믿으라고? 우연치곤 좀 웃긴데? 안 그러냐?”
“소란을 피워 우릴 불러낸 건 너다만.”
“시발, 그럼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
“후후후.”
“그렇게 할 거지?”
“그럴 순 없다.”
“왜?”
“둘을 잃었거든.”
“응?”
화공신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물었다.
“너희 수준의 둘을? 놈이 그 정도였다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너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화공신타는 잠시 고민했다.
제법 심각한 낯빛이 되어 ‘그럴 리 없는데, 놈의 수준이 그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라고 연신 중얼거렸다.
신륜염제는 기다려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니 애초에 현경에 이른 자가 바보일 수 없다. 그러니 곧 생각은 정리될 것이다. 혼자 힘으로는 벅차다는 생각에 이를 것이다.
짐작대로였다.
화공신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술 시켜도 되지?”
“후후, 물론.”
화공신타가 다가갔다.
하지만 조심성은 여전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멈췄다.
“가자. 어디로 갈까. 내가 아는 곳이…….”
“가기 전에.”
신륜염제는 말을 끊었다.
어느샌가 시선은 무너진 전각 안 도객의 시체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눈길만으로 권황신마가 움직였다.
의미는 하나.
시체를 확인한다.
공교로움에 대한 의심이라면 자신들이 더 컸다.
여기에 온 건 불러내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삼백 년 만에 나와 맞이한 이 시대의 강호는 생각보다 훨씬 혼란한 느낌이어서 그들로서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저벅저벅 다가가니,
‘시발…….’
낭인왕이 식겁했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상식적으로 목이 돌아갔으면 그냥 죽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개새끼야, 제발 그만 오라고. 살려줘!’
“야, 너 거기 멈춰!”
목소리를 낸 건 화공신타였다.
권황신마가 돌아봤다.
“왜 그러지?”
“나 의심하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시발, 난 전혀 좋지 않아! 확인하지 마.”
“왜? 살아있기라도 한 건가?”
권황신마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건 신륜염제며 독마군, 유령신마도 마찬가지였다.
암암리에 기운을 응집하며, 화공신타가 섣부른 동작만 보이거나 손가락만 까닥해도 곧바로 전력을 다해 대응할 태세를 갖췄다.
살벌해진 분위기에 화공신타가 주눅 들었다.
“그건 아닌데……. 그냥…… 기분 나빠서 그래.”
“후훗.”
권황신마가 코웃음 치고 시체를 확인했다.
목덜미에 손을 가져가 맥을 짚었다. 몸은 엎어져 있는데도 모가지가 돌아가 얼굴이 보이는 상황.
‘제발…… 제발……. 나무관세음보살, 무량수불,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신령님들이시여…… 들키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요!’
목이 만져지는 촉감에 낭인왕이 온갖 곳에 기도를 올렸다.
모든 신의 가호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물론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믿음은 있었다.
강제로 형님에게 귀식대법을 당한 상황.
놈들이 확인할 것이란 점은 이미 형님의 예상 범주.
형님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형님에게 처맞으면서 체온은 차갑게 식어갔고, 피의 흐름은 멈췄다. 심장의 박동도 멈췄다.
형님에게 맞을 때마다 놀랍게도 귀식대법이 차츰 진행되었다. 스스로 펼치는 귀식대법보다 더 정교했고, 깊었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을 미리 듣긴 했어도 실제로 이뤄지니 경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서워…….’
확인하는 상대의 경지도 현경.
화경과는 다른 차원. 아득하여 닿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자의 확인이었기에 안 그래도 차가워진 피는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흐음…….”
권왕신마의 손길이 거둬졌다.
하지만 옮겨졌을 뿐이었다.
이내 정수리에 닿았다.
권황신마는 기운을 흘려보내 심장을 자극했다.
귀식대법을 깨뜨리는 공법.
자극된 심장이 쿠쾅 움직이며 박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심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권왕신마가 고개를 끄덕였고, 낭인왕은 내심 안도하는 한편 경탄했다.
‘안심해라. 아무 일 없을 테니.’
모가지를 돌려버리던 순간 들려왔던 형님의 전음.
다정한 목소리.
그 말대로였다.
스스로 귀식대법을 펼쳤다면 심장 자극에 이미 눈을 부릅떴을 것이다.
목이 돌아갈 때도 세 곳의 혈도가 점혈되었고 놀랍게도 죽지 않았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의심했습니다. 존경합니다. 형님은 위대하십니다!’
화공신타의 모습이어도 멋진 형님!
언제까지나 나의 형님!
낭인왕이 그렇게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낼 때였다.
“시발, 아예 한 번 더 확인 사살하지 그러냐? 지풍을 쏘고, 심장을 뽑아버려!”
화공신타의 목소리였기에,
‘형님~~~~~.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아아~~~~~~~.’
낭인왕이 내심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도발은 옳았다.
그 말이 한 번 더 죽일까 하던 권황신마를 멈춰 세웠다.
권황신마는 피식 웃고는 일행 곁으로 다가왔다.
기다린 건 화공신타의 폭언이었고,
“시발놈아, 이제 속이 시원하냐!”
“후후후.”
권황신마는 웃음을 흘렸다.
확인은 언제나 옳다.
의심은 안개가 흩어지듯 흩어졌다.
다섯이 일행이 되어 그곳에서 멀어졌다.
그럼에도 낭인왕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다. 그리고 어떤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일.
‘새벽까진 죽은 척해야겠지?’
***
옮긴 장소는 태연루.
삼 층으로 올라갔고, 아직 손님들이 많았다.
네 마두는 별실로 가고 싶었지만, 화공신타가 반대했다.
“싫어!”
게다가 삼층 자리에서도 창가.
그중에서도 화공신타는 창가를 등지고 앉았다.
그런 사사로움이 신뢰를 더해주었다.
아직 경계하고 있는 점. 그리고 도주가 용이한 자리를 선택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고급술과 비싼 요리가 줄지어 나왔다.
술잔이 오가는 가운데 화공신타가 입을 열었다.
“너희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
신륜염제를 비롯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화공신타가 클클거렸다.
“반로환동 말이야.”
네 마두는 각각 자신을 내려다보았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누구 할 것 없이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이 모습이 된 지 오래지만 늘 잊는다.
마음의 세월만큼은 사백 년을 지나온 것이다.
“너희 원래 누구였어?”
“넌 들어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독마군이 답했다.
그 말이 욕을 불러왔다.
“시발놈아, 내가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말해 봐. 난 이야기했잖아. 화공신타라고!”
“욕하지 마라.”
“그니까 이야기해 봐.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오래전 사람. 아주 옛날 사람.”
“얼마나?”
“이백 년 전.”
“와우!”
삼백 년에서 백 년을 줄였지만, 화공신타가 감탄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반로환동하는 거 나도 알려주면 안 되냐? 원래 반동환동은 주화입마의 한 갈래잖아. 한데 너희 넷이 다 반로환동한 걸 보면 따로 방법을 찾았다는 말이잖아.”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해 말해봐라.”
“아, 맞다. 우리 그 새끼 이야기하러 왔지? 내가 놈과 처음 얽힌 건 공청석유 때문이었어.”
“공청석유?”
“말도 마라. 그때 난리도 아니었어. 강호칠괴 중에 성숙노괴라고 있거든. 뭐 그렇게 대단한 놈은 아니야. 화경에서 깔짝대는 놈이라서 내 발톱 때만도 못한 놈이지. 그놈이 공청석유의 위치가 적힌 지도를 갖고 있다는 말에 내가 놈을 잡았어! 온 강호가 다 놈을 잡으러 다니는데 내가 잡은 거야! 근데 이놈이 말을 안 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반 죽여놔야지.”
“그게 문제였어. 반 죽여놓는다는 게 그만 죽여버린 거야.”
“…….”
“그래서 생각했지. 이건 분명 지도를 삼킨 거다. 배를 갈라야겠다.”
“…….”
“배를 갈랐지. 창자 막 꺼내고 뒤져봤는데 없는 거야.”
“……………….”
신륜염제를 비롯한 모두가 멍해졌다.
화공신타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다 살펴도 없어. 창자를 뒤져도 안 나와. 안 나올 수밖에 없었어. 나중에 알았지. 천화서고 놈이 공청석유를 이미 빼돌렸단 걸 말야. 그때부터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쫓고 있어! 그게 반년 전이야.”
“그렇게 된 건가.”
신륜염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무위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공청석유를 취했다면 충분히 납득된다.
“놈의 또 다른 행적은?”
“나만 계속 이야기해? 목 아파.”
“후후후.”
신륜염제는 웃고 말았다.
현경에 이른 고수가 목이 아플 리 없지 않은가.
재밌는 놈이었다.
흉측한 외모도 계속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된다.
“이야기해 주지. 놈은 마화했다.”
“어, 나도 듣긴 했어. 완전히 미쳐 날뛰면서 사천을 쓸어버리겠다며 싸돌아다닌다고 말이야.”
“그 와중에 당했다.”
“둘?”
“그래.”
그렇게 신륜염제가 아미파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많은 것이 생략되고 변조되었지만, 어떤 형태의 무공에 당했고, 어떤 인사말이 남겨졌는지에 관한 건 사실대로 들려주었다.
“흐흐흐, 안녕? 우와아, 완전히 돌아버렸네!”
“그런 셈이지.”
“둘의 경지는?”
“각각 현경의 중과 예.”
“허허헉!”
화공신타가 기괴하게 놀라며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우리 함께 다니자.”
“후후, 생각해보지.”
“내가 싫어?”
“후후, 잔이 비었군.”
그러면서 신륜마제가 독마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 놈을 죽여라.
- 네.
- 독으로.
독마군은 의미를 이해했다.
이건 시험이다.
최종 관문과 같다.
현경 초기의 경지인 예라면 자신의 독을 버틸 수 없다. 살아남으려면 그 이상이어야 한다. 현경 초기의 경지라면 함께 할 가치가 없다는 뜻. 현경 중기 이상의 존재여야만 쓸모가 있다.
삼백 년 전 독왕으로 불린 독마군이 술병을 들었다.
잔에 술을 채우며 하독했다.
독의 이름은 예파(銳波).
천여종의 독을 배합해 만든 날카로운 독의 물결.
무색무취한 그 물결이 흘러들어가면 삶의 마지막 숨결은 다섯 번의 호흡뿐.
“들지.”
모두가 잔을 채웠다.
신륜염제가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일제히 술을 털어 넘겼다.
“캬하아아! 술맛 좋고요!”
화공신타가 탄성을 토해냈다.
이제 남은 호흡은 고작 다섯 번.
죽느냐, 사느냐.
모두의 시선은 화공신타를 주시했다.
탁.
화공신타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안주를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렇게 다섯 번의 호흡이 지났을 때,
화공신타가 살기 어린 눈으로 모두를 쓸어 담듯 바라봤다.
“너희.”
“…….”
“이번 한 번뿐이야. 다시 수작 부리면…….”
화공신타의 시선이 옮겨져 독마군에게 고정되었다.
“죽어.”
숨 막히는 기세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하하하하하하하!”
신륜염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권황신마와 유령마군, 독마군도 기세를 풀었다.
마제가 웃는다.
그 의미는 하나.
화공신타는 시험을 통과했다.
삼백 년 전 독왕의 독을 해소해내면서 현경의 중에 이르렀음을 증명했고, 동시에 이번 한 번뿐이라는 말로 배포도 보였다.
그렇기에 뒤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이런 자라면 천화서고 대공자를 상대함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화공신타를 죽이는 건 그 뒤.
화공신타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그것도 잠시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거렸다.
“젠장, 날 시험한 거였어?”
“그래. 이제 함께 움직이도록 하자.”
“좋아.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디에 있지?”
“이틀 뒤. 촉산의 일별봉.”
“오호!”
화공신타,
아니 천화서고 대공자가 탄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