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이제 셋.
술자리는 둘 중 하나다.
패배의 술자리, 혹은 승리의 술자리.
어떤 이들은 한탄하고 원망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또 어떤 이들의 술잔에는 유쾌함과 밝은 전망이 오간다.
누군가는 더러운 기분을 떨치려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즐거워서, 즐거움을 더하려 술을 마신다.
나는?
우리는?
그동안은?
신륜염제는 떠올려봤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언제나 패배의 술자리.
백혼곡 안에서도 술은 있었다.
술을 빚어 마셨다. 늘 우중충했다.
복수를 다짐하는 시간, 그러다 부질없어 절망했고, 좌절하며 흐느끼기도 했다.
삼백 년 동안 언제나 패배자의 술잔.
오랜 세월 보내온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백혼곡을 나온 후에도 유쾌함 따윈 없었는데.
이 밤은 승리의 술자리가 된 것만 같다.
화공신타 때문이었다.
“하하하! 내가 놈에게 말했지. 정지! 어떻게 됐을 것 같냐?”
끝도 없이 들려주는 강호의 무용담.
꼽추에 못생긴 얼굴, 험악하기까지 한 주제에 유쾌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이놈은 좌절을 겪어본 적이 없는 걸까?
이놈은 우울함 따윈 모르는 걸까?
그런 의문 속에서,
물들어간다.
기괴한 분위기와 말투에 담긴 묘한 운율에 끌려가듯 피식피식 웃게 된다.
이야기 하는 것마다 누굴 어떻게 죽였다는 내용뿐인데도 신기하게도 꽤나 흥겨워서, 나중에라도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죽여야겠지.’
아직 세상에 대한 적응이 안 된 탓일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처리하고, 이어 청성과 사천당가, 아미파를 피바다로 만들고 나면 백혼곡만으로도, 우리들만으로도 승리의 술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죽음, 죽음, 죽음.
그것만 생각하자.
그런 마음은 화공신타도 같았다.
후공도 마찬가지였다.
‘누굴 죽일까?’
죽음, 죽음, 죽음.
웃음 아래 죽음을 떠올렸다.
백혼곡보다 더했다. 후공은 나중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하나를 보내고 싶어 했다.
유쾌하게 떠드는 와중, 백혼곡의 서열 파악은 끝냈다.
후공은 입으로는 떠벌리며 신륜염제 쪽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우두머리.
경지를 가늠할 수 없다.
다른 셋의 경지는 엇비슷하다.
최소 현경의 중.
이 중 하나는 우두머리의 직계 수하.
언행이 말해준다.
후공의 시선은 권황신마 쪽을 바라봤다.
나머지 둘도 최소 현경의 중이다.
후공의 시선은 먼저 독마군 쪽으로 향했다.
‘독공을 펼친 놈은 당명이 처리하도록 두자.’
좋은 승부가 될 것이다.
그럼 남은 건 하나.
후공은 끝으로 유령신마 쪽을 바라봤다.
눈 밑이 거뭇하고 음침한 인상.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이나 술자리가 이어지면서 많이 풀어졌다. 제법 호응도 좋아 간간히 웃음도 터뜨리는 모습이라서…….
죽이기 좋다.
‘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현경의 고수를 암살하는 건 난해하다.
기회가 올 수도 있고, 기회에 아예 닿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후공은 무용담을 멈췄다.
이젠 잘난 척을 할 시간.
“내가 이야기했던가? 여자들이 나 좋아한다고?”
“후후, 개소리는.”
바로 유령신마가 코웃음쳤다.
독마군이 뒤를 이었다.
“그 얼굴로? 거울은 평생 안 보고 사는 거냐?”
그건 당연하게도 분노를 불러왔다.
후공이 흉악한 얼굴을 더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노려봤다.
“시발놈이 말하는 것 좀 보소!”
“하하, 거울 갖다 줘?”
“필요없어. 내가 거울은 없어도 호수만 나오면 비춰 보는데, 그때마다 멋있어서 얼마나 깜짝 놀라는 줄 알아!”
“미친…….”
“진짜라니까. 여자들이 나만 보면 줄 선다고오오오!”
“그렇다치자.”
“이것들이 사람 말을 못 믿네. 좋다. 내가 오늘 보여준다.”
씩씩대며 앞에 놓인 쇳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유령신마가 갸웃했다.
“젓가락은 왜?”
“젓가락이 아니라 꽃이다.”
그러면서 화공신타가 등 뒤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당연히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같잖을 뿐이라 아래쪽을 내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줄을 서?
줄을 선다면 도망가는 행렬이겠지.
- 그냥 미친 새낀가.
- 그럴지도.
독마군과 유령신마 사이에 그런 전음이 오갔고,
- 주군, 조금 수상합니다.
- 어떤 점에서?
- 놈이 스스로 지나치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려 하는 점이 걸립니다.
권황신마가 의심했다.
살육의 무용담이야 유쾌했지만, 여자들이 좋아한다 어쩐다는 애초에 말이 안되는 소리인 것이다.
왜 스스로 망가지려 하는가.
왜 웃음을 유발하려 애쓰는가.
결과야 불을 보듯 뻔하다.
거리를 지나는 여인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날 것이고, 화공신타는 시무룩한 얼굴로 들어설 것이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
이딴 말이나 풀죽은 목소리로 내뱉을 것이다.
- 지켜보자.
신륜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이 너스레가 심하면, 허점을 유달리 드러내려 하면 숨겨진 심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촉산에 가기 전 처리해야 할지도.
하지만 아니다.
허점이 아니고, 너스레도 아니다.
그저 진실.
주루 앞.
후공은 천향사주를 운용했다.
밤은 깊었지만 아직 자정이 되려면 멀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고 있었고, 그중에는 여인도 있었다. 또한 주변 주루와 반점, 객잔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의식을 확장해 분류, 그 중에서 젊은 여인들만을 포착했다.
그들을 향해 삼악의 혼향을 날렸다.
거의 칠십여 개의 향선(香線)이 주변 각지로 퍼져나갔다.
삼악의 혼향이자, 천향 중 가장 매혹적인 향.
누구라도 매료될 수 밖에 없다.
‘응?’
‘어?’
‘뭐, 뭐지?’
‘이 향은?’
여인들이 반응했다.
처음 맡아본 향이었고 신비로운 향이었다.
강렬하게 파고들었다가 서서히 옅어지려 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누구는 주루에서, 누구는 반점에서, 누군가는 걷다가 멈춰 돌아봤다.
강렬하게 파고들었다가 이내 옅어지려 하자 여인들이 향을 따라 움직였다. 의식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끌렸다.
이 향을 맡고 싶어.
이 향에 더 머물고 싶어.
계속, 언제까지나.
이런 의식,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기들이 엄마의 냄새만으로 미소짓듯,
여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누구도 자신이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로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그런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백혼곡이 아니었다.
유령신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고, 그 곁의 독마군도 아래쪽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눈이 커졌다.
‘무, 무슨.’
‘어째서……?’
이미 스무 명이 넘는 여인들이 화공신타를 둘러싸고 있었고, 다가오는 여인들은 더 많았다.
화공신타가 말한 대로였다.
그야말로 여인들이 줄을 서고 있는 광경.
놀라운 광경은 이어졌다.
여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미소를 머금고 꿈을 꾸는 눈빛이 되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군요.”
“당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요.”
“그대는 누구인가요? 어디에서 왔나요?”
‘허헐!’
‘말도 안 돼! 섭혼인가?’
독마군과 유령신마는 넋이 나가버렸다.
대체 뭐가 멋지단 말인가?
뭔 갑자기 좋은 냄새가 난단 말인가?
그래서 섭혼을 떠올렸지만 그렇다기엔 화공신타는 그저 아래쪽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다.
여인들이 주루에서 반점에서 쏟아져나와 화공신타에게 몰려오고 있을 뿐. 그쯤엔 권황신마까지 내려다보며 멍해지고 말았다.
“다들 싸우지 말고 줄을 서시오!”
화공신타가 오만상을 쓰며 줄을 서라는 말까지 하는데도 여인들은 생글생글이었다.
화공신타가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거렸다.
“쯧쯧, 이래서 골치가 아프다니까. 어딜 가나 이 모양이니. 자, 나는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 사람이라, 선물만 주고 가겠다.”
“무슨 선물인가요?”
“두 송이 꽃.”
“꽃은 당신인데요?”
“하하하, 그건 틀림없지.”
화통하게 웃은 화공신타는 이내 들고 있던 쇠젓가락을 구기고 펼치고 접어갔다. 이윽고 두 개의 쇠젓가락은 두 송이 꽃이 되었다.
꽃은 두 여인에게 돌아갔다.
꽃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 아쉬워했지만 화공신타는 손을 내저었다.
“자, 이제 돌아가! 잘 자야 더 예뻐지지!”
“호호호호!”
“하하하하하!”
여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웃음을 끝맺기도 전, 그녀들은 눈앞에 있는 멋진 남자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걸 알아차리곤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남자가 사라지면서 향은 옅어져갔기에 여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벗어났다.
멋진 밤이었어!
언제 다시 그 남자의 향을 맡을 수 있을까.
언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그런 중얼거림.
듣기 싫어도 듣게 된 백혼곡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계단을 통해 걸어온 화공신타가 의기양양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다들 똑똑히 봤지?”
“허허…….”
독마군이 너털거렸다.
화공신타가 거만한 표정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거만해도 문제가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남자는 외모야. 다른 것 다 필요 없어!”
“허허허…….”
독마군이 다시금 너털거렸지만, 유령신마의 반응은 더 컸다. 유령신마는 얼굴에 감탄을 숨기지 않고 정녕 탄복했다는 듯 손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신타, 그대의 어떤 무공보다 놀랍군.”
하지만 그 순간,
화공신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응?”
“시발, 왜 내 몸에 손을 대냐고!”
유령신마가 피식 웃었다.
“너무 예민하군. 내가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봐?”
“솔직히 몸에 손대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래, 안 그래!”
“후후, 누가 보면 혈도라도 건드린 줄 알겠군.”
“그게 아니라도 손이 몸에 닿는 건 상식에 어긋나잖아. 우리가 그렇게 친하냐!”
무슨 뜻인지 모를 유령신마가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가 맞다.
강호의 암수는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작은 손짓, 작은 몸짓마다 의미가 없는 건 없다.
특히 현경에 이른 고수라면 더욱 더.
실수의 원인이라면 그저 방금 본 광경.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실제로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화공신타의 모습에 탄복한 나머지 손이 나간 터.
그건 지켜보는 모두가 공감했다.
거들거나 끼어들지 않고 방관자의 자세를 취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유령신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내가 사과하지.”
화공신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하니 고개를 쳐들고 유령신마를 매섭게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진지한 것 좀 봐! 당연히 장난이지. 뭐 그런 걸로 또 사과를 해! 으하하하하하하하하!”
이 친구 재밌네.
건드리는 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말하며 화공신타가 유령신마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일곱 군데.
어느 곳도 의미를 지닌 혈도 부위가 아니다.
유령신마는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교릉이 이루어지는 일곱 부위.
교릉은 은외법으로 잠복되었다.
남은 건 넷이 아니다.
이제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