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89화 (289/460)

289화. 나에게 남은 형님은 한 사람 뿐.

술자리는 조금 더 이어졌다.

목소리가 컸다.

다 같이 떠든 건 아니었다.

대부분 화공신타가 떠들었고, 백혼곡의 마두들은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매력은 첫째도 외모고 둘째도 외모, 셋째도 외모야! 하하하, 당연히 농담이고. 실은 그보다는 자신감이지. 남자가 자신감을 뿜어내면 어떤 냄새가 나는 줄 아냐? 너흰 모르지? 모르는 게 당연해. 하지만 말씀이야, 여자들은 기막히게 그 냄새를 알아본다는 거야. 그냥 줄줄줄 이끌리지.”

세상 누구보다 흉악스러운 놈이 ‘매력적인 남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다들 본 것이다.

여인들의 선망에 찬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진정한 열망이었고, 사랑에 빠진 눈빛들.

그래서일까.

백혼곡은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화공신타가 괜찮아 보이는 건가.

어째서 잘생겨 보이는 것인가.

이 흉측한 외모의 곱추에게 호감을 갖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어이가 없었다.

함께 다녀도 괜찮을지도.

죽이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천화서고 대공자를 죽인 다음, 화공신타와 함께 청성과 사천당가, 아미파를 피바다로 만들어도 좋을지도…….

그런 생각이 싹 터 어이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도 달라졌다.

길게만 느껴지던, 더디게만 흐르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자정이 방금 전이었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

화공신타의 웃음소리와 함께 주루의 창 너머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

그 아침 어느 야산에선,

푸욱.

땅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왔다.

뒤이어 머리가 삐죽 나왔다.

낭인왕이었다.

머리만 내민 채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투덜대며 기어나왔다.

“뭐 이렇게 자주 묻히냐.”

벌써 두 번째다.

원래 사람은 한 번 묻히는 것 아닌가?

처음에야 형님에게 깝쳤다가 묻혔으니 할 말이 없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마을 장정들이 시체 어떻게 하냐며 의논하다 이곳에 묻어버렸다.

‘쯧쯧, 부지런하기도 하지.’

투덜댔지만 지금은 자신도 부지런해져야 할 때.

이제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낭인왕은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

.

.

.

그리고 마주했다.

당명이 낭인왕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갸웃했다.

“누구에게 맞은 거냐?”

“네, 신입님. 형님에게 맞았습니다.”

“천공단주?”

“네, 형님은 가끔 사람을 팹니다.”

“허허…….”

당명이 너털거렸다.

이유가 없겠는가. 의미가 없겠는가.

백혼곡과의 일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거늘.

“고약한 자로군. 어쨌든 들어보자.”

“저기, 신입님?”

“왜?”

“고약한 자라뇨?”

낭인왕의 눈빛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당명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눈을 이상하게 뜨네?”

“형님께 예의를 지키십시오! 고약한 자가 뭡니까, 고약한 자가! 형님이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듣는 저는 거북합니다.”

“허허…….”

당명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말 한마디였다. 이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물론 이해는 된다.

그만큼 각별한 마음이란 것이겠지. 그만큼 천공단주에 대한 충심이 깊다는 뜻이겠지. 이해는 된다만, 자신 앞에서 눈알을 부라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막힐 따름이었다.

낭인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가주가 현경의 고수라도 상관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호칭도 그렇습니다. 형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거 솔직히 파격입니다. 여태 형님이 그런 그런 요구를 누구에게 한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존경의 눈빛을 띠고 그렇게 하겠다고 형님이라고 부르는…… 케엑!”

낭인왕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언제 어떻게 다가온 건지 보지도 못했는데 당가주의 손이 목을 조르고 있으면 켁켁거릴 수밖에 없었다.

“낭인왕, 다시 지껄여봐라.”

당명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이기죽거렸다.

이놈은 대체 무슨 말을 떠드는 건가.

형님?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그 애송이에게?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형님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세 사람뿐이다.

대형.

풍제.

제갈 형님

그중 남은 이는 이제 한 사람.

풍제.

물론 천화서고 대공자가 대형과 유사한 점이 많긴 하다. 의아할 정도로. 하지만 대형일 리가 없지 않은가.

“신입님…….”

“듣고 있다.”

“형님은…… 고약한 자입니다. 살려주세요.”

“후후후!”

당명은 웃고 말았다.

낭인왕이 소녀처럼 살려달라 말하니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천공단 놈들 미워하기가 힘들다.

이윽고 낭인왕이 지난밤의 일을 설명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낭인왕은 말을 멈춰야 했다.

당가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다.

“왜……? 왜 또 그러십니까?”

“곱추? 화공신타?”

“네, 진짠데요? 거짓말 아닌데요?”

“대공자가 역용의 재주를 지녔나? 여러 모습이 되는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형님은 모습을 바꿔야 할 때면 매번 화공신타가 되십니다.”

“무명신타…….”

“네?”

낭인왕이 갸웃했다.

뭔 갑자기 무명신타인가.

화공신타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천화서고에서 한 글자를 따오고,

대공자에서 한 글자를 따와 붙인 이름이 뻔하거늘.

하지만 아니다.

예전에는 화공신타가 아니었다.

당명은 알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우리는 안다.

대형은 역용을 해야 할 때면, 악의 화신으로 위장할 때면 곱추가 되었다. 무명신타가 되었다.

뻔히 대형이란 걸 아는데도 인격이 달라진 것처럼 미치광이가 따로 없어 혼돈신타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대형은 무명신타라는 칭호가 더 좋다고 했다.

‘또다시…….’

대공자와 대형의 특성이 겹친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떻게 이렇게 유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대형의 신검을 다루고, 대형의 자줏빛 안광을 뿜어낸다.

사람을 묻어버리고, 누구보다 제갈혜를 각별히 아낀다.

“하나 묻자.”

“네.”

“대공자가 사람을 구겨버린 걸 본 적은?”

“어?”

“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흐에엑!”

낭인왕이 반문하다 소스라쳤다.

눈앞에서 갑자기 당가주의 안광이 폭주한 것이다. 금빛 광채를 분분히 뿜어내고 있었기에 낭인왕은 덜덜 떨었다.

무섭다.

너무 무서웠다.

안광만이 아니었다. 당가주의 얼굴이 쩍쩍 갈라지더니 조각조각 흩어지는 것이다.

아미파에서 당가주의 흩어지는 신법을 보긴 했어도, 눈앞에서 얼굴이 비산했다가 모였다가 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시, 신입님! 저, 정신 차리십시오! 그리고 살려주세요!”

바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당명의 이 격동이 어떤 의미인지 낭인왕이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분노가 아니다.

당명은 그저 전율하고 있을 뿐.

‘교릉.’

당명은 어렵지 않게 그 이름을 떠올렸다.

무명신타가 되기도 하고, 적을 우그러뜨리고 구겨버리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같을 수 있다고?

그럴 순 없다.

그래서였던가.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것인가.

이유도 없이, 맥락도 없었다.

대공자를 처음 본 순간 이 나이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형님…….”

“흑흑흑, 가주! 저는 가주의 형님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낭인왕은 미쳐버린 건가 싶어 울먹이며 소리쳤다.

당명의 중얼거림은 이어졌다.

“그런 것이었다고……?”

왜 대형이 그렇게 된 건가?

왜 그런 모습이 된 건가?

논리나 이치, 상식은 모르겠다.

아니, 당명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러자 최근 지나온 길이 새롭게 보였다.

풍제조차 다룰 수 없는 신검을 다루는 대공자.

자꾸만 형님이라고 부르라던 대공자의 미소.

그리고…….

제갈혜.

“아!”

혜의 말도 떠오른다.

혜가 대공자와 따로 만나 이야기하고 온 밤.

울었던 게 분명한 얼굴로 혜는 웃으며 춤췄다.

- 이제 대공자와는 영영 연인이 될 수 없어요.

대형이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 오늘 밤은 최고의 밤이에요.

- 대공자는 제가 좋대요. 너무 좋대요. 늘 제 곁에서 지켜주겠다고도 했어요.

그다음은,

- 숙부, 오늘 밤을 꼭 기억해요.

그 밤을 잊을 수 있을 리가.

‘그게 이 의미였다고……? 그 밤 혜가 알게 된 것이라고?’

그랬구나. 그래서 그 밤을 잊지 말라고 했던 것이로구나.

그래서 혜가 울고 웃었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당명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을 수 없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랬던 것이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모든 게 이해된다.

그리고 또 보인다.

대공자의 행동 하나 하나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된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미칠 듯이 웃음을 터뜨리니,

“가주, 정신 차리십시오오오오오! 무섭습니다아아아아!”

낭인왕도 미칠 듯이 절규했다.

**

그리고 약속의 시간.

신시초(오후 4시경).

신륜염제를 비롯한 모두가 촉산의 일별봉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누구할 것 없이 들떠 있었다.

네 마두는 드디어 천화서고 대공자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고, 후공은 후공대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리며 살짝 들떠 있었다.

‘후후, 놈의 시체를 까마귀가 모조리 뜯어먹을 때까지 지켜봐 주마.’

‘당명은 와 있겠지?’

네 마두는 승리를 자신했고,

후공에겐 오랜만에 아우와 함께한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 신타, 놈을 쉽게 보면 곤란하다.

곁을 달리는 권황신마가 전음을 보내왔다.

후공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잊지 마. 내가 선공이야.

- 후후.

권황신마가 웃음을 흘렸다.

그로선, 그들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화공신타가 한 몸 불살라 선공을 맡아준다면 그만큼 자신들의 승산은 올라가는 것이다.

이내 다섯은 일별봉에 이르렀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 누구 할 것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

아무도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

저만치 멀리 흑의장포를 걸친 노인만이 홀로 서 있으니 의아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최소 두 사람이어야 했다.

아미파에서 파양마군과 극진마군을 죽인 건 둘이었으니.

신륜염제가 입을 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디로 가고 너 혼자인가?”

“그는 이미 이곳에 와 있다.”

“뭐?”

은신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신륜염제를 비롯 모두가 기감을 확장해 주변을 탐지했다.

하지만 무소용.

감지할 수 없어 미간만 더 파였다.

그때였다.

“저기 저곳!”

화공신타가 소리치며 손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가 의아함만 커졌다. 화공신타가 가리킨 지점은 흑의장포 노인 쪽인 것이다.

‘설마 은신 상태라고?’

‘무, 무슨?’

그게 사실이라면 이 싸움은 쉽지 않다.

은신술의 경지가 대체 어떤 수준이길래.

무엇이든 알 수 없다는 건 두려움을 불러오기에, 네 마두는 경각심이 커졌다.

화공신타가 다시 소리쳤다.

“저기 안 보여! 저기 있잖아! 시발, 저기 안 보이냐고!”

“…….”

“…….”

“…….”

안 보인다.

어떻게 봐도 안 보였다.

신륜염제와 권황신마, 그리고 독마군과 유령신마가 서로를 바라보고 화공신타를 바라볼 때였다.

“어? 자, 잠깐만.”

유령신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갑자기 왜 그러나 하고 바라볼 때,

시작되었다.

우두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교릉이 발동.

은외법으로 예정된 시간, 신시초.

뼈마디가 뒤틀리는 소리에 신륜염제를 비롯한 모두가 놀라 눈이 커졌다. 화공신타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야, 시발놈아! 무섭게 왜 뼈 소리를 내고 그래!”

“내, 내가 그러는 게 아니……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령신마가 뒤틀려갔다.

머리가 꺾이고 팔다리가 뒤틀려갔다. 넘어져 뒹굴면서 미칠 듯이 발작하는 광경에 모두가 굳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래가진 않았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유령신마는 작은 항아리 정도로 구겨져버려, 입이 어디에 있는지 눈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옅은 신음이 흘러나와 살아있는 것 같긴 한데, 이미 살아있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신륜염제를 비롯한 네 마두가 경악 속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화공신타는 아니었다.

“시발, 천화서고 대공자! 네놈이 감히 내 친구를 건드려!”

분노를 토해내며 신형을 쏘아갔다.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던 신륜염제와 권황신마, 독마군은 이내 더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우드드드드득.

뼈가 부딪히는 소리.

이번엔 화공신타였다.

그 소리를 따라 화공신타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원래의 흉측한 모습이 사라져가고, 젊은 모습으로, 청년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신형을 멈췄을 때 선 곳은,

흑의 장포 노인의 곁.

완연히 젊은 서생의 모습이었기에 그제야 이해했다.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말 뜻이…….’

‘화, 화공신타가 천화서고 대공자!’

그렇게 경악하고 있는 모습에,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천화서고 대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과 어우러지고 싶다는 듯, 땅속에서 세 줄기 자줏빛 광채가 튀어나왔다.

카르르르르르르릉!

크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때만을 기다린 검령과 번쾌가 자줏빛 검광을 빛내며 허공을 유영했다.

그 모습을 세 마두가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건 당명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자줏빛 검광이 달라보인다.

더욱 친근하게.

더 가깝게.

말로 할 수 없는 격정 속에 당명이 전음을 발했다.

-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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