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천람을 다루기엔.
형님…….
그래, 대형이 틀림없다.
당명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 청년의 모습이지만 그런 건 이제 상관없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곱추의 모습.
화공신타가 아니다. 자신에겐 무명신타.
그리고 교릉으로 구겨져버린 상대. 예정된 시간에 맞춰 오그라들었다.
대형이 한 번씩 선보인 후혈(後穴)이다.
대형에겐 다른 이름.
점혈은 예약된다. 뒤늦게 나타난다. 이 강호에서 전설적인 점혈 수법인 후혈을 구사할 수 있는 이는 단 두 사람.
대형과 풍제뿐.
그것을 천화서고 대공자가 펼쳐 보였으니 대형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금 대공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맞다고 말하겠지?
고개를 끄덕일 거다.
그래야 해.
만약, 만약에…….
농담하듯 이제야 형님이라 부를 마음이 생겼냐는 식으로 말하면 죽여버린다.
그때 들려왔다.
- 가주, 이제야 형님이라 부를 마음이 생긴 겁니까?
- ……어?
순간 당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넋이 나가버렸다.
그 모습에 후공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여기서 더 놀리면 곤란하겠지?
때는 되었다.
수많은 공통점, 그러면서도 의심과 혼란, 의아함 속에서 결국 좁혀져가다 당명은 한 지점에 이르렀다. 진실과 마주했다.
그렇기에,
- 쯧쯧, 멍청한 놈. 빠르기도 하구나.
- ……!
당명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직접 들으니 충격이 말로 할 수 없었다.
멍청한 놈.
이보다 더 확실한 말은 없다.
자신은 늘 대형에게 그리 불렸다.
당가주도, 암향아도 아닌 멍청한 놈이었다.
‘대형…….’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왜 대형이 천화서고 대공자가 된 건가?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건가?
왜 이제야 밝히는가?
여태 어떻게 참고 있었던 겁니까?
몇몇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몇몇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알 수 있는 것.
제갈혜가……. 그 녀석이 왜 그 밤 춤을 추었는지 알 것 같다.
지금 자신도 혜의 마음과 같아졌기에,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춤을 추는 대신, 당명은 산봉우리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끝도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반가움과 환희가 담겼고, 또 위로와 안타까움도 깃들었다.
대형은 매 순간 유쾌하게 넘기며 이 순간까지 왔겠지만, 어찌 고뇌가 없었을까.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겠지.
또한 천화서고 대공자의 행적이 대형의 행적이었다.
지난 시절과 같다.
가는 길이 천하제패.
어쩌다 보니 이미 천하제패가 되어있는 길.
왜 대공자의 행적이 놀라웠는가 했더니 그때와 같았다.
그런 마음이 끝도 없는 웃음소리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으으으…….”
백혼곡 신륜염제 등이 알 수는 없는 일.
그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보일 뿐이기에 누구 할 것 없이 깊게 침음성을 흘렸다.
천화서고 대공자.
분노가 말로 할 수 없다.
놈에게 완벽히 농락당한 것이다.
모든 게 놈의 계략.
놈은 화공신타가 되어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자신들이 친구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놈은 악랄한 마수를 심고 있었다.
그래, 그때였겠구나.
여인들을 유혹할 때. 유령신마가 어깨를 두드렸을 때.
과정이 너무 매끄러워 의심조차 못 했다.
먼저 손을 댄 것이 유령신마였으니.
그리고, 아미파에 남겨둔 글귀.
극진마군의 몸에 남겨둔 글자들.
생령과를 가져오라는 말.
놈은 이미 자신들이 백혼곡인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접근해 독수를 펼쳤다.
어찌 그리 대담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수법이기에 사람을 구겨버리는 것인가?
대체 뭐 하는 놈인가?
‘정녕 이 시대의 악(惡)인가?’
모든 상황이 비로소 이해되었지만, 정작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자에 대해서는 의문만 더 커졌다.
의문은 접어두자.
이 순간 생각해야 할 건 단 하나.
놈에게 건넬 선물에 대한 것.
놈에게 절망을 선물한다.
사백 년의 수행.
그리고 삼백 년의 분노를 토해낸다.
삼백 년 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때는 당시 천하제일인인 청절사태를 맞이하였기에 압도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행의 시간도 길고, 천화서고는 대공자는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도 아니지 않은가.
고작 청년.
고작 애송이.
‘놈이 이 시대의 악의 화신이라지만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틀렸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
모습이 달라졌을 뿐.
- 당명, 넌 저기 두 놈을 맡아라.
후공이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서 있는 건 권황신마와 독마군.
당명이 짐짓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 대형, 왜 저는 두 명입니까?
- 바꿀까?
- 사양하겠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후공과 당명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서 당명은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가 유령곡을 상대할 때였던가.
귀운종을 상대할 때였던가.
둘 다일지도.
그런 당명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순간 대형의 기운이 폭주한 탓이었다.
자줏빛 안광이 미칠 듯이 폭사하는 가운데, 머릿결이 너풀너풀 휘날려간다.
아미파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기운이 강렬했기에,
‘원신단.’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다.
대형이 원신단을 사용한 것.
덕분에 당명은 기분이 묘해졌다.
대형임에는 틀림없지만, 경지까지 같은 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과거 대형은 원신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거늘 지금은 원신단의 힘을 빌리고 있음이다.
대형은 아직 본래의 수행을 찾지 못했다.
또한 이 결전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의미.
자신도 대비해야 했기에, 당명도 뒤이어 바로 원신단을 삼켰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원신단의 효력은 즉효.
기경팔맥을 휘도는 기운이 급격히 증폭되면서 당명의 눈빛도 찬란한 금빛을 폭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가 시작을 알렸다.
양 진영이 함께 신형을 날렸고, 신륜염제의 신병인 금륜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앙, 촤앙, 촹!
작은 원반이 순식간에 확장되었고 날카로운 톱니도 드러내며 큰 솥뚜껑처럼 커져 날아갔다.
츠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에 맞서 격돌의 때만 기다리고 있던 검령과 번쾌도 울부짖으며 자줏빛 광채를 발하며 쇄도해갔다.
카르르르릉!
크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금륜과 어우러졌다.
검령과 번쾌는 아미파에서 당한 수모를 잊지 않았다. 그때 주인을 잃을 뻔했기에 이번엔 달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주인의 기세도 달라졌다.
주인과 이어져있으니 알 수 있다. 주인과 이어져있어 그 기운도 전해져오니, 이번에는 압도한다!
금륜이 주인에게 닿을 수 없게.
금륜을 떨쳐내고 적을 섬멸한다.
과거 찬란했던 어느 날처럼.
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검령과 번쾌가 금륜과 어우러진 가운데, 후공의 신형은 이미 신륜염제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자령안으로 자줏빛 안광을 폭사하는 가운데 소매를 떨쳤다. 소맷자락 안에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친이 날아들었다.
나아간 건 친만이 아니었다.
후공은 거의 동시에 능오침도 발출했다. 다섯 줄기의 하얀 광채가 신륜염제를 향해 짓쳐들었다.
‘후후, 제법이다만.’
여섯 개의 기운이 맹렬하게 쏘아져옴에도 신륜염제는 여유가 넘쳤다.
별호가 염제인 건,
‘염혼(閻魂)!’
염혼의 수행이 극에 달한 까닭.
신륜염제가 염혼을 운용한 순간, 열두 개의 검은 형체가 피어났다. 사람의 형태였고, 검은 안개처럼 꿈틀거렸다.
십이염혼.
염혼을 펼치는 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열두 명의 호법을 데리고 다니는 것과 같다.
자신의 분신임과 동시에 따로 움직인다.
하나하나가 현경의 예의 수준.
과거 삼백 년 전 청절사태와 맞설 때 염혼은 여섯이었고, 염혼들의 경지도 화경의 극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운용할 수 있는 염혼은 두 배로 늘어났고, 각각의 경지도 달라졌다.
과거 청절사태 앞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던 때와 지금의 자신은 완연히 달랐기에,
크아아아아아아앙!
친은 세 염혼의 손길에 붙들렸다.
빠져나가려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며 미칠 듯이 발버둥 쳤지만 벗어나면 잡히고, 또 벗어나면 붙들렸다.
다섯 줄기 하얀 광채 능오침도 가로막혀 흩어졌다.
다섯 염혼을 뚫고 나아가 파괴하며 흩어진 순간, 염혼이 다시 꿈틀꿈틀 피어났다.
그러한 광경에 후공도 알아봤다.
‘염혼? 마교교주였구나.’
염혼.
마교교주의 진정한 호법.
마교교주만의 독문 무공.
이 시대에 맞서본 적이 있었다.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운용된 건 열 개의 염혼이었고, 천람을 운용하여 깨뜨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취는 고작 7성 후반.
원신단을 통해 8성 중반까지 급격히 경지를 끌어올렸다지만, 천람은 최소 9성의 경지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득해졌다.
‘오늘…… 쉽지 않겠구나.’
하지만 오늘은 아우를 만난 날.
다시금 아우와 작별할 수 없다.
일곱 염혼들이 짓쳐들었고, 그 사이로 신륜염제의 모습도 후공의 시선에 들어왔다. 연달아 장력이 뿜어지는 가운데, 허운으로 다섯 개의 장력을 흘리고, 둘은 반탄했다.
두 염혼이 스스로의 기운을 돌려받아 흩어져갔다. 그 흐름 속에 후공의 눈에 비친 건 흐릿하게 짓쳐드는 신륜염제의 미소.
‘환명.’
다섯 겹의 환명이 겹겹이 쌓였다.
하지만 신륜염제의 미소는 더 짙어졌을 뿐. 우수에 맺힌 검붉은 기운이 환명을 뚫고 들어와 후공의 어깨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터졌고, 말로 할 수 없는 강렬한 기세를 그대로 받은 후공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건 몸만이 아니었다. 딛고 있던 땅, 그리고 그 뒤쪽 지면까지 푹 꺼져 무너져내리면서 먼지가 크게 피어났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음인가.
먼지가 서서히 걷혀가며 드러난 광경은 경악스러웠다.
커다란 웅덩이.
아니 그야말로 거대한 분지였다.
신륜염제가 자신이 만들어낸 분지 위에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내려다봤다.
‘후후, 가소롭군.’
너무 간단히 끝나 감흥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보고 싶은 광경.
기대한 광경을 놓칠 순 없지.
너덜너덜 피떡이 되어 죽어있을 모습은 언제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
분지 아래쪽의 먼지도 가라앉아갔다.
기다리기 힘들다. 신륜염제는 안력을 돋웠다. 짙은 먼지를 뚫고 모습을 관찰해갔다.
그러다 보았다.
보았기에,
“……?”
신륜염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그야말로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시체가 없다. 핏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천화서고 대공자가 뒷짐을 진 채 차분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통격.
후공의 삼대호신기 중 하나.
닿아 있는 곳으로 모든 충격과 기운을 그대로 전이한다.
통격이 운용된 탓에 신륜염제의 기운은 고스란히 지면으로 흘려보내졌고, 땅은 분지가 될 정도로 파였을 뿐.
먼지가 걷혀가며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후공이 신형을 쇄도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