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91화 (291/460)

291화. 햇님을 향해 작별 인사.

한편 당명의 사정은 달랐다.

둘을 상대하고 있었음에도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원신단 덕분이었다.

‘이런 느낌인가?’

현경의 극을 엿보고 있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경지.

첫 수련부터 화경에 이르는 세월보다 현경 안에서의 경지 상승은 더 아득하다.

현경의 예에서 중에 이르기가,

중에서 극에 이르기가,

까마득하다.

그런데 지금,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기운이 전신을 휘돈다.

움직임은 극한으로 자유로워 생각이 끝마쳐지기도 전에 몸이 반응한다.

상대의 경지는 각각 현경의 중.

하나는 가공할 마기를 두른 권풍을 뿜어내고, 다른 하나는 채찍을 다룬다.

채찍은 실물이 없다.

마기로 형체화되어 휘둘려질 뿐.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또 강렬하면서도 그 변화와 묘용이 실로 현란하다.

하지만 당명은 그런 권풍(拳風)과 마편(魔鞭) 사이사이를 유영하듯 헤집고 있으니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

과거에 복용했던 원신단보다 나아 보인다.

약왕문주 용악이 원신단을 개선한 것일까?

약에 미쳐 있는 놈이니 그렇게 한 걸지도.

용악은 잘 지내고 있는 것인가?

격전의 와중, 공방 속에서 그런 상념을 떠올려도 괜찮을 정도로 당명은 손에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여유로움은 원신단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형의 배려 덕분이기도 하다.

대형이 상대하고 있는 자.

그가 펼쳐내고 있는 마공은 염혼.

마교교주의 독문 무공.

즉 삼백 년 전 마교교주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전 마교교주의 염혼을 견식했을 때 본 것은 열 개의 염혼이었다. 그조차 경이롭다 여겼는데, 지금의 염혼은 열둘. 그리고 훨씬 강대하다. 정녕 백혼곡의 삼백 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만약 지금 내가 저자와 맞섰다면……?’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더 시간이 흐른다면, 대형은 곤란에 빠질지도.

그러니,

기운을 끌어모으자.

이 둘을 일격에 끝내자.

그다음 대형과 함께 삼백 년 전 마교교주를 상대한다.

‘십(十).’

열 번의 호흡.

파악은 끝냈다.

‘구(九).’

현경의 중의 경지에서 쏟아내는 빗줄기가 아니라 현경의 극의 초입에서 뿜어내는 수만 개의 빗줄기로.

‘팔(八).’

- 권황신마, 근접.

독마군이 전음을 발했다.

조급한 건 당명만이 아니었다.

권황신마와 독마군은 훨씬 더 초조했다.

상대에게 전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흩어지는 신법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고, 수많은 잔영을 남기니 끌려다니는 형국.

권풍은 스쳐지날 뿐이고, 마편의 수백 개의 그물도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 가운데 금빛 광채를 번뜩이며 뿜어져나오는 암기는 강기를 두르고 있어 실로 위협적이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음에도 이미 몇 번이고 몸에 충격을 가하고 있으니.

근접.

한 사람은 근접해야 한다.

경이로운 신법에 맞서 거리를 둔다는 건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테니.

쿠콰콰콰쾅!

권황신마가 짓쳐들었다.

거칠고 폭발적인 기세에 그가 지나온 길에 암석이 갈라지고 돌이 튀어올랐다.

우우우우우우웅!

산악을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의 위세 속에 권황신마가 권풍을 내지르며 파고들었다. 권풍 속에 여섯 개의 붉은 환이 맺혀갔다.

맺히고 맺혀 작은 구슬이 되는 순간,

쩌어어엉!

튕기듯 나아갔다.

당명의 신형이 흩어지며 권황신마의 우측면으로 휘돌았다.

‘삼(三).’

권황신마와 독마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우측면.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권황신마의 반응은 자신이 쏘아낸 붉은 환보다 더 빨랐고, 독마군의 마편도 우측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잡았다!’

가뒀다. 퇴로는 없다. 독마군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마기를 두른 채찍을 휘둘러갈 때,

‘일(一).’

당명의 신형은 그곳에 없었다.

미칠듯한 환영 속에 우측면이 아닌 권황신마의 등 뒤에서 나타났고 기운의 응축은 이제 끝.

“……?”

권황신마가 등 뒤를 감지했을 때는 늦었다. 생애 중 가장 빠른 신법의 전환을 이루어내며 그가 돌아섰을 때는,

쏴아아아아!

수만 줄기의 금빛 비가 쏟아져내렸다.

하늘이 아닌 눈앞이다.

당명의 흑련의에서 쏟아져내린 건 황금빛의 빗줄기.

만천화우(滿天花雨).

수만 개의 금빛 빗줄기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광경에 권황신마는 미소지었다.

그냥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었다.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빗줄기는 자신의 호신강기를 돌파할 것이다.

미소를 지은 건 사백 년의 회한 때문.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며, 살아온 사백 년의 회한이 주마등이 되어 흘렀다.

백 년의 기쁨.

삼백 년의 고뇌.

그런 상념도 한순간,

수만 개의 금빛 빛줄기가 권황신마의 몸을 관통했고, 꿰뚫려나간 권황신마는 수만 개로 조각나 흩어졌다. 마치 모여있던 수만 마리의 나비가 한순간 흩어지듯 부서져 흩날렸다.

비명은 없었다.

고통도 없었다.

권황신마에겐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독마군에겐 아니었다.

어느샌가 신형을 물려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독마군에겐 아직 불행이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부릅뜬 자신의 눈에 공포가 스멀스멀 깃들어서만도 아니었다.

추륵, 추륵, 추르륵.

미처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참담. 오른팔이 사라졌다.

원래 팔이 있던 자리, 텅 비어버린 어깻죽지에서 추르륵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이놈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황금 비는 도대체……?’

독마군은 당명을 바라봤다가 시선을 들어, 붉은 노을이 천천히 점령해가는 하늘에 떠 있는 수만 개의 황금의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알고 있다.

보았기에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사천 당가주……. 만천화우…….’

단지 의문을 품은 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양마군이 말했다. 사천 당가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피해 도주했노라고.

한데 그런 사천 당가의 가주가 눈앞에 있다.

천화서고 대공자와 함께 있으니,

의미는 하나,

‘속았구나.’

천화서고 대공자는 악이 아니었다.

애초에 마화한 적이 없다.

그저 여전히 강호의 별.

청성에 남긴 글귀, 아미에 대한 분노도 모두 거짓.

그저 놈은 스스로 우리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다음은 화공신타.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니, 독마군은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래도 실망하진 말자.

아직은.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자.’

독마군이 몸을 돌려 산 밑으로 신형을 질주했다.

지혈을 했음에도 핏줄기는 멈추지 않아, 도주하는 그의 길에 안내자처럼 피가 남았다.

그런 독마군을,

“흐음.”

당명이 한숨처럼 침음성을 흘리고는 뒤쫓았다.

신형을 날리는 가운데, 이만여 개의 황금 빗줄기가 쇄도하며 흑련의로 스며들었다.

한숨이 나온다.

놈이 살아보겠다고 도주해서가 아니다.

오른팔이 날아간 놈 따위 천천히 죽여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저 방금 전 소리 없이 오고 간 대화.

대형의 전음.

- 당명, 놈을 죽여라.

- …….

- 잊지 않았겠지?

- …….

잊지 않았다.

대형의 방식, 우리의 방식.

대형이 말하고 있다.

거들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걸리적거릴 뿐이라고.

상황이 좋지 않게 흐르면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도주는 가장 현명한 계책이요, 강한 무공과 같다고.

당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는 돌아옵니다.’

그 결과가 비록 한줌 혈수로 녹아내리게 될지라도.

대형보다 먼저 죽음을 맞을지라도.

*

그건 후공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명은 돌아온다.

그 결과는?

죽음.

그러니 그 전에 끝내야 한다.

해낼 수 있는가?

어렵다.

모든 걸 가두고 멈춰 세우며 방어해내는 환명이 통하지 않는다. 놈은 마치 환명을 거미줄 거둬내듯 거둬낸다.

검령과 번쾌는 금륜을 상대로 힘을 다하고 있지만 버텨낼 뿐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기에 탓할 수 없다.

내공력 또한 급격히 소모되고 있는 상황.

그때마다 삼악의 기운이 회오리치며 내력을 빠르게 복구하고 있지만 조금씩 회복이 더뎌진다.

친은 다섯 염혼에 묶여 있고, 강기를 뚫고 지나가는 능오침은 놈의 두터운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하고 있다.

허운의 묘용은 이미 간파되었다.

허운의 수백 번의 반탄을 겪으며 염혼이 부서져나가는 사이, 놈이 파훼법을 찾아냈다.

반탄이 일어나는 틈새로 공세가 파고든다.

그 간극이 찰나임에도 그걸 놓치지 않고 짓쳐든다.

남은 건 오직 통격.

하지만,

“후후, 어린놈이 신묘한 재주를 지녔다만.”

신륜염제는 통격마저도 파악했다.

삼백 년 전 마교교주는 그 묘리를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알 수는 없어도 그 이치는 빠르게 간파했다.

왜 강기가 실린 장력을 수없이 맞고도 버틸 수 있는 건지, 왜 그때마다 딛고 선 땅이 주저앉는지.

기운의 전이.

몸이 닿는 모든 곳으로 기운을 흘려보낸다.

격산타우와는 상반된 묘리다.

어떻게 그걸 이루어낼 수 있는지, 마음 한편으로 경이로움이 떠오르지만 탐이 나는 건 아니다.

경이로운들 무슨 소용인가.

신비로운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자신의 손에 죽게 될 놈인 것을.

그래, 이제 끝내자.

참담하게 일그러지게 될 너의 얼굴을 보고 싶다.

‘염혼이체!’

순간, 흩어져 공격하던 네 개의 염혼이 뭉쳐갔다.

검붉은 안개 형태의 하나가 또 다른 하나와.

그렇게 넷은 각각 뭉쳐 둘이 되었고, 형체도 커졌다.

거대화된 만큼 기운 또한 확연히 달라졌다.

먼저 달려든 건 남겨진 세 염혼.

마치 살아있는 현경의 고수인양 후공을 향해 장력을 날리며 교란했다.

파아앙!

후공이 하나의 염혼을 허운으로 튕겨내고, 그 찰나의 간극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장력을 통격으로 흘리는 순간,

쿠구궁.

딛고 선 지면이 주저앉았고, 후공이 그 지점에서 신형을 돌렸을 때는,

처억!

붙잡혔다.

거대화한 두 염혼이 후공의 양쪽 팔을 각각 붙잡은 채, 이빨을 드러내며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의 근간은 염혼의 주인 신륜염제의 미소.

‘후후, 잘 가라. 천화서고 대공자!’

신륜염제가 후공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후공은 동시에 능오침을 발출했고, 일곱 겹의 환명을 전면에 떠올렸다. 호신강기로 두텁게 몸을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능오침이 양쪽 염혼의 머리를 관통했지만, 그저 머리가 흩어졌다가 다시 원복된다.

희망은 있다.

아직 두 발이 지면.

그리고 양쪽의 염혼에게 기운을 전이한다.

하지만 이미 간파.

“크하하하하하하하!”

삼백 년 전 마교교주.

신륜염제가 통렬히 웃으며 장력을 퍼붓는 순간, 두 염혼이 후공의 몸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이제 지면으로 흘리는 건 불가능.

장력이 맞닿는 순간.

파아아아앙!

후공이 양쪽에서 붙들고 있는 두 염혼에게 통격으로 기운을 흘리려 할 때, 두 염혼이 스스로 소멸했다.

그 어느 곳에도 전이되지 않았기에,

고스란히 모든 장력의 충격을 받은 후공의 몸이 순식간에 튕기며, 하염없이 멀리 날아가 절벽 너머까지 밀려났다.

후공은 너풀너풀 떨어져갔다.

막대한 충격에 삼악의 기운이 뒤틀려 신형을 바로 세울 수조차 없어,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며 절벽 아래로 추락해갔다.

‘회복까지 서른 번의 호흡.’

최소한의 시간이다.

그보다는 절벽 아래 지면으로 추락하는 것이 더 빠를 터.

빙글빙글.

몸이 돌면서 세상도 돌았다.

절벽이 보이고, 절벽 위에 서 있는 삼백 년 전 마교교주의 모습도, 그의 웃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하늘도.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 속에 해가 저물어간다.

‘스물여덟.’

그사이 또 다시 보였다.

절벽, 절벽 위 웃는 모습.

붉게 물든 하늘. 사라져가는 태양.

그리고, 또 하나.

아래쪽.

새로운 광경.

방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나무들이 절벽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묵빛에 울룩불룩 거친 수많은 나무가, 마치 꿈인 것처럼 암벽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향이 짙다.

그 향이 코끝으로 스며든 순간,

후공의 안광이 폭주했다.

그건 삼악의 폭주.

뒤엉켰던 기운을 풀어낸 것뿐 아니라, 그 향을 맡은 순간 삼악이 미쳐 날뛰었다.

후공이 운신이 가능해진 건 당연했기에,

신형을 틀어 딛기 좋게 뻗어나온 나무를 딛고 섰다.

후공은 딛고 선 나무를 내려다보고,

주변 가득 튀어나온 묵빛의 나무들을 바라봤다.

‘찾았다.’

봉양목.

삼악의 마지막 양분.

이곳 봉우리의 이름은 일별봉(日別峰).

일별봉 아래,

수많은 봉양목이 튀어나와 떠나가는 해를 향해 작별 인사를 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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