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92화 (292/460)

292화. 아무도 없기에 부르고 싶었던 이름을 불러본다.

운이 좋았다.

여러모로다.

후공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전의 장소를 정할 때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촉산의 삼백여 봉우리마다 각각 붙여진 이름들.

그중에서도,

수일봉(手日峰).

양소봉(陽笑峰).

일별봉(日別峰).

세 봉우리 중에서 고민했었다.

봉양목은 해를 받드는 나무. 석양 아래 떠나가는 해에게 작별을 고하는 나무인 탓이다.

아침 인사는 없는데, 떠나가는 순간에는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

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수일봉.

해를 향해 웃음 짓는 양소봉.

해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일별봉.

각각의 이름이 괜히 지어졌을 리 만무하다 생각했고, 세 봉우리 중에서도 일별봉을 택했다. 한데 이곳에서 결국 만나게 되었으니 운이 좋았다.

결전의 시간을 석양의 때에 맞춰 정한 것도 운이 좋았다. 처음부터 고려한 건 아니었다. 만나길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 한편에 봉양목에 대한 생각이 머물고 있었기에, 촉산에서의 결전은 석양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 한편으로 의아함도 떠오른다.

절벽의 암석을 뚫고 튀어나온 주변의 봉양목은 거의 서른 그루. 좌우로, 아래쪽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모든 형태는 거친 묵빛.

화설난이 말했던 것과 다르다.

화설난은 분명 봉양목이 투명해보이는 아지랑이 형태라고 설명했던 터.

봉양목이 아닌가?

그럴 리가.

나무의 향만으로 삼악이 기운을 회복한 걸 넘어, 열망으로 미쳐 날뛰고 있으니 틀림없다.

지난날 남궁세가에서 풍열을 접했을 때보다 더 극심하고, 공청석유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극렬한 발작.

삼악을 흥분시키는 건 오직 삼악의 양분뿐.

그럼 고대 문헌이 틀린 것인가?

확인해보자.

후공은 천향사주를 운용했다.

수만 가지 향 가운데 영악초의 향만을 분리, 오른손에 맺히게 함과 동시에 주위로도 방사했다.

그 순간,

봉양목이 변화를 보였다.

두두두두두둑.

절벽의 암석을 뚫고 나온 상황임에도 더 빠져나오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마치 풍열이 독양충의 향에 반응하던 것과 같았다.

오로지 독양충. 오직 독양충의 향!

그런 외침을 내뱉듯 풍열은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봉양목의 색상도 달라져갔다.

거친 수묵과도 같던 묵빛이 급격히 변모하며 투명해지면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더불어 방향도 틀어간다.

모든 봉양목이 후공 쪽을 향해 가지를 기울여갔다. 암벽에 뿌리가 박혀 있어 다가올 수 없음에도, 다가가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깃든 몸짓을 보였다.

그건 오직 영악초 때문.

봉양목은 이제 석양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영약초!

봉양목의 숙명이자 기쁨은 영악초를 완성하는 것. 영악초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

다가갈 수만 있다면,

영악초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런 열망 속에 닿으려 가지를 기울여갔고, 그중에서 하나는 닿아가기도 했다.

후공이 딛고 선 봉양목이었다.

나무 끝단. 가지가 일렁일렁하다 구부러지며 다가들었다.

후공이 그런 봉양목의 나뭇가지를 맞이해갔다.

봉양목이 손바닥 장심에 닿는 순간, 마중 나와 있던 삼악이 봉양목의 기운을 끌어당겼다.

삼악의 마지막 자리.

삼악의 마지막 양분.

온전한 합일!

그 결과,

삼악이 내부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콰쾅! 콰쾅! 콰콰쾅!

“흐으읍!”

그 충격에 후공이 옅게 신음을 발했다.

육각망의 피를 복용할 때조차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후공의 입에서 옅은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전신이 흔들릴 지경.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다.

경지가 급격히 상승해간다.

어느샌가 8성 초반.

원신단과는 상관없다.

이미 원신단의 효력은 옅어져 사라져가는 상황.

원신단이 없는 상황 속에 본래의 경지에서 회복한 경지는 7성 후반. 그 경지에서 원신단이 다시금 작용한 것처럼 급격히 경지가 상승하고 있었다.

콰쾅! 콰콰쾅! 콰콰콰콰쾅!

찰나,

8성 중반!

멈추지 않는다.

딛고 선 봉양목의 헌신은 다해갔다. 진액을 남김없이 삼악에게 넘긴 봉양목이 먼지처럼 스러져갔다.

딛고 설 자리를 위해 스르르 환명이 후공의 발밑으로 떠올랐고, 후공의 안광은 자줏빛으로 더욱 더 불타오르고,

콰콰콰콰쾅!

이내 8성 후반을 돌파.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주변 공기가 몸을 떨었다. 옷자락과 머릿결은 미친 듯이 나풀거렸지만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타오르는 자줏빛 안광이 너무 강렬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여 다른 것을 가릴 정도였다.

그렇게 보였다.

절벽 위.

내려다보는 신륜염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야말로 온통 자줏빛 광채.

‘이, 이게 무슨……?’

찰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신륜염제는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온전히 타격을 입혔다.

내부 진기는 진탕되고, 기운을 회복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인데. 아니, 아니다.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였을 텐데 신형을 회전해 나뭇가지를 딛고 내려섰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찌하여 기운이 증폭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경지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 같은가?

답은 알고 있다.

암벽에서 튀어나온 기이한 나무.

‘영목(靈木)이라고?’

그런 것 같다.

암벽을 뚫고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묵빛이었다가 투명하게 변해 일렁이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무엇이길래 찰나 간에 경지마저 끌어올리는 것인가. 이 정도면 공청석유가 하찮게 보일 정도의 영약.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나도 영목을 취한다.

또한 금륜과 어우러져 싸우는 자줏빛 검들의 기운도 점점 왕성해지고 있는 상황. 놈의 기운 또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성해져가니 그 전에 죽음을 선사한다.

신륜염제가 신형을 던졌다.

그와 함께 염혼들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광경을 후공이 올려다봤다.

폭주하는 자줏빛 안광 안쪽 후공의 시선은 무심함.

염혼은 여섯.

두 개의 염혼은 거대화.

네 개의 염혼은 아직 친에 붙들려 있다.

현재 회복한 경지는 8성 후반.

그러면서도 더 나아가고 있기에, 우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다섯 줄기 하얀 광채,

능오침이 빛처럼 쏘아져나갔다.

다섯 염혼에 닿는 순간, 염혼이 부서져내리며 흩어졌다.

이전과는 달랐다. 원신단을 통해 8성 중반에 이를 때와는 달리 염혼은 산산조각 나며 흩어져갔다. 물론 다시금 염혼이 형체가 맺혀가지만 후공은 상관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필요할 뿐.

그 와중,

신륜염제와 거대화한 하나의 염혼이 짓쳐들었다. 일격에 끝내겠다는 듯 수직으로 떨어져내리는 신륜염제의 우수에는, 맹렬히 회전하는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염혼은 좌측면.

‘가늠해보자.’

좌측으로 환명이 떠올라 염혼의 공세를 방어해낸 순간, 후공은 장력을 마주쳐갔다.

파아아앙!

격렬한 충돌음이 터지며 신륜염제의 신형은 위쪽으로 튕기듯 밀려났고, 후공은 아래쪽으로 밀려났다.

평수.

후공은 만족스럽게 옅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신륜염제는 당혹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 년이 지난 건가, 십 년이 지난 건가.

하루조차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한나절도 아니고…….

한데 한순간에 완전히 다른 경지에 이른 것이다.

경악도 잠시, 신륜염제는 체공하고 있던 신형을 던져 한그루 봉양목을 딛고 섰다.

답은 하나.

투명하게 일렁이는 이 영목.

망설임 없이 나뭇가지를 끊어내 입으로 가져가 그 체액을 마셨다.

‘써.’

쓰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

이제 내게도 가공할 힘이…….

“……………….”

샘솟지 않는다.

신륜염제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왜?’

당황해 후공 쪽을 바라봤지만, 답을 들을 길은 없다.

후공은 그저 삼악의 끊임없는 융화 속에서 스스로의 경지를 가늠하고 있을 뿐.

9성을 향해 닿아가고 있다.

과거의 경지.

이미 겪어온 길. 이미 지나온 길.

활활 타오르는 자령안 속에서 삼악의 기운이 요동치며 미친 듯이 돌파해간다.

방금 전 삼악은 겪기도 했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겪어 본 터라 삼악의 기운은 그야말로 광분했다. 어떻게 하나가 된 것인데, 두 양분까지 흡수하고, 마지막 양분까지 얻은 지금, 소멸될 수 없다.

전신경맥을 막대한 기운으로 휘돌며 끊임없이 증폭해갔다.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할 신륜염제가 아니었다.

어찌하여 기운이 매 순간 증대되는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에서 시간을 지연하면 파멸.

모든 힘을 끌어낸다.

신륜염제가 신형을 쇄도했다. 다시금 생성된 여섯 염혼들이 그 곁을 따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짓쳐들었다.

하지만 늦었다.

미칠듯한 폭주로 삼악은 돌파.

‘9성!’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삼악이 나아가고 있기에, 후공은 환혼된 후 처음으로 본래의 경지의 그림자에 닿았다.

지력을 상쇄시키는 지무(地無)가 가능해졌고,

이어진 건 천람(川嵐).

환명 없이도, 튀어나와 일렁이는 봉양목을 딛지 않고도 허공을 자유롭게 나아가는 가운데, 염혼들과 신륜염제 사이로 파고들었다.

염혼들의 장력이 비산하고, 신륜염제의 눈부신 신형이 번쩍거리는 사이를 유영함에도 닿을 수 없다. 그 자유로움 속에 신륜염제는 닿지 못했다.

그 속에서 천람이 펼쳐졌다.

천람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요,

산등성이를 타고 유유히 흐르는 산바람.

휘도는 기운 속에 주변은 응결되어 간다.

펼쳐내는 주변 오십여 장 안의 모든 사물은 천람의 기운에 얽혀 구속되며 느려진다.

또한 천람은 지극히 맑은 기운.

천람의 영역 안은 쉬어 가고 싶은 풍경.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유유한 기운.

마인이라도 잠시 마성을 가라앉히고 본래의 마음으로 찾아가는 정화의 순간과 마주한다.

항마의 공능.

그런 후공의 휘도는 신형 속 천람에 먼저 반응한 건 염혼들.

번쩍이던 신형은 거미줄에 걸린 듯 급격히 둔화되었고, 기운이 쇠락해져갔다.

신륜염제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니,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형을 쫓기 힘들다. 허공을 평지처럼 딛고 있는 것도 놀랍다.

그리고

‘거미줄!’

보이는 건 아니나 보는 것과 같다.

천화서고 놈이 지나온 길마다 기운이 아른거리며 남는다. 그 기운이 스치고 이미 지나간 자리임에도, 그 공간에 닿을 때마다 자신의 마기가 급격히 흩어지고 있었다.

조화가 깨져간다.

그야말로 닿을 때마다 내부 진기가 교란되면서 부조화를 일으킨다. 진기는 뚝뚝 끊어지고 마기는 흩어져간다.

어디로 향하든 바람이 분다.

어디로 가든 거미줄처럼 쳐져 파고들어 진기를 흔드는 청량한 기운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염혼들은 하나둘 흩어져가고,

다시 생성하는 건 무리.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서 죽는다고?

그 의문과 경악 사이로 답이 들려왔다.

흩어져가는 염혼들 사이로 보이는 건 자줏빛 안광.

그 안광 너머 천화서고 대공자의 무심한 눈길. 손이 떨쳐졌을 때, 다섯 줄기의 백광이 호신강기를 종이인양 뚫고 지나갔다.

“…….”

비명은 없었다.

능오침의 관통은 너무 빨랐고, 그 중 하나는 목을 꿰뚫었다.

그저,

“컥컥!”

피를 토해내며 신륜염제가 추락해갔다.

빙글빙글 세상이 회전한다.

꿈인가?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삼백 년을 갇혀 있었던 내가?

아니, 아니다. 결코 이대로 죽을 순 없다.

힘을 내야 해.

힘을 내서 생령과를 복용해야 해.

생령과로 내력이 증진되진 않는다. 하지만 손상된 몸은 회복할 수 있다. 장기가 뭉개지고 부서져도 회복된다.

그렇기에…….

손을 움직여 품 안에서 생령과를 꺼냈다.

세 개.

그중 하나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바라보니 무심한 시선.

천화서고 대공자.

추락은 멈췄고, 손이 뻗어온다.

“생령과는 잘 받으마.”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목이 꿰뚫려 피가 뿜어지고 있어 신륜염제는 눈으로 물었다.

후공의 대답은 손길,

신륜염제의 정수리 백회혈에 손을 올렸다.

교릉의 일곱 기운을 심은 후, 붙들고 있던 몸을 놓았다.

하염없이 추락해가던 신륜염제의 눈이 흔들렸다.

‘이…… 이건?’

몸에 스며든 일곱 기운이 폭주하려 한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되었다.

우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추락하며 미칠 듯이 뒤틀려가며 몸부림치는 가운데,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목이 꿰뚫렸음에도 신륜염제가 비명을 토해냈다.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후공은 시선을 돌려 위쪽을 바라봤다.

절벽 위.

방금 전까지 마교교주가 서 있던 자리에는 이제 당명이 서 있었다.

“대형!”

크게 부르는 소리에 후공이 피식 웃었다.

늙은 아우.

나이도 많은 녀석이 울고 있는 것이다.

당명의 외침은 이어졌다.

“형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그 누구도 없기에,

당명은,

“후공!”

그렇게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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