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선물을 보내오는 것 같다.
후공!
그 이름이 촉산을 휘돌았다.
긴 메아리를 남기며 멀리 퍼져나갔다.
덕분에 후공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짙어졌다.
‘오랜만이군.’
실로 오랜만이다.
누군가 불러주는 자신의 이름.
마치 아우가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천화서고 대공자.
그리고 무림맹주가 아닌 천공단주.
그럼에도 스스로를 잊은 적은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불리는 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사람이 당명이어서,
아우여서 후공은 더 좋았다.
신형을 솟구쳐 절벽 위로 올라섰다.
당명의 얼굴은 이미 바다. 눈물로 흥건했다.
“쯧, 누가 보면 내가 죽은 줄 알겠다.”
“대형…….”
당명이 울먹였다.
눈앞에 선 이가 대형이어서,
눈앞에 대형이 살아있어서, 격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함께 죽음을 맞으려 돌아왔는데, 자신이 틀렸다.
과연 천하제일인.
정녕 자신의 대형이었다.
그리고 천람.
이 시대 마교교주가 대형의 천람에 농락당했다고 들었는데, 삼백 년 전의 마교교주도 천람의 그물에 걸렸다.
벅찬 마음을 금할 길 없어,
당명이 두 팔을 벌리고 안아갔다.
하지만 당명의 손은 맥없이 허공만 휘젓고 말았다.
후공은 당명을 지나쳐 한곳에 시선을 던졌다.
검령과 번쾌친은 아직까지 폭주를 멈추지 않고 있는 상황.
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앙!
이미 끝났음에도, 금륜이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쯧쯧, 정신 나간 놈들.’
그런 마음의 추궁을 듣고서야 분노의 폭주를 멈췄다.
이제 환희!
검령과 번쾌친은 맹공은 멈추었지만, 기쁨에 차 자줏빛 광채를 찬란하게 빛내며 하늘을 유영했다.
그사이 후공은 허공섭물로 금륜을 취했다.
금륜의 형태는 그대로.
자신의 신검에 난타당했음에도 깨지거나 구부러진 곳조차 없었다. 그저 군데군데 긁힌 자국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신병이기.
바로 기운을 불어넣었다.
내력이 깃들지 않고 흩어진다.
사백여 년의 제련이 간단한 세월이 아님을 보이고 있기에, 금륜에 손을 올리고 바로 천람을 운용했다.
천람은 항마의 공능.
보이지 않는 기운이 거미줄처럼 혹은 그물과 같이 금륜을 뒤덮으며 금륜에 내재된 마기를 흩고, 긴 세월 제련의 흔적을 지워갔다.
이윽고,
후공은 다시금 내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우우우우웅.
비로소 내력이 실린 금륜이 울음소리를 냈다.
사용할 건 아니었다.
이건 앞으로 만나게 될 이를 위한 선물.
“네가 지니고 있어라.”
“네.”
이미 곁에 와 있던 당명이 금륜을 수습했다.
그때 후공의 시선이 옮겨졌다.
당명도 뒤이어 알아차리고 같은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선 엄청난 속도로 하얀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새의 등에 타고 있는 건 금빛 두꺼비.
[주인님! 주인님! 다 처죽여버리셨군요오오오오!]
[그윽, 그윽!]
보았을 때는 어느샌가 색관조와 금섬이 이미 눈앞.
색관조와 금섬은 한참이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떠들어댔다.
이쯤이면 주인님께서 끝내시지 않았을까.
다 죽여버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나…… 혹시나…….
주인님을 이미 잃은 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촉산에 이르렀다.
하지만 주인의 신검들이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며 하늘을 유영하고, 주인님께서 미소로 반기고 있으니 결과는 뻔하다. 그렇기에 끝도 없이 떠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르르르! 주인님, 근데 있잖아요. 아까 이상한 소리 듣지 못하셨나요?]
“응?”
[듣지 못하셨어요? 아니 어떤 미친 새끼가 햇님~~~~, 대스으으으으응, 흐그으으으응! 이런 소리를 크게 소리치는 것 말이에요. 햇님은 뭐고, 흐긍은 뭔지.]
“하하하하!”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거리가 먼 탓이어서겠지.
원래는 형님, 대형, 후공이라는 당명의 외침.
“후후, 못 들었다.”
[엥? 정말요? 어라? 당가주님은 안색이 왜 그래요? 그 미친 새끼 떠드는 것 들으셨던 거여요?]
한순간에 미친 새끼가 되고 만 당명은 그저 찡찡.
“못 들었다.”
[하, 이상하네. 분명히 들렸는데. 분명히 미친 새끼가 햇님, 흐긍흐긍거렸는데.]
“…………………….”
이내 일별봉을 벗어났다.
붉은 노을이 장관을 이룬 촉산을 내려가며 당명이 전음을 발했다.
- 대형,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그게 말이지…….
*
그 밤.
수많은 이들의 염원이 피어올랐다.
부디 무사하길.
부디 무사하길.
백혼곡을 쓰러뜨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천화서고 대공자와 당가주가 무사했으면.
그런 소망이 여러 곳,
여러 사람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그중에는 당연히 아미파도 있었다.
어느 객잔의 객방.
아미파 장문인 멸화사태도 끝없이 불호를 읊조리며 기원했다.
결과는 알고 있다.
천화서고 대공자와 암향야가 대단하다 한들 어찌 백혼곡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백혼곡 마두 중에는 삼백 년전 마교교주가 있다.
마제(魔帝)라고도 불린 신륜염제.
분명 마제는 남은 여섯 중 하나일 테니 승산은 없다.
누가 보아도 뻔한 결과.
두려운 길.
그럼에도 대공자는 나아갔다.
도망치지 않는다며 아미를 책망해놓고, 정작 자신은 도망치지 않았다. 사지로 향했다.
그러니 염원.
터져 나가고 부어오른 입술로 한없이 무사하길 빌었다.
그러던 한순간,
[까르르르르르! 아미 장문인 왜 울고 있나요? 누가 죽기라도 했나요? 까르르르르르르르르.]
“헉!”
놀라 눈을 뜬 멸화가 창가를 바라봤다.
검은 깃털의 새와 금빛 두꺼비가 웃고 있었다.
“서, 설마……. 대공자가…….”
[흥! 아미 장문인. 주인님을 의심하고 있었나요? 이거 실망이 너무 큰데요.]
누구보다 불안에 떨었던 색관조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것이 대답.
모든 상황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기에, 멸화사태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
그건 청성파도 마찬가지.
청성 장문인 운학진인도 마찬가지.
밤이 깊어가기에 불안도 커져갔다.
그 불안을 감추려,
“선인, 대공자와 암향야는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청성은 이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운학진인은 이미 승리한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속였다.
마주한 요로선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콜록, 콜록. 그래야지.”
“대공자가 청성에 남긴 글귀. 벽에 써놓은 글자. 청성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고 본문의 보물로 남겨둘 것입니다.”
청성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 쓸어버리겠다는 글귀.
천화서고 대공자가 백혼곡의 마두들을 유인했던 문장을 언제까지나 마음에 새기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파양마군의 손에 부서져내린 걸 모르고 있기에 가능한 말이었지만, 부서지고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청성의 마음에서만큼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가 담겼다.
하지만 알고 있다.
헛된 꿈이겠지.
그렇기에 운학진인과 요로선인은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 노력하며 승리한 뒤의 상황만 대화로 그려갔다.
그런 그들에게도,
[두 분, 뭔데 이렇게 비장한 걸까요? 주인님께선 지금 암향야와 찻잔을 기울이고 계시는데 말이에요.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색관조가 다녀갔다.
*
소식은 천공단에게도 전해졌다.
색관조의 까르르르르 웃음소리.
금섬의 극극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공단의 환호성이 터졌다.
“시발, 난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오오오오오!”
“이거 꿈 아니지? 사백 년 묵은 구렁이들을 우리 두목이 정말 다 처죽여버린거냐고! 이거 사실이냐고오오오오오! 진실이냐고오오오오오오!”
“어이, 눈물 질질 짜던 사람들은 조용히 좀 하지!”
그런 환호성 속에는 소림의 무광도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아아아아불, 시발 새끼들 다 뒈져버렸구나.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삐리리리리~~ 삐리삐삐~~ 삐리리리리리리!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금적자의 피리 소리까지 환호에 더해졌다.
그리고,
“역시 천하제일인 백부…… 보단 천화서고 대공자!”
하마터면 백부라고 말할 뻔한 제갈혜도 기쁨을 금치 못했다.
**
그 밤,
흩어졌던 모두가 사천 당가로 모였다.
텅 비어 을씨년스러웠던 당가는 이제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가가 세워진 이래 최대 손님.
아미파와 청성파, 무림맹까지.
그리고 슬쩍 끼어든 하오문까지 모여들어 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술잔이 오가고, 수많은 말이 오갔다.
오간 술잔보다 더 많은 경탄과 고마움의 말들.
그리고 사천 당가가 떠나가듯 외치기도 했다.
이전의 밤, 지나간 밤.
천화서고 대공자가 스스로 악(惡)을 자처하던 밤.
그 밤 아미의 외침.
- 아미는 결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피를 기억하고 떠올려 반드시 너를 다시 찾을 것이다! 너에게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아미는 너에게 반드시 되돌려주겠다!
- 그러니 천화서고 대공자여! 부디 살아남으라!
그 밤은 마음을 숨겨야 했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 부디 살아남으라는 외침만이 진심이었지만, 이 밤은 모든 말에 진심만을 담아도 되는 밤.
염원대로 그가 살아남았기에,
그가 영원한 악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할 기회가 찾아왔기에,
“천화서고 대공자! 아미는 영원히 그대를 기억할 것입니다!”
떠나가라 외쳤다.
“백 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잊지 않겠습니다!”
멸화사태의 선창에,
모든 아미가 뒤따랐다.
거기엔 같은 마음이었기에 언제나처럼 천공단도 함께 했다.
“아미는 부처님의 가호가 무엇인지 깨달았고, 이제 그대의 부름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갈 것입니다! 온 강호가 당신을 악으로 칭한다 해도 아미만큼은 그대 편에 서 있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염원. 우리의 간절한 바람! 살아 돌아와주어 고맙습니다!”
떠나갈 듯한 함성.
내력이 실린 외침이 주변 산야를 뒤흔들고 그 너머로까지 퍼져갔다.
**
밤이 깊어가며 많은 이들이 돌아갔다.
아미의 제자들, 청성의 제자들, 그리고 하오문.
오로지 각파의 장문인과 수뇌들, 그리고 무림맹 인사들이 사천 당가에 남은 시간.
조금은 고요해진 당가의 밤을 두 사람이 거닐었다.
“숙부, 이제 알게 되신 거죠?”
이제 알았을 것이다.
제갈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촉산의 결전을 백부와 함께 치렀으니.
그동안 봐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을 테니.
그리고 무엇보다 숙부의 호칭이 달라졌다.
단주, 또는 대공자였던 호칭이 형님으로 바뀌었다.
천하에 사천 당가주.
현경에 이른 절세고수.
암향야로 불리는 숙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형님’이란 호칭을 사용할 리 없거늘 돌아온 지금 형님이 되었다.
하지만,
“흐음, 내가 뭘 알아야 하지?”
갸웃하는 모습에 제갈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 싶게 제갈혜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딴생각과 착각했어요.”
“쯧쯧, 싱겁긴.”
“하하.”
아직이구나.
하마터면 먼저 말할 뻔했다.
웃어 보였지만 제갈헤는 내심 마음을 쓸어내렸다.
이 일은 너무도 중대한 일.
함부로 떠들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제갈혜의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저.”
“……?”
제갈혜가 누가 불렀나 바라보니 숙부였다.
그렇게 토끼 눈이 되어 바라보는 제갈혜의 모습에, 당명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소저, 춤추었던 그 밤처럼 저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
놀람도 잠시, 제갈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 밤, 춤추었던 밤.
숙부의 너스레였을 뿐, 숙부도 알게 되었다.
왜 춤췄는지 숙부가 이해하고 있음이니,
“하하하하, 숙부님 너무해! 모른 척해서 심장이 아팠잖아요! 하하하하!”
제갈혜는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제 혼자가 아니다.
비밀에 닿은 건 두 사람.
그 사람이 숙부여서,
제갈혜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