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천공단이 거울이 되어 주었다.
의미가 담긴 밤은 길다.
이 밤이 그랬다.
백혼곡을 끝낸 밤이다.
잘못되었다면 모두가 슬픔에 젖었을 밤.
두려움이 시작될 수도 있었던 밤이었기에, 그 누구도 잠을 청하는 건 무리였다.
사천당가의 어느 곳에선 춤을 추는 이들이 있었고, 또 어느 곳에선 천공단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또다른 곳에선 이제 심각한 이야기 대신 시덥잖은 대화가 오갔다.
“콜록, 콜록, 대공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만.”
“편히 말씀하십시오.”
“별거 아니네만.”
요로선인이 잔기침을 쏟아내며 말을 이었다.
“당명, 그러니까 당가주가 자네 밑으로…… 콜록, 콜록! 정말 천공단이 되기로 한 건가?”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콜록, 콜록. 앞으로 쭉?”
“네.”
“어째서?”
“제가 청했습니다.”
“그러란다고…… 콜록, 콜록, 그래?”
“제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난 이해가 안 되는데? 콜록, 콜록.”
요로선인이 연신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당명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천하제일인의 패거리 중 하나.
유쾌한 면모도 갖췄지만, 오만함이 말로 할 수 없다.
당명이 경외시하던 인물은 세 사람뿐.
세상에 남은 이는 풍제 하나.
그런 당명이 누군가의 수하가 되다니.
일개 단체의 소속이 되다니.
풍제에게 허락도 맡지 않고?
이 일은 어찌 생각해보면 백혼곡보다 더 놀라운 일이어서,
‘당명이 돌아버린 건가?’
요로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의문에 청성 장문인 운학 진인이 끼어들었다.
“선인, 천공단이 문제가 아닙니다.”
“응?”
“암향야는 대공자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콜록, 콜록.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하하하, 본 노도는 이해가 됩니다.”
“왜?”
왜긴 왜인가.
운학은 직접 보았고, 겪은 것이다.
대공자가 절세적인 무위를 갖춰서가 아니다.
천하제일인의 신검을 다룰 수 있어서도 아니다.
대공자가 보인 과감하고 빠른 결단을 보았고,
그의 귀계를 보았다.
그리고 대공자의 헌신도.
대공자는 귀계 속에 스스로 악이 되길 주저하지 않았고, 세상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적에게 접근해 침투했고, 교란했다.
그러곤 별일 아니었다는 듯 돌아온 이.
대공자는 우두머리의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본 노도 또한 청성의 장문인이라는 신분이 아니라면 천공단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형님이라 부르는 것도 대수겠습니까.”
“콜록, 콜록. 아니 뭔…….”
요로선인이 뭔 개소리냐며 바라보다, 편들어 줄 사람을 찾아 시선을 아미 장문인에게 돌렸다.
아미 장문 멸화사태가 웃어 보였다.
“빈승도 운학 진인과 같은 마음입니다. 제가 대공자에게 호되게 당하던 광경을 선인께서도 보셨으면 이해를 하셨을 텐데, 아쉽군요.”
“허허…….”
요로선인은 그만 너털거리고 말았다.
청성 장문인 운학 진인이야 그렇다 쳐도, 아직도 엉망이 된 얼굴이 회복되지 않은 멸화사태가 저런 식으로 말을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당연했다.
“뭐 그건 그렇다고 해도…… 콜록, 콜록. 풍제가 가만 두지 않을 것 같은데…… 콜록, 콜록. 대체 당명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요로선인은 풍제가 보일 반응, 그 후폭풍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런 걱정은 요로선인만이 아니었다.
당가의 미래.
당명의 두 아들도 이해할 수 없었고, 걱정이 컸다.
아버지가 천공단이 된 것까진 어찌어찌 이해한다 쳐도, 천화서고 대공자를 형님이라 칭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코 이 일은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장남 당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올해 나이 마흔하나.
당가의 계승자인 그로선 결코 이대로 지나칠 수 없는 일.
“당연합니다.”
차남 당운의 표정도 서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촉산의 결전에서 아버지가 머리라도 다치신 걸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이 밤 제갈혜와 함께 춤을 추고 있기까지 하니 괴이하다. 그렇기에 이 밤이 지나기 전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춤은 끝났다.
아버지가 홀로 돌아오기에 당무와 당운은 신형을 펼쳐 맞이해갔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안으로 들어가자.”
“네.”
앞장서는 아버지를 뒤따라 걸으며 당무와 당운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마주 앉은 자리. 장남 당무가 형형히 안광을 빛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여러 말들.
다 이해하지만 형님이란 호칭은 거둬달라는 뜻을 드러냈기에, 당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엎드려라.”
“네?”
“둘 다 엎드려.”
“……네.”
당무와 당운의 형형히 빛나던 눈빛은 사라졌고, 대신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며 엎드렸다.
“몇 대?”
“열 대 맞겠습니다.”
“서른 대 가자.”
“네!”
“표 총관!”
이윽고 총관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났다.
“가주님, 여기.”
“그래.”
총관이 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사라지고, 매 타작이 시작되었다.
빠아아아악!
빠아아악!
“흐읍.”
“허어업!”
당무와 당운이 신음을 흘렸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고 만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은 아닌데 말이다.
그럼 이제 새파랗게 어린 천화서고 대공자가 자신들의 백부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빠아아아아악!
당명은 힘을 실어 몽둥이를 연신 휘둘렀다.
“너흰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빠아아아악!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빠아아아아악!
“너희가 지금 살아있는 게 누구 때문인지 벌써 잊은 거냐?”
빠아아아아악!
“지금처럼 맞는 것도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빠아아아아악!
“그런데 뭐? 호칭이 과해?”
빠아악!
“특히 너.”
당명이 몽둥이로 툭툭 장남의 머리를 두들겼다.
“나의 손자 초, 그리고 너에게 초는 누구이지?”
“제…… 아들입니다!”
“그런 당초가 누구 때문에 살았지?”
“천화서고 대공자…….”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알긴 아는구나. 그럼 본가는 누구 때문에 살아남은 거냐?”
“천화서고 대공…….”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흐으읍!”
“나타난 결과가 이리도 엄청난데, 내가 대공자에게 형님이라 부르면 어떻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떠냐. 호칭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차라리 이 애비가 죽어서 올 걸 그랬나? 너희를 잃을 걸 그랬나?”
“아닙니다. 소자, 생각이 짧았습니다!”
빠아아아악!
“너희 나이가 몇인데 생각이 그 모양이냐!”
“소자는 그저 백부이신…… 풍제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걸 왜 네놈이 걱정해!”
빠아아아아아악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널 어떻게 죽여. 이젠 아주 정신이 나가버린 거냐!”
빠아아아아아아악!
“아버지, 살려주십시오!”
“널 이미 살린 게 누구라고?”
“천화서고 대…….”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매타작 소리는 당가에 몸 담고 있는 모두가 들었다.
호통치는 소리와 살려달라는 소리까지.
각 처소에 몸담고 있는 장로들과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도의 한숨도 내쉬었다.
하마터면 자신들이 맞을 뻔한 것이다.
소주(小主)들과 같은 생각이었던 터.
내심 ‘형님’이란 호칭은 과하다 싶어서 충정을 담아 아침이 되면 의견을 내려 했는데, 먼저 나서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주의 호통이 백번 지당하다.
형님이란 호칭이 대수인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해도 불러야 할 판이다.
그건 천공단과 함께 지붕에 자리잡은 당초도 같은 생각이었다.
“시원시원하네.”
“당초 형아, 아버지가 맞고 있는데 아들이 할 소리야?”
곁에 있던 소천개가 핀잔을 주었다.
당초가 배시시 웃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서.”
“자주?”
“응, 자주. 내가 잘못해도 아버지가 맞고, 아버지가 잘못해도 아버지가 맞거든. 그리고 특별히 잘못한 게 없어도 할아버지는 가끔 때리시지.”
“하하하하! 우리 절세고수 신입 원래부터 기괴했잖아. 괜히 천공단이 된 게 아니었네.”
그 말에 천공단이 왁자지껄 동조했다.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우울한 기색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천공단이면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외가에 왔다가 얼떨결에 휩쓸려 머물게 된 은소소가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되긴. 사천제일미녀는 나가리지.”
“크으, 암향야가 천공단이라니! 암향야가 두목에게 형님이라 부르다니, 이게 대체 뭔 일이냐고!”
“하하하, 그렇게 된 이상 손녀는 얌전히 집에 계시고요.”
“나무관세음보살……. 천공단에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지 소승은 무척 궁금합니다.”
“인원 다 찼는데?”
“시발 놈아!”
“욕하는 걸 보면 천공단이 될 자질은 충분하긴 해.”
“허허, 나무관세음~~~ 보살.”
돌변한 무광의 진중한 불호에 지붕 위가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 틈에 끼어있던 색관조가 날아올랐다.
“야, 갑자기 어디 가?”
[주인님이 부르셔. 까르르르르르르. 아름다운 화 소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 소저.]
*
잠시 후, 노파와 청년이 마주앉았다.
노파, 화설난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설마?’
의미 있는 밤.
혹여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밤이 되는 걸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기대감이 피어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백혼곡의 여섯 마두들이 삼백 년을 보내올 수 있었던 이유. 촉산의 백혼곡 내부를 탐색하고 돌아온 대공자가 말했다.
생령과.
그 생령과를 대공자가 취한 것일까?
그걸 나에게 주려는 걸까?
그럴 리 없다 싶으면서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화 소저.”
두근 두근.
화설난의 대답은 심장 박동이 대신했다.
“손을 내밀어보십시오. 맥을 짚어보고 싶습니다.”
화설난이 손을 내밀었다.
대공자의 손이 손목에 닿자, 화설난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저, 제가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계실 테죠?”
“……네.”
“자, 여기.”
대공자의 손이 떨어져나갔을 땐 어느샌가 화설난의 손바닥 위에 작은 주홍빛 과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 화설난은 손바닥 위에 놓인 과실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영롱한 빛.
생령과의 가치는 측정 불가.
삶을 다해가는 노인에게 생령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아니, 아니다. 사람은 언젠가 모두 노인이 될 수 밖에 없기에 그 누구에게라도 보물이다.
화설난은 고개를 들어 대공자를 바라봤다.
대공자도 언젠가는 늙겠지.
그렇기에,
“저는…… 괜찮아요. 받을 수 없어요.”
이건 아니다.
결코 받으면 안 된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이런 희대의 보물을 받는단 말인가.
“대공자, 저는…… 이미 젊어진 것 같아요.”
자신에게 말을 해준 것만으로 화설난은 마음이 벅차 올랐다. 그래, 마음으로 충분하다. 과분하다. 이미 젊어지기도 했다. 대공자가, 천공단이, 그리고 색관조가 늘 불러준다.
소저라고.
아름다운 소저라고.
아가씨라고.
모두가 그렇게 불러주는 탓에, 함께 있는 동안 이미 자신은 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화설난을 바라보며 후공이 미소 지었다.
지난날 화설난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노파의 모습인데 왜 수줍어하는가 의아해했다가 나이를 듣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표정 관리를 못 해 얼마나 미안했던지.
구음절맥을 치료하고,
그 뒤 노화를 해결할 방도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던 시간들.
모두 헛된 수고였고, 그래서 화설난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해야만 했던 순간들.
그런데 이제 비로소 그 길을 찾았으니,
“소저.”
“……?”
“잠시 꿈을 꿔보죠.”
“네?”
화설난의 말은 거기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던 화설난의 눈이 감기며 스르륵 옆으로 허물어졌다.
점혈.
후공은 잠들어 무너진 화설난을 붙잡아 눕힌 후 다시 목 부위를 점혈했다. 의식없는 화설난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는 사이로, 생령과가 넣어졌다.
잠시 후,
‘꿈 속인가?’
화설난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쭈글쭈글한 손이 아니라 탄력 있고 고운 손.
한데 이상한 꿈이기도 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
대공자가 여전히 눈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화설난은 말을 걸어보았다.
“대공자, 여긴 꿈 속인가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이상한 꿈도 다 있군요. 제 모습은 어떤가요?”
“제가 여태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하하하! 그럴리가요.”
“크흠, 진실입니다만. 거울을 보시겠습니까?”
“거울이 있나요?”
“거울은 저기 문 밖에 있습니다. 수많은 거울들이 소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가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화설난이 몸을 일으켰다.
꿈 속 바깥 풍경은 어떨까?
꿈 속의 거울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떨까?
문을 열어젖힌 순간,
꿈 속의 거울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토해냈다.
“우와아아아아아!”
“천하제일미녀야!”
“암부의 부주가 이런 미인이었다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하하하하하, 아름다운 내 할머니 돌려놔아아아!”
“나와 사귑시다!”
“화 소저, 나랑 혼인해주세요!”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그윽, 그윽!]
거울은, 기다리고 있던 천공단.
천공단 모두가 화설난의 거울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