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덫.
이상한 사람.
이상한 전략.
천화서고 대공자가 제안한 전략은 도운연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대공자는 거대한 덫을 놓으려 한다.
적을 끌어들이려 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실행은 다른 문제.
천지차이다.
한데 대공자는 태연히 진행하려 한다.
대단한 일 아니라는 듯, 물 한 잔 마시는 정도로 생각하는 모습.
거기에 수긍한 곤륜도 기이하고,
또 자신 또한 휩쓸렸기에 도운연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기분.
한데 이상하지?
‘……왜 다 잘될 것 같지?’
이런 믿음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천공단에 강호 명문의 자제들이 절대적인 신의와 충정을 보이며 따르는 것인가.
대공자의 나이가 한참이나 어림에도.
나이가 더 많은 이들조차 대공자와 함께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가.
“소교주님, 소교주님?”
곤륜의 한 처소.
눈앞에서 부르는 소리에 도운연은 상념을 떨치고 눈을 마주쳐갔다.
낯익은 눈동자.
늘 보던 머릿결.
자신이 듣기에는 어딘가 조금은 어색한 목소리.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얼굴보다 가장 많이 봐 온 얼굴이 눈앞에서 갸웃거리고 있었다.
“소교주님, 원래 표정이 하나뿐입니까?”
눈앞에 있는 건 또 다른 자신.
새로운 도운연이 물어온다.
“후후.”
도운연이 옅게 미소 지었기에 무흔신투도 따라 웃었다.
“하하, 그렇게 웃으시는군요. 웃는 모습 너무 좋습니다요.”
“후후후.”
도운연은 또 다시 웃고 말았다.
백부의 비둘기.
아버지가 하찮은 도둑놈 취급하던 무흔신투의 역용 수준이 이 정도로 감쪽같을 줄은 몰랐다.
이미 무흔신투가 자신의 옷까지 걸치고 있다 보니, 도운연은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몽허와 음희는 생각이 달랐다.
도운연 곁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주군의 존안으로 역용을 하다니! 마음이 불편했다. 또 그 역용이 너무도 감쪽같아 살심이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살기에 도운연의 미간이 꿈틀.
신경질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몽허, 음희. 경거망동하지 마라.”
몽허와 음희가 살기를 누그러뜨렸고, 무흔신투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소교주님, 새로운 표정이로군요! 하하하, 방금 그 표정 멋지십니다요!”
그러다 이내 무흔신투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영락없이 도운연이었다. 그 표정으로 몽허와 음희를 차례로 쏘아보며 일갈했다.
“몽허, 음희. 천공단주에게 개같이 처맞은 주제에 어디서 살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냐. 너희가 내 호법이라니, 본좌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완벽히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얼굴이었기에 몽허와 음희가 폭발해버렸다.
“이 비둘기 새끼가!”
“도적놈의 새끼야!”
“소, 소교주님! 살려주십시오!”
도운연이 또 다른 도운연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것이 폭주를 부추긴 건 당연.
“야이, 도적놈의 새끼야! 주군의 얼굴을 하고 비굴한 목소리 내지 말란 말이다!”
“주군, 안 되겠습니다. 그냥 이 새끼 오늘 죽여야겠어요!”
**
그로부터 한 시진 후.
곤륜의 제자 다섯은 번화가의 반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할 것 없이 표정이 굳어 있고 불만이 가득했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간이라 제법 많은 손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곤륜의 험악한 기세에 손님들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표정만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오가는 대화.
“나의 곤륜, 우리의 곤륜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이냐!”
“사형, 동감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왜 마교 놈들에게 사죄해야 한단 말입니까! 왜 마교 놈들에게 굴복해 죄 없는 장로님이 참수당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단 말입니까!”
마교가 언급되고, 참수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면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광 장로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보다 덕망이 높은 분을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습니까?”
“찾을 수 없어요. 어디에서도. 하지만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어요.”
“사매…… 울지 마라.”
“하지만……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에 위로하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손님들은 너무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식사를 끝내지도 못하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하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이도 있었다.
“닷새가 지나면 우리 곤륜은 봉문. 수치를 안고 수치가 지워질 때까지 곤륜은 머물 터. 하지만 이 수치가 지워질 것인가!”
“이 수치는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시발, 난리 났네.’
곤륜의 봉문.
그리고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곤륜의 탄식은 이어졌지만 나올 말은 다 나왔다.
하오문의 점소이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
“루주님! 루, 루주님! 루루루주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오문 루주가 피식 웃었다.
수하의 목소리가 거의 숨이 넘어가는 것이다.
이놈은 늘 이런 식이다.
루루루루루주님! 루 자가 길 때면 언제나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루 자가 세 개라서 봐준다.
“들어와라. 장난이면 죽을 줄 알아!”
장난일 리가.
이야기가 끝났을 땐 하오문 루주도 숨이 넘어갔다.
“히이이이이이익!”
“루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눈 똑바로 뜨세요!”
“이 새끼야, 내가 지금 정신 차리게 생겼냐!”
마교라며!
곤륜의 장로 제광이 참수당했다며!
그 대가리 크기가 큰 곤륜의 제광 장로가 참수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단 말이냐!
“시발, 정신 좀 차리시란 말입니다!”
짜악!
점소이가 루주의 뺨을 갈겼다.
그제야 루주의 눈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 흥분했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서를 띄워야지. 무림맹에 알리고, 각대 문파에도 알리고, 천룡의 세가들에게도 알려야 해!”
“한 군데가 빠진 것 같은데요?”
“어디?”
“천화서고.”
“맞다. 너 이놈의 새끼, 왜 이렇게 똑똑해진 거냐!”
강호의 별.
하오문의 친구.
천화서고 대공자를 잊고 있었다.
맹주 후공이 떠나고 어느덧 일 년.
이렇게 빨리 마교가 돌변할 줄이야.
풍제가 돌변할 줄이야.
그럴 리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드러난 현실이 큰 소리를 내고 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대공자가 어디에 있다고 했지?”
“사천입니다.”
“그래, 백혼곡.”
루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혼곡도 끝내버린 대공자다.
“마교 따위, 풍제 따위!”
“따위라고 하기엔…….”
“야, 좀 맞춰주라! 나 손 떨고 있는 것 안 보이냐!”
그때였다.
방 안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응?”
루주가 갸웃했다.
방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뭔 바람이……. 문 닫고 와라.”
“루, 루, 루주님?”
“왜?”
루주가 수하의 시선을 따라 갔다가 기겁했다.
“으헉!”
자신의 바로 옆, 우측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원래 같이 있었던 것처럼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방문이 열렸던 건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는 생각에 루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나 지고한 경지인가.
문을 열고 들어와 우측에 앉았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 누구……세요?”
오들오들 떨며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금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리리~~ 삐리삐이~~.
서정적인 음률이었다.
루주의 시선이 금피리에 고정되었다가 이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더듬거렸다.
“그, 금적선생……?”
“몇 살?”
“……쉰둘입니다만.”
“난 예순둘.”
“형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금적자가 웃고, 루주도 따라 웃었다.
루주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금적선생이 틀림없었다.
금피리도 그렇고, 인상착의도 그랬다.
또 최근 선생이 그렇게 나이를 따진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선생,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내가 영광이지.”
“아닙니다. 청해성의 하오문은 평생 천공단을 볼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공자가 언제 청해성에 온 것입니까? 이번 곤륜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마교가 곤륜의 장로를 참수했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워워~ 천천히, 천천히.”
금적자는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루주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전서는 띄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도 이해했다.
모두가 고의적인 헛소문.
하오문조차 속았다.
마교와 곤륜이 손을 잡았고, 풍제는 여전히 그대로다.
“우리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늘 하던 것. 그리고 마을 하나를 불태워버리고 싶은데 말씀이야.”
“아니, 우릴 뭘로 알고 그러십니까! 마을 두 개라도 문제없습니다.”
**
금적자의 신형이 솟구쳐올랐다.
이내 내려선 곳은 부근 언덕 위.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주, 이야기를 전했네.”
후공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신형을 뽑아올렸다.
청랑이 바로 뒤따르고 금적자도 그 뒤를 이었다.
하늘에선 색관조가 선회했다.
[왈왈, 크르르르. 왈왈! 까르르르르르르!]
[극극큭!]
**
제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살아있는데 죽어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인가.
알고 있다.
두 번째 죽음.
첫 번째는 땅에 파묻혔는데, 이번엔 방에 감금되었다.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게 죽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장문 사형은 폐관 수련한다 생각하고 틀어박혀 있으라고 했지만, 신경질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나냐고! 곤륜에 장로가 나 혼자야! 그런 것이었어!”
“조용히 해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
말같지 않은 소리였지만 장문 사형의 말이라 제광은 입을 닫았다.
‘시발…….’
**
그건 도운연도 마찬가지.
제광보단 자유로웠지만, 소호탈마대가 곤륜을 떠났다. 곁에 남은 건 몽허와 음희뿐.
청랑도 곤륜에 남긴 했다.
하지만 청랑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된 게 주인인 자신보다 대공자를 잘 따르고 하루 종일 대공자 뒤꽁무니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형국.
‘허전하네. ……무흔신투는 지금쯤 뭘하고 있으려나.’
**
신투는 마을 하나를 불태우고 있었다.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며 도운연의 모습으로 차가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잘 타는구나. 이제야 조금 분이 풀린다.”
“주군, 지금이라도 곤륜으로 다시 돌아가 놈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혈령신마가 살기를 분분히 흘리며 말했다.
그런 혈령신마를 바라보며 신투는 생각하게 된다.
이게 무슨 호강인가.
그리고 또 감사의 마음도 떠올랐다.
‘대공자님!’
덕분에 마교 소교주가 되어 본다.
마교의 절세 고수를 수족으로 부려본다.
존명이란 대답을 도대체 몇 번을 들은 건지 모른다.
하하,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아!
“아니, 지금은 아니다. 곤륜이 마음을 놓을 때까지 기다린다. 두어 달 후, 그때 곤륜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놓는다.”
“존명!”
“존명!”
“존명!”
혈령신마를 비롯 건곤신마와 청와신마가 절도 있게 예를 갖췄기에 신투는 기분이 한없이 좋아졌다.
“후후, 귀여운 놈들.”
그것이 화를 불러왔다.
- 뭐 이 새끼야!
- 죽여버린다!
혈령신마와 건곤신마가 고개를 숙인 채로 전음을 발했다. 주군은 잘 웃지 않는다. 귀여운 놈이란 말 같은 건 주군의 언어에 없는 것이었다.
무흔신투가 껄껄 웃었다.
하지만 웃음 아래로는…….
- 죄, 죄송합니다.
목숨을 구걸했다.
- 주군의 얼굴로 구걸하지 말란 말이다!
- 진짜 처죽인다!
불타는 마을.
그리고 마교의 소호탈마대.
그 모습을 멀리 산야의 중턱에서 한 사람이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그에겐 멀지 않았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깊이 눌러쓴 죽립.
죽립 안쪽에서 안광이 폭주했다.
‘곤륜이 사제를 제물로 마교에 목숨을 구걸했다고?’
사제는 제광.
죽립의 사내는 과거의 곤륜.
마음이 언짢아졌다.
어차피 곤륜을 쓸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살심은 더욱 피어올랐다.
그는 이것이 덫이란 걸 알지 못했다.
청해성 어느 곳이든 이 이야기뿐이고, 지금 눈으로 보고 있고, 들려오기도 하는 것이다.
기운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목(木)의 기운을 보충했다.
죽립 사내가 신형을 끌어올려 사라진 뒤, 그가 서 있던 자리와 그 주변의 나무와 풀들이 하얗게 변해 조금씩 부서져 갔다.
그런 그를,
‘어서 와라.’
곤륜에서 후공이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