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
곤륜의 연회가 끝난 건 새벽.
모두가 처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깊은 정적이 휘감은 곤륜을 함께 거닐었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함께 걷지 않겠냐고 청한 도운연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고, 후공은 차가운 밤공기 속 곤륜을 음미하고 있을 뿐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어찌 된 일인지 도운연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자, 소문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루하루 피폐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대공자, 무공을 익히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공자께선 어찌하여 백부의 신검을 다룰 수 있는 겁니까?
암향야로 불리는 숙부가 격의 없이 대하고 신뢰하는 모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문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물어도 듣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인가? 그 때문에 도운연은 입술만 뗐다 붙였다 했다.
대공자의 모습은 평온할 뿐이고, 거만한 태도가 전혀 없는데 거만함이 저절로 풍겨 나오니, 어떤 물음을 던져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대공자, 곤륜은 처음이십니까?”
결국 나온 건 시답잖은 질문.
후공이 바라보며 웃었다.
처음일 리가.
많이 와 봤다.
너와도 함께 온 적이 있었고.
“처음입니다. 곤륜은 기품이 있군요.”
“저는 두 번째입니다.”
“그래요?”
“어릴 때였습니다.”
도운연이 기억을 떠올리느라 시선을 밤하늘로 옮겼다.
“아버지와 백부가 함께였습니다. 백부께서 어린 저를 들어올려 목마를 태워 주신 것이 생각나는군요. 아버지는 버릇 나빠진다고 만류하셨지만, 백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태우고 곤륜산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후공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그래, 생각 난다.
너무 눈 깜짝할 사이라면서 어린 운연은 말했다.
‘다시, 다시!’
다시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돌았다.
“크흠, 좋은 분이로군요.”
“맞습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크흐으음.”
다시 보았고, 곁에 있었기에 후공의 헛기침이 커졌다.
“대공자,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아직 듣지 못하셨나보군요. 천마신교로 갑니다.”
“네?”
도운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황 중이라 물을 틈이 없었고, 어딘가로 간다 해도 목적지가 십만대산일 것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당가주께서 소개해 주신다 하여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인가가 생략되었지만 도운연은 알아들었다.
누구겠는가?
그리고 잘되었다. 다행이다. 조금 더 대공자와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왜 기쁜 일이지?
이유를 설명하라면 도운연은 정확히 말할 자신이 없었지만, 자신이 안심하고 기뻐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하하하하, 잘됐습니다!”
도운연의 웃음소리가 멀리 퍼져갔다.
고요히 밤을 보내던 곤충들이 듣고 크게 울었고, 잠을 청하던 산새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멀리 어린아이도 들었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아이는 크게 웃는 도운연을 보고 있기도 했다.
멀리 곤륜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 위, 한 그루 나무 위에서 낭창낭창한 나뭇가지를 딛고 선 채였다.
그런 아이의 눈동자에는 곤륜의 전각들 사이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또렷이 들어차 있었다.
‘후후, 천화서고 대공자라……. 어린놈이 흥미롭구나.’
아이의 입가에 악동의 비웃음이 맺혔다.
자신이 훨씬 더 어렸지만 문제될 건 없다. 상대가 듣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의 체형과 외모일 뿐.
실제로는 노인.
실제로는 마교 쾌운동자(快雲童子).
연회가 시작될 때부터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대강의 사정은 파악한 터.
단연 돋보인 인물은 한 사람.
천화서고 대공자.
암향야도 아니고, 소교주도 아니었다.
저 어린놈이 과거의 곤륜을 끝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곤륜과 소호탈마대까지 아우르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처럼 보이니 기이한 인물이었다. 거기에 소교주를 비롯 몽허와 음희까지라니.
하지만,
‘흥미롭긴 하다만…… 걸리적거려.’
그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쾌운동자는 귀를 기울였다.
“도 형, 먼저 들어가십시오.”
“대공자께선 더 걸으시려는 것입니까? 그럼 저도 함께…….”
“아닙니다. 따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흥!
뭐하는 새끼야!
이 시간에 만날 사람?
쾌운동자는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소교주가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시선을 천화서고 대공자 쪽으로 돌렸다가 소스라쳤다.
‘헉!’
천화서고 대공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먼 거리임에도 눈앞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는 상황.
‘날 볼 수 있다고?’
이 거리에서?
흑의에 은신까지 뚫고?
‘설마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게…… 나?’
아니겠지.
그건 너무 나갔다.
쾌운동자는 믿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까지 절레거린 다음 다시 눈을 떴을 때,
‘허…….’
멍해졌다.
보이는 건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닌 여우.
뺨에 ‘여우임’이란 글자가 적힌 여우 가면 속 옅게 자줏빛이 일렁이는 두 눈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놀라고만 있을 순 없었다.
들켜서만은 아니었다.
수수수수수수!
하얀 광채 다섯 줄기가 발출! 쏘아져오고 있었다. 숲 위에 나타났다 숲 아래쪽으로 나무를 관통하고 나뭇가지와 풀들을 지나치며 날아들고 있었다.
암기? 여기까지 닿을 순 없을 텐…….
‘시발, 온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기에, 어느새 눈앞에 하얀 광채가 아른거릴 지경이었기에 쾌운동자는 은신을 풀고 신형을 날렸다.
수수수수수수수수!
등 뒤에서 스산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한 번씩 바라볼 때마다 백색 광채가 점점 더 가까워졌기에 신형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휘이이!
계곡을 지나고, 산봉우리를 오르고, 숲을 지났다. 날다시피 절벽 곁을 타고 이동하면서 힐끗 뒤돌아봤다. 하얀 빛줄기는 이제 멀리 보였다.
후후, 그럼 그렇지.
경공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마교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무흔신투와 겨룬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지나면 완전히 따돌릴 수 있다.
쾌운은 다시 숲으로 들어섰다.
수수수수수! 하얀 광채가 쫓아오는 소리는 이제 멀리서 들려온다. 눈으로 확인하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빛줄기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후후후!’
비웃음과 함께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 두 눈에 들어찬 건 여우 한 마리! 보았다 싶을 땐 여우의 손에 목이 잡혔다.
“크에에에엑!”
머리가 앞으로 숙여졌다가 이내 뒤로 젖혀졌다.
달리던 속도가 있어 목이 꺾여나간다 싶을 때, 여우의 신형이 다가올 때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충격이 커, 쾌운동자는 붙들린 채 몸부림쳤다.
파팟.
그사이 점혈.
그제야 쾌운은 지면에 내려졌다.
몇 번 더 켁켁대던 쾌운이 여우를 바라봤다.
여우의 키가 훨씬 컸기에 눈동자를 위로 들어올려야 했다.
두근, 두근.
어쩔 수 없이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내 앞쪽에서 나타나다니.
신형의 빠름이 말로 할 수 없다. 다섯 줄기의 하얀 광채는 그저 유인하고 몰아가는 의미에 불과했다.
미친 신법.
미친 경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러니,
시치미를 떼자.
“왜 날 쫓아온 거냐? 내가 뭘 했다고?”
“넌 대답만 한다.”
꿀꺽.
쾌운동자는 입을 벌리려다말고 마른침을 삼켰다.
여우 가면 속 자줏빛으로 일렁이는 눈빛에 압도당해 하마터면 ‘네’라고 대답할 뻔한 것이다.
눈길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지만 어찌된 일인지 눈동자를 옮길 수가 없었다.
“별호.”
“전광서생이라고…… 한다.”
둘러댔다.
“별호.”
“방금 말했는…….”
“한번 더 똑같은 말이 나오면 죽는다.”
“쾌운동자입…….”
니다, 라고 할 뻔한 걸 쾌운은 겨우 참아냈다.
“곤륜의 제곤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 너인가?”
쾌운이 미간을 찡그렸다.
제곤 때문이 아니었다.
‘뭐야? 기분 나쁘게 왜 이번엔 믿는 거야? 날 아나?’
궁금해져 대답 대신 물었다.
“이번 별호는 믿어진다는 건가?”
“방금 한 번의 기회가 지나갔다.”
“아…….”
넌 대답만 한다는 말임을 깨달았기에 쾌운은 핼쑥해졌다.
물론 후공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비둘기였던 무흔신투와 견줄만한 신법의 소유자. 어린아이의 외모와 체형. 쾌운동자.
“내통자는 내가 아니다.”
“그럼 누구지?”
“내통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말이 계속 짧네?”
여우가 갸웃했기에 쾌운동자는 미간을 좁혔다.
이 와중에 존댓말을 쓰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이 노부가 진짜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쾌운은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다 머리를 긁적이고 싶어져 손을 들려고 했지만 손이 안 들렸다. 점혈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닙니다.”
“쾌운, 중요한 이야기란 걸 들어보자.”
“네.”
“후후.”
고분고분 답하는 모습에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무흔신투가 자신의 비둘기라면, 쾌운은 풍제의 비둘기였다. 그렇기에 쾌운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른 척 하나씩 짚어가야 하는 상황.
“교 내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구나.”
“흐음…… 생각보다 감흥이 없으시군요.”
여우가 다시 갸웃했기에 쾌운이 얼른 덧붙였다.
“혼잣말이었습니다.”
“후후후후. 주동자는?”
“광마혈성. 현재 거의 모두가 그의 편에 섰습니다.”
“너도?”
“물론입니다.”
“멋지군. 또 누가 가담했지?”
“말하면 아십니까?”
“이것으로 두 번의 기회가 지났다.”
“저기…… 기회를 너무 많이 주시는 것 같은…….”
“후후.”
쾌운이 쀼루퉁하게 바라보다 핵심 가담자들을 열거했을 때, 후공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
“…….”
그 모습에 쾌운이 퀭해진 건 당연했다.
이 사람, 왜 웃냐?
어떻게 봐도 웃을 시점이 아닌데…….
“자, 그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네?”
“들었을 텐데.”
“그게 아니라…… 다음 이야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건가 해서요.”
“구겨져 본 적은?”
“말하려고 했습니다!”
**
쾌운은 놓였다.
구겨지지 않았다.
아우의 비둘기를 구겨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후공은 홀로 돌아와 당명에게 말을 전했다.
전음이 끝났을 때 당명도 같아졌다.
쾌운 앞에서 후공이 웃음을 터뜨렸던 것과 같아졌다. 아니 더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배꼽을 움켜쥐고 웃는 모습에 후공은 찡찡.
- 너무 크게 웃는 거 아니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당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웃긴 걸 어쩌란 말인가. 재밌는 걸 어쩌란 말인가.
“에잇!”
후공은 당명을 남겨두고 나가 천공단을 불러 모았다.
전음으로 모든 이야기를 전했을 때, 천공단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왜 처웃고 난리야.”
“에휴, 저 정신 나간 새끼들.”
각자의 처소에서 몽허와 음희가 짜증을 냈다.
그러나 이내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엔 천공단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돌아가면서 웃음소리가 터지는 상황.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곤륜과 도운연뿐이었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어떤 이야기인지 도운연은 궁금해졌다.
숙부가 곤륜이 떠나가라 웃고, 잠시 뒤 천공단이 웃더니만 급기야 몽허와 음희까지 웃으니 당장 불러다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무슨 이야기일까?’
도운연에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마교의 반란에 관한 이야기.
누군가는 진지할 수 있으나, 또 누군가에겐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웃음이 터져나온 것뿐이었다.
‘후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풍제 아래 반란은 있을 수 없다.
누구보다 풍제를 잘 알기에 후공은 웃을 수 있었고, 그건 당명도 마찬가지였다.
몽허와 음희도.
천공단이 웃은 건 재밌을 것 같아서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