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찬란한 암살자는.
‘딴 사람 같네.’
부근 개울가.
물이 머물러 있는 지점에 얼굴을 비춰 본 운연은, 여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자신이 보기에도 낯설어 보이는 미인이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면사까지 착용하면 정녕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어색하긴 해도 거리낌은 없었다.
불만도 없었다.
짖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밤 개처럼 짖지 않았다면 결코 이 아침 여장을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가 되었는데 뭘 못할까.
그런 심정으로 모든 걸 놔버렸다.
마음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무엇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가?’
단순히 짖었을 뿐인데 이 세상에 못 할 게 없다는 생각도 따라왔다. 마음이 이토록 홀가분한 적이 없을 정도.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세상이 우습게 보이기까지.
천공단은 이미 진즉에 이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겠지?
“연아, 어때 보이냐?”
“누님, 청혼하고 싶은데 받아주시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누님이라니, 청혼이라니.
남궁연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도운연은 크게 웃고 말았다.
천공단은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일까.
연이는 대공자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것일까.
규격이 없고, 거침이 없다.
도운연은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우매함을 탓했다.
광마혈성이 교를 장악한 상황.
최우선 암살 목표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아닌가.
광마혈성이 언제까지 정면 승부만 고집할 리 만무하다는 걸 감안해야 했다. 이제 암살에 대비해야 할 때다.
대공자는 적에게 혼란을 주려 한다.
존재를 지워 적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려 한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대공자도 짖을 수 있을까?
짖어봤을까?
아니겠지.
떠올려봤지만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공자 특유의 고고함.
또 여유로운 분위기.
입가에 미소가 머물러 있을 때가 많고 농담도 곧잘 하곤 하지만, 대공자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연아, 대공자는 어떠냐? 짖어본 적 따윈 없겠지?”
“두목이요?”
“그렇게 보인다. 그럴 필요도 없을 테고.”
남궁연이 갸웃하고는 떠올려 보는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요?”
“후후, 그렇겠지.”
무공의 경지가 한없이 드높다.
그런 대공자가 굳이 개처럼 짖을 리가.
“누님, 그게 아니라요. 얼마나 미친개처럼 짖을까 싶어서요.”
“응?”
“두목은 원래 미치광이입니다만.”
“미, 미치광이?”
더듬거리는 도운연을 보며 남궁연이 실실 웃었다.
“개가 뭔가요. 두목은 여우가 되기도 하고, 흉악한 괴물도 되었다가 하늘을 나는 새가 될 때도 있고, 어떨 땐 동네 양아치처럼 시비 걸고 마음에 안 들면 모가지도 서슴없이 돌려버리곤 깔깔깔 웃는걸요.”
“양…… 양아치? 대공자가? 왜? 어째서?”
“하하, 필요에 따라서죠. 아마 꼭 그래야 할 상황이 온다면 아마 두목은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고 하면 몇 번이고 기어다닐 사람입니다. 그래놓고 웃으며 자랑하겠죠. 어땠냐고? 끝내주지 않았냐고.”
바사삭.
도운연의 마음 한곳이 부서져 나갔다.
‘그런가…….’
천변만화.
무공의 묘리만 변화무쌍한 것이 아니라 근본 마음가짐이 천변만화.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도운연은 충격에 휩싸여 입을 벌린 채 한참이나 멍해졌다.
‘필요에 따라서. 그래야만 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켜야 할 이가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어야 한다.
정작 복수의 길에 나선 건 자신. 누군가를 지키고 구해야 할 이도 자신이거늘, 대체 난 어떤 껍질 속에 파묻혀있었던가.
자존심, 권위, 허례, 타인의 시선.
이 모든 것에 갇혀 있었다는 자각에 이르렀기에 운연은 마음이 뜨거워졌다.
껍질을 몸 밖으로 날려버리고 싶어졌고, 모두 밖으로 토해내고 싶어졌기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절규하듯 외쳤다.
“저기 누님…… 적당히 좀.”
“어……. 험험!”
“목소리도.”
“그래.”
도운연이 가성을 내며 여인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그때 제갈혜의 모습이 보이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오라버니! 곧 출발해요. 서둘러요.”
도운연과 남궁연이 다가갔을 때 출발 준비는 끝나 있었다. 일행의 무리는 이제 둘로 나뉘었다.
도운연으로 역용한 무흔신투는 소호탈마대와 함께 있었고, 천공단도 그 무리에 속했다.
후공은 두 개의 산 너머로 시선을 잠시 던진 후, 소맷자락에서 친을 발출했다.
크르르르릉!
친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인사를 건네듯 주인의 몸을 세 바퀴 회전하고는 땅을 파고들었다.
친은 안내자.
그 뒤를 따르는 건 소호탈마대와 천공단.
구르르르르.
지귀객이 땅을 뚫고 사라졌고, 소호탈마대와 천공단도 스며들 듯 뒤를 이었다.
여정은 여전히 함께다.
단지 한 무리는 지상으로 이동하고 한 무리는 지하로 이동할 뿐.
지상에 남은 이는 다섯.
후공, 당명, 제갈혜, 도운연. 쾌운동자.
후공이 쾌운을 바라봤다.
“쾌운. 가까이 와라.”
“네.”
다가온 쾌운의 몸에 점혈한 다음 후공이 말을 이었다.
“너는 신법이 뛰어나니 자유롭게 다니며 정보를 수집한다. 혹여 우릴 배반하고 광마혈성 편에 서면 곤란해.”
“그럴 리 없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외모의 쾌운이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이틀에 한 번씩 복귀한다.”
“금제를 펼치신 겁니까? 마, 만약 이틀이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상상에 맡겨두마.”
“…….”
쾌운동자의 안색이 시무룩해졌다.
물론 연기였다. 그런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대화 중 대공자의 전음이 있었다. 그저 금제를 가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자는 말이었다.
소교주를 속여야 하니까.
그리고 통했다.
“오오! 금제.”
소교주께서 치밀하다며 옅게 탄성을 발하였기에 쾌운은 내심 웃었다. 이내 예를 갖춘 후 신형을 날렸다.
**
그 광경은 고스란히 광명우사 냉선의 시야에 들어왔다.
‘대공자의 지력은…… 8점.’
내내 따라다니며 관찰하는 입장 속에서 냉선도 평가를 하고 있었다.
무력과 통솔력은 만점.
드디어 대공자의 지력을 보게 되었지만 평가를 짜게 내렸다.
지난밤 소교주님을 짖게 하면서 성장시키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그 누가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짖게 한단 말인가.
한데 결국 해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선 여장.
새로운 전략 속에 소교주님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소호탈마대를 지하로 이동하게 하는 걸 보고 있자니 탁월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였다.
꾸며진 상황 안에서 조율하는 광경이 예술이다.
그래서 원래는 10점을 주려 했지만, 한 번씩 자신을 향해 친한 척 손을 들어 보이는 대공자의 모습이 짜증 나 냉선은 8점을 주었다.
반면 소교주님의 지력은…….
‘1점…… 죄송합니다.’
짖을 때만 해도 3점을 주었는데 시냇가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1점이 깎였고, 쾌운동자에게 금제를 가한 것에 오오! 하며 감탄사를 발하는 모습에 냉선은 다시 1점을 깎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뇌가 없는 것 같은 모습에서 소교주님은 장족의 발전…….
‘쩝, 그만하자.’
애써 올려쳐봐야 무슨 소용인가.
강호 경험이 전무한 소교주님인걸.
현실이 그러한걸.
그리고,
냉선은 시선을 뒤로 돌렸다.
마조가 보였다.
‘이번엔 누가 온 것인가? 지존께선 폐관을 마치신 걸까?’
이내 신형을 날려 맞이했다.
온 것은 고작 둘.
노인과 빼어난 미녀였다.
마유(魔維)와 독마녀(毒魔女)가 예를 갖췄다.
- 마유가 광명우사를 뵙습니다.
- 독마녀가 광명우사께 인사 올립니다.
냉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와 독마녀가 나타난 것만으로 지존께서 폐관을 마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둘은 마뇌의 권한 밖.
마뇌는 결코 이 둘을 움직일 수 없다.
오직 지존의 명에만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치명적이고 독보적인 존재들.
마유의 신법은 쾌운을 능가하고,
독마녀는 고독(蠱毒)을 다루고 심는 데 정통하다.
- 너희 둘이 전부냐?
- 역시 광명우사십니다.
독마녀가 빙긋 웃었고, 그와 함께 십여 장 너머 나무에서 스멀스멀 하나의 인영이 빠져나왔다.
광명우사 냉선이 미간을 찡그렸다.
느낌은 있었는데 정확히 어디쯤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언짢아졌다.
저놈은 늘 그렇다.
언제나 기분 나쁘다.
찬란한 햇살 아래 암살자.
이름하여 찬살마(燦殺魔).
찬살마가 들창코여서도 아니고, 눈알을 괴상하게 희번덕거려서도 아니었다. 좀처럼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힘들기 때문에 괜히 불쾌해지는 터.
찬살마가 다가와 예를 취하는 모습에 냉선이 콧방귀를 뀌었다.
- 네가 온 걸 보니 지존께서 대공자를 죽일 생각이신가 보구나.
- 그만큼 지존께서 그자를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겠지요.
- 죽이면 곤란해.
- 헤헤, 물론입니다. 어깨와 배에 구멍만 크게 내겠습니다.
- 나도 궁금해지는군.
- 헤헤, 결과야 뻔합니다만.
과연 그럴까?
냉선은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이내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간밤에 소교주가 개가 되어 짖었다는 이야기며 여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전하니, 몇 번이나 진짜냐는 되묻는 말과 감탄사가 전음으로 쏟아져 나왔다.
지상으로 이동하는 건 이제 넷.
나머지는 지하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까지 전한 냉선이 질문을 던졌다.
- 누가 먼저냐?
- 접니다.
찬살마가 비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 찬살마. 기억해라.
- 물론입니다. 두 여인 중 한 사람은 제갈혜, 한 사람은 소교주님. 그리고 노인은 지존의 아우이신 암향야. 제 목표는 오직 천화서고 대공자 한 사람입니다.
- 반드시…… 성공해라.
- 흐흐.
찬살마는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실패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암살.
*
그 밤,
화정현 외곽에서 찬살마는 모습을 드러냈다.
웃음소리는 없었지만 입가엔 미소를 가득 담은 채 한 객잔을 바라봤다.
일 층은 반점.
이 층부터는 객방.
암향야는 사 층. 바로 옆 객실에는 제갈혜.
천화서고 대공자는 삼 층이다.
여장을 한 소교주님은 대공자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후후, 소교주님께서 조금 놀라실지도.’
피를 보게 될 테니.
이내 찬살마는 밤의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지나 바로 곁을 지나침에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샌가 객잔.
스멀스멀 움직여 이 층으로 오르고, 이어 삼 층.
찬란한 햇살 아래 암살자라는 별호는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어둠 속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살짝 열린 창문의 틈을 따라 그대로 객방의 벽에 스며들어 동화되었다.
방 안 풍경이 훤히 보였다.
잠을 청하는 이는 없다.
소교주가 침상 곁에서 운기행공 중인 걸 잠시 바라본 찬살마는 이어 대공자를 눈에 담았다.
거리는 가깝다.
거의 눈앞.
대공자도 좌정 중.
‘너무 쉽군.’
호흡은 멈춘 지 오래.
심장 박동도 한참 전에 멈췄다.
방에 들어서면서 몸의 체온도 방 안의 온도에 맞췄다.
살기는?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은 이미 삼십 년 전에 버렸다. 죽음의 사신은 결코 살의를 지니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이고, 유희일 뿐.
악의는? 있을 리가.
말했지 않은가. 그저 유희라고.
마침 정면이어서 더 좋다.
운기 중이어서 더더욱 좋다.
어깨에서 조금 아래, 십이경맥 중 둘을 끊는다.
그다음은 복부에도 구멍을 내주고.
후후, 대공자여!
일 년 정도 요양하면 조금 나아질지도.
생각은 거기까지.
찬살마는 벽에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조금 더 나아가면서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빠름으로 손을 뻗었다.
찬살마의 손이 어깨에 파고들었다.
찬살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기에 찬살마의 눈이 커졌다.
‘뭐, 뭐지?’
파고든 건 틀림없었다.
문제는 손이 파고든 곳이 대공자의 어깨가 아니라는 점. 어깨에 닿기 전 어깨 앞쪽으로 갑자기 나타난 일렁이는 기운에 손이 빠졌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번쩍.
후공이 눈을 떠 찬살마를 바라봤다.
자줏빛 안광이 폭사하니 찬살마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래도 아직은!
우수는 빼낼 수 없다.
대신 급히 좌수를 뻗어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후공의 우수가 춤췄다.
파파팟!
점혈된 찬살마가 축 늘어졌다.
후공이 그런 찬살마의 목을 움켜쥐고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손속이 과하구나.”
“으으으…….”
공포에 질린 찬살마가 신음을 발했다.
빨려들어간 건 자신의 우수만이 아니었다.
대공자의 자줏빛으로 물든 안광이 자신의 의식 밑바닥까지 장악해오고 있었다.
손속이 과했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어, 어떻게?
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었다.
남은 건 하나.
용서를 빌어야 한다.
“대, 대공자님…… 사, 살려주십시오.”
찬란한 암살자는 목숨을 구걸했다.
후공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후후, 널 죽이진 않는다. 죽이지는.”
덜덜덜.
찬살마가 몸을 떨었다.
왜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 이리도 무섭게 들리는가.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뭘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