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17화 (317/460)

317화. 그때는 몰랐다.

그 밤,

도운연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도 형, 더 이상 함께 다닐 수 없겠군요. 이제 이 일은 저의 일이 되었습니다.”

“네, 대공자.”

운연은 이해했다.

휙휙 전환점이 많고 빠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갈혜가 납치된 것이다.

대공자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까지 평온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서 제갈혜를 잃었다. 쫓아갔음에도 행적을 찾지 못했다.

‘혜와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었던 것인가.’

……라고 착각했다.

애초에 납치가 아니고 혜는 가야 할 곳에 먼저 갔을 뿐이지만, 운연이 알 수는 없는 일.

또 운연이 모르고 있는 건 이 여정의 본질이었다.

이 여정은 도운연 속이기가 아니다.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후공은 아니었다.

그걸 이해하고 있는 건 당명과 제갈혜뿐.

이 여정의 목표는 그저 풍제에게 존재를 알려가는 시간임을, 풍제의 마음에 스며드는 시간이란 사실을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대공자,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여장이고 뭐고 곁에 있어봐야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자각 아래 도운연은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지상에 남은 건 두 사람.

후공과 당명뿐.

“대형, 혜가 이야기할까요?”

지금쯤이면 풍제와 마주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그리고 당명으로선 반반이었다.

자신의 경우 혜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이다. 혜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그저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었다. 모든 걸 깨달았을 때 그제야 혜가 말한 의미들을 이해했었다.

그러니 혜는 말하지 않을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만 꺼낼지도.

그저 웃기만 할지도.

하지만 후공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풍제는 너와는 달라. 혜는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될 거다.”

**

“누굴까요?”

그렇게 되물은 제갈혜는 웃음만 보였다.

풍제는 채근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혜를 보고 있지만 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갈혜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대신 한 떨기 꽃이 피어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미소를 언제 보았더라.

생각 난다.

형님 곁에서다. 그래, 그 곁에 있을 때다.

1년 전, 믿을 수 없는 부고 소식을 듣고 무림맹에서 혜를 보았을 때만 해도 다시는 이런 미소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눈 앞에…… 다시 피어났다.

대답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들은 것만 같아서,

풍제는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이윽고 제갈혜의 입이 열렸다.

“그는 천화서고의 젊은 천재. 능력은 물론이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매료시켜요. 그와 만난 사람들마다 그를 좋아하고, 함께하고 싶어해요. 저도 그중에 한 사람이랍니다. 백부님, 단지 그뿐이에요.”

“그렇구나. 내게 더 해줄 말은 없느냐.”

“흐음, 뭐가 있을까요?”

“내가 궁금한 점을 하나씩 물어도 될까?”

“물론이에요.”

제갈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 백부는 어떤 말을 꺼낼까? 무엇이 궁금할까?

모든 것이 궁금하겠지. 모든 걸 알고 싶어하시겠지.

하지만, 백부님.

저는 들려줄 수 없어요.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들은 것만으로는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최소한 곁에서 지켜봐야 해요.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봐야 해요.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 백부님,

제가 둘러대도 미워하지 말아요.

그런 마음을 담아 제갈혜가 풍제의 눈을 바라볼 때였다.

풍제의 눈동자에 변화가 일었다.

눈동자 테두리를 따라 금빛이 원을 그리며 한 바퀴 회전하면서,

쩌어엉!

그것이 전부.

섭혼의 발현, 마령안(魔靈眼)에 사로잡힌 제갈혜의 표정은 이내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풍제는 손을 들어 창가를 가리켰다.

그 손길에 가리워진 휘장이 스르륵 걷어지면서 창 너머 별과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혜야, 벌써 아침이구나. 햇살이 어느 때보다 눈부시니 기분까지 좋아진다.”

“와아, 백부님! 쏟아지는 햇살이 보석 같아요.”

제갈혜가 해맑게 웃었다.

햇살에 눈이 따가운지 손을 들어 빛을 가리기도 했다.

이제 되었기에,

진실을 듣게 될 것이기에,

풍제는 방 안을 기운으로 둘렀다.

기막을 형성하여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차단했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들어보자. 천화서고 대공자는 누구지?”

이제 풍제는 두근거렸다.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정녕 형님인가?

기이하다 여겼는데, 찬살마가 구겨졌고 그것을 내보이듯 모두에게 드러냈으니 찬살마의 비명 소리는 다른 의미다.

- 천강, 이젠 너도 알 수 있겠지?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두근거렸던 심장이 지금은 더 격렬하게 뛰었다.

“백부님.”

제갈혜가 빙긋 웃어 보였다.

“맞아요. 백부께서 지금 떠올리고 있는 사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무림맹주이자 천하제일인. 하하하하, 천화서고 대공자가 백부님이었어요. 하하하, 저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요! 사실 여기 오자마자 이 말을 하고 싶었거든요.”

“하아……………….”

풍제는 깊은 탄식과 함께 넋이 나가버렸다.

평소의 제갈혜는 둘러댈 수 있지만, 마령안에 사로잡힌 제갈혜는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다.

모든 의문들이 사라져간다.

대공자를 향한 당명의 태도, 운연을 향한 대공자의 애정, 청랑이 살갑게 대했다는 것까지.

그리고 신검을 다룰 수 있음과 기이한 무공.

교릉만이 아니다.

백혼곡을 상대했다고 했으니 천람이 운용되었을 터.

품었던 의문들은 사라져가고 새로운 의문들이 피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온 것인가?

강호의 소문은 들었지만, 더 자세히 듣고 싶어졌다.

“혜야, 그동안의 일을 내게 들려다오. 네가 아는 모든 걸 듣고 싶다.”

“하하하하! 전 그럴 줄 알았어요. 저는 백부님의 목소리가 떨려나올 줄 알았어요.”

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틀렸다.

목소리만 떨려나온 건 아니다.

제갈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풍제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갈혜가 마령안에서 깨어났을 때, 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둘러댄 말을 꺼냈던 부분까지만 기억했다.

“혜야, 오늘은 이만 쉬어라.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백부님, 서운한 건 아니죠?”

“후후, 물론이지. 천화서고 대공자가 뭐라고.”

“맞아요. 그는 그저 천재에 멋지고 무공이 뛰어나고 분위기 있는 사람인 데다 재밌기도 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지만…….”

“가 봐라.”

“……네.”

이내 제갈혜가 배시시 웃으며 물러났다.

혜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풍제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환혼. 그리고 천공단, 지나온 모든 여정들.

혜가 유령곡에 잡혀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던 순간의 이야기는 다시 떠올려도 미간이 찡그려진다.

모산과 북해빙궁에서의 일은 정녕 대형답다.

‘천화서고에도 가보고 싶구나.’

그런 생각도 떠올랐다.

그리고 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풍제는 자신도 모르게 후공을 처음 만났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오십여 년 전.

지금 운연의 나이보다 많은 삼십 대 초반, 강호를 유람할 때였다.

초행이었다.

첫 만남은 감숙성 동쪽의 한 주루에서였다.

술잔이 오가는 주루여서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가 있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시끄러운 이들이 있었다.

고작 둘.

한데 스무 명은 되는 듯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였고, 특별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너희! 조용히 좀 하자.

그 말에 돌아온 답은 의외로 유순했다.

-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내 조용해졌지만 일각을 넘기지 못했다.

둘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웃고 더 크게 떠들었다.

그렇게 시비가 붙었다.

- 너희 둘!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 야, 주루가 서당이냐? 시발놈이 좋게 말하니까 끝이 없네. 뒈지기 싫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정 억울하면 너도 떠들든가.

반발하며 쏘아붙인 건 지금은 떠나고 없는 제갈 아우.

그때 대형은 말리지 않았다.

후공은 그저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어서, 대꾸를 하지 않아서, 또 그때만 해도 제갈 아우가 더 강해보였기에 보이는 두 자루의 검은 장식으로 보였다.

그래서 밖으로 불러냈다.

- 너희 둘. 따라 나와라.

대답은,

- 너 먼저 나가 있어. 곧 나갈 테니까.

그래서 먼저 나가 있었다.

한데 나오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다시 들어가보니 둘은 여전히 떠들고 있는 상황.

- 안 나오냐! 언제 나오려고 그러냐!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말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말했다. 또 그런 놈들이 세상에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던 때이기도 했다.

- 금방 나가. 넌 왜 사람이 참을성이 없냐. 곧 나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걸 또 듣고 나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분노가 폭발해 들어갔을 땐, 사라지고 없었다.

겨우 겨우 쫓아가서야 마주할 수 있었다.

도망가는 걸로 생각했는데, 산야에서 멈춰 기다리고 있었다.

나선 건 후공.

그리고 떠든 건 제갈 아우였다.

- 너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

- 운이 좋다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놈은 말을 이상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죄송하다고 했다가 욕을 했다가 먼저 나가 있으라고 했다가 곧 나간다고 했다가……. 출신이 하오문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제갈세가의 후계인 걸 알고 얼마나 기가 찼던지.

그 다음 말은 더 기가 찼다.

- 넌 오늘 장차 천하제일인으로 불리게 될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거니까.

- 하하하하하!

그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장차 천하제일인이라니.

이쪽은 장차 천마신교의 교주가 될 사람이었므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무참히 박살났다.

고작 오십여 초.

염혼들은 구름이 흩어지듯 흩어졌고, 무엇인지 모를 기운에 의해 마기는 부조화를 일으켜 온전히 기운을 발현할 수 없었다.

꿈인가?

도무지 믿을 수 없어,

- 다시.

몇 번인가 다시를 외쳤고, 그때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널브러진 채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세 줄기 자줏빛 검광.

몸을 옭아매듯 주위에 흘렀던 기이한 기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해가 가려지며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라는 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름.

- 도천강.

- 이상한 무공을 쓰던데?

- …….

거기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들려왔다.

- 우린 섬서로 가는 길인데,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지?

- 나도…… 섬서.

원래는 사천으로 가려고 했고 가야만 했지만…… 그리고 섬서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지만 같이 가고 싶었다.

- 잘됐네. 같이 가자.

- 그, 그럴까?

- 그래, 같이 가자. 일어 나.

내민 손을 잡은 순간, 그때까지도 몰랐다.

이 만남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