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도도도.
격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뜨거워진 머리도 식지 않는다.
체온을 유지하고 조절하는 건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일이었지만 풍제는 그대로 두고 싶었다. 지금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바라보고 싶었다.
대신 시원한 겨울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찬 바람이 시원하게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그와 달리 추억은 다시금 거대한 태풍이 되어 몰려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 너, 마교 소교주였냐?
- 헐!
- 네놈은 가문이 제갈세가라고?
시작은 서로의 당혹이었다.
서로가 신분을 밝히면서 황당해했다.
후공과 제갈 아우는 괴상한 생명체를 보듯 바라봤지만, 그건 풍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망나니가 제갈세가라고?
강호에 대한 상식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더 놀란 건 후공의 신분과 가문이었다.
경악 그 자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신분이랄 것도 없고, 가문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부유한 가문 정도.
그럼 어떤 기이한 인연이 닿았겠구나.
특출한 사문을 둔 것이로구나.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별것 없다는 식으로 꺼낸 말은 형용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무학을 혼자 정립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넋이 나가버리는 건 당연했다.
너무 놀라 한참을 바라볼 때, 들려왔다.
- 그걸 믿냐?
- 그, 그럼?
- 하하하! 멍청한 놈아, 당연히 농담이지.
그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지내며 알게 되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무공, 들어본 적도 없는 무공이었고, 함께하는 길에서도 새로운 공법들이 만들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함께 다녔다.
여러 곳을 함께 다녔다.
그 와중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사람과 인연을 쌓았다.
오고 간 이들도 많았다.
약왕문의 용악이 합류했다가 돌아가고,
전대 남궁세가의 가주도 잠시 동행한 적이 있었다.
맹의 천하십객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죽음을 넘기도 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무리 안으로 들어온 건 당명이 유일했다.
그 모든 걸 잊으려 했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
그래, 다시 떠올려도 괜찮겠지.
풍제는 밤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달은 유난히 밝고 구름은 달의 곁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후후.”
풍제는 그때와 같아서 웃음 지었다.
지금과 같은 달빛, 지금과 같은 구름 아래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 이름을 지어야겠는데…….
운연을 갖게 된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를 때였다.
당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지만, 제갈 아우는 자신에게 맡겨두라며 여러 이름을 추천했다.
도자기, 도벽, 도망, 도적, 도도! 도도도!
죽일 뻔했다.
도망쳐! 라며 제갈 아우가 달아났다. 멈춘 건 후공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은 도도도가 마음에 든다며 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발출되었다.
세 줄기 자줏빛이 밤하늘을 향해 쏘아지며 구름을 흩어갔고, 또 한편으로는 모아갔다. 구름을 다듬어갔다.
그때 번이 운을 썼던가, 쾌가 연을 썼던가.
친이 도를 쓴 건 틀림없다.
그렇게 구름을 흩고 모아 이름을 완성했다.
달빛 아래, 황금빛으로 물든 운연(澐延)이라는 이름이 반짝였다.
운연.
큰 물결을 이끈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운연이 되었지만, 태명만큼은 도도라고 불렀다.
후공이 처음 도도도가 마음에 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운연은 도도일 때가 있었다.
그날이 떠올랐기에 풍제는 우수를 들어올렸다.
손가락 끝에 붉은 광채가 맺혔다 싶은 순간, 하늘로 길게 뻗어나갔다.
강기를 이룬 지풍이 구름을 흩고 모아갔다.
이내 구름의 형태는 글자가 되었다.
도도도.
풍제는 한참이나 구름을 올려다봤다.
그 광경은 풍제만이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천마신교 내 수많은 이들이 머리를 들고 구름을 올려다봤다.
세 글자,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아는 이들도 있고,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곧 소리 없이 전음이 오가면서 전해지고 전해져 모두가 ‘도도도’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지존께선 소교주를 떠올리고 계시는구나.
지존께선 소교주를 보고 싶으신 것이로구나.
풍제는 과거 어느 때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렇게 오해했다.
결국 마뇌가 나섰다.
“주군.”
“응?”
곁으로 다가온 마뇌가 흠흠,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시험하기 위한 절차도 취소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이미 제갈 군사가 먼저 당도했다.
이후 주군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듯하다.
제갈혜를 마주하고 보니 주군께선 소교주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마뇌는 주군의 결정을 돕고 싶었다.
현재 천화서고 대공자가 마주할 관문은 둘.
그중 첫 번째는 진법.
그다음은 오마신을 넘어야 한다.
문제는 그 관문들이 녹록지 않다는 점.
시간이 많이 소요될 터였다.
대공자가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고 하니 진법은 어찌어찌 통과할 것이다.
하지만 닷새는 걸린다.
이것도 성공한다는 가정이고,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의 기간이었다.
그다음은 오마신.
천마신교 내 서열 5위부터 9위.
각자가 자존심이 드높아 함께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마신이 한 명씩 나선다 해도 대공자에게 승산은 없다.
도리어 오마신의 포악함을 감안할 때, 대공자가 위중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시일도 그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고.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대로 두어라.”
“하오나…….”
“그는 머뭇거리는 이가 아니다. 또 강하기도 하고.”
“네?”
존명, 이라는 대답도 잊고 마뇌가 멍해졌다.
여태 천화서고 대공자가 보인 바가 많긴 해도 지존께서 이 정도까지 인정하고 계실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오마신을 넘으면 그다음은 본좌가 직접 나서겠다.”
“네?”
마뇌가 또 멍청한 소리를 냈다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바꿨다.
“존명!”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존께서 직접 대공자를 상대하신다니?
대공자가 이런 영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뇌가 세 개쯤은 되는 듯 두뇌가 뛰어나다 하여 삼뇌자라고도 불리는 마뇌였지만, 지금 상황은 그로서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영광으로 여기는 건 풍제였다.
처음 만나 패배를 맛보았을 때도 뒤늦게 영광이라 생각했고, 함께하면서도 영광이라고 여겼다. 물론 기다리는 지금도.
수십 개의 별호.
그중에서 가장 어울리는 별호는 하나.
천하제일인!
그가 오고 있는 것이다.
***
그 와중, 지하 땅속.
천공단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땅속으로 이동하는 내내 울부짖으며 한 사람을 애타게 찾았다.
“혜야! 혜야아아아아아아!”
“제갈 소저~~~~~. 제갈 소저~~~~!”
“광마혈성 이 망할 놈아, 아름다운 제갈 소저를 당장 내놔라아아아!”
도운연이 땅으로 기어들어오며 납치 소식을 전했고, 그때부터 천공단은 울부짖고 있었다.
진정하라고 운연이 달래보고 말려봐도 소용없었다.
천공단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제갈혜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저 도운연이 지하로 내려오게 되면서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먹는 것도 부실하고 술도 마시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분통이었다.
납치만 안 했더라도 지하로 이동하는 척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이젠 도운연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 뒤로는 해를 못 보고 있었다.
“광마혈성, 넌 반드시 죽여버린다. 내가 갈아마셔 버린다!”
“광마혈성 이 개새끼야,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납치할 수 있단 말이냐! 대답 좀 해 보라고!”
“제갈 소저어어어어어! 밥은 먹고 있나요? 우리도 밥을 못 먹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오오오오!”
그런 마음은 소호탈마대도 같았다.
좋은 날 다 간 것이다.
모두가 분노를 발하는 가운데,
이면의 실상을 모르는 운연만 미안해졌다.
‘모두들 나를 위해서……. 혜야…….’
가장 미안한 건 제갈혜.
혜는 지금쯤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까.
어떤 심정일까. 얼마나 두렵고 막막할까.
혹시 몹쓸 짓을…….
차마 그 생각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 머리에서 급히 떨쳐냈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막지 못했다.
‘강해지자. 더 강해지자!’
그렇게 운연이 착각 속에서 강해지자는 다짐을 쌓아갈 때였다.
땅속 진군이 멈추면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왜 안 가!”
“지귀객, 너 대체 뭐하냐!”
“두더지 새끼야, 얼른 땅 안 파냐!”
멈춰 돌아선 지귀객이 항변했다.
“왜 나한테 그래! 대공자님의 검이 멈췄단 말이야!”
“그래?”
“어디 봐?”
다들 그걸 보겠다고 다투면서 비좁은 지하 통로에서 서로 밀고 당기면서 쌍욕이 터졌다. 그렇게 바라보니 그 말대로였다.
“무슨 일 있나?”
“혹시 식사 시간인 거야?”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었다.
표면적인 상황은 제갈 군사의 납치다.
그날 이후로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던 터.
그때였다.
“어?”
“뭐, 뭐야?”
잠시 멈췄던 단주의 신검이 우우우웅, 우는 소리를 내면서 강렬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가를 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올라간다!”
“우리도 올라가야 해!”
친이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상승했기에 지귀객이 바로 친을 따라 땅을 파냈다.
그렇게 친을 따라 땅을 뚫고 나왔을 땐, 주변 풍경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와아, 붉은 세상이야.”
“지, 지옥인가?”
“그건 아닌 듯. 지옥의 불길이 없잖아!”
“나무관세음보살…….”
물론 지옥은 아니다.
이는 진법 안.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저 떠들었을 뿐이었다.
그저 보이는 사방의 모든 공간이 붉은색으로 이루어져 황망함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하늘도 붉고, 땅도 붉다. 뚫고 나온 바닥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막힌 곳도 없이 끝도 없이 붉은 공간.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조차 막막하게 보이는 광경은 저절로 지옥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바로 앞쪽에 선 두 사람.
천공단주와 암향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먼저 나선 건 도운연이었다.
“대공자!”
“도 형, 오셨습니까.”
“난관을 맞이했군요.”
운연이 한숨 쉬듯 말한 후 덧붙였다.
“적해탐예진(赤海貪銳陣)입니다. 우리가 진식에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발동한 듯합니다. 문제는 곧 환상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그 환상은 실제와 같아서…….”
“그렇군요.”
“대공자, 해법을 찾을 수 있겠는지요?”
운연은 한 가닥 기대감을 드러냈다.
대공자는 천재 중의 천재.
강호에 알려지길 천화서고의 진법이 가장 뛰어나다는 말이 전해오지 않는가.
그러니 대공자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법을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으로 바라볼 때 들려왔다.
“해법은 찾았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도운연이 놀라 눈이 커졌다.
“한데 시간이 꽤 걸리겠군요.”
“얼마나…….”
닷새면 최상이다.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열흘이라면?
그것도 빠른 편이지만 버티기 어려울 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릴 때, 들려왔다.
“하루 꼬박.”
“네?”
도운연의 눈이 더 커졌다.
닷새가 아니라 하루라니?
대공자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다른 방법이라면……?”
“도도도도도도…… 형, 아이고 갑자기 말이 더듬어지는군요.”
“저기…… 그래서 다른 방법이시라면?”
도도도라는 말에 곁에 있던 당명이 이를 악물며 웃음을 참았다. 도도도라니, 참느라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네, 번거로워서 그냥 날려버릴까 합니다.”
“네에에에에?”
태명이 도도도.
도운연의 눈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몽허나 음희도 그렇게 큰 주군의 눈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