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직접 본 소감은?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적해탐예진을 날려버리겠다니.
도운연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적해(赤海)다. 끝이 없는 붉은 바다다.
탐예(貪銳)다. 탐욕에 찬 날카로움이 넘실거린다.
생문(生門)은 없다.
아니, 생문이 있긴 하지만 그 위치가 매 순간 바뀌기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네 번의 호흡마다 바뀌던가?
그런 적해탐예진을 날려버린다고?
차라리 진법을 해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루가 꼬박 걸리더라도 그게 빠르다. 그 결과라도 경악이거늘…….
운연이 그렇게 어안이 벙벙할 때, 시작되었다.
[크으으으…….]
[크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의 틈새에서 인영들이 쏟아져나왔다. 열둘이 먼저 나왔고, 그다음은 스물넷이 나왔으며 계속해서 그 숫자는 늘어갔다.
인영의 수는 백구십이에서 멈췄다.
눈, 코, 입이 없었다. 그저 사람의 형태를 갖춘 하얀 빛 덩어리가 겹겹이 둘러싼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검 또한 하얀 빛 덩어리.
모두 환영이면서 환영이 아니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검은 몸을 관통한다. 스치면 베인다. 하얀 인영들은 진법 안에 들어선 불청객들을 죽여, 그 피로 적해를 더 진한 붉은 바다로 만들 생각일 것이다.
“천공단.”
“우리가 천공단!”
천공단주의 부름에 천공단이 호응했다.
이어 운연이 소호탈마대를 부르니 거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소호탈마대! 주군을 위하여! 캬캬캬캬캬캬!”
오고 간 대화를 모두가 들었다.
단주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진법을 부술 때까지 막는다.
스르릉!
일제히 검이 뽑히는 소리를 신호라고 생각한 걸까. 에워싸고 있던 적해탐예진의 하얀 빛의 검수들이 포악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귀신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이들은 귀신이 아니지만 제정신이 아니다. 천공단도 소호탈마대도.
각자가 미친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어우러졌다.
하얀 빛의 검수들 중 넷이 운연의 염혼에 스러졌다. 몽허의 장력에는 일곱이 빛의 파편이 되어 흩어져가고, 금적자는 머리를 연거푸 터뜨렸다.
눈깜짝 사이에 스물둘이 천공단과 소호탈마대의 공세에 먼지처럼 흩어졌지만 이내 다시 형상을 갖춰갔다.
이게 문제다.
빛의 검수들은 죽지 않고 재형성.
상대하는 이들은 언젠가는 내력이 고갈되고 지치게 된다.
“후후.”
후공은 잠시 교전을 바라보다 당명에게 시선을 옮겼다.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 저곳이다.
허공의 한 지점.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았고, 특이점은 없었다. 그저 허공의 한 지점일 뿐.
당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파훼법에 대한 이야기는 오간 터.
이내 당명이 만천화우를 펼쳐내니 흑련의에서 수만 개의 금빛이 찬란하게 쏟아져나와 폭사했다.
멀리 한 지점의 허공, 후공이 가리켰던 그 지점을 남겨둔 채 금빛은 빼곡이 틀어박혀 천천히 맴돌았다.
그 중앙만 과녁처럼 남겨둔 형태.
저 지점이 생문(生門)이다.
매 순간 끝도 없이 위치를 옮기는 생문은 변화를 잃었다. 당명의 만천화우에 진법은 고정되었다.
잘해주었기에 후공은 칭찬을 건넸다.
- 훌륭하구나.
- 대형, 조금 더 쓰시죠.
- 응?
- 칭찬.
“하하하하하하!”
후공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그래, 네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겠지.
- 캬아, 좋군요!
당명이 탄성을 토해냈다.
진심이었다. 천하제일인에게 받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좋은 것이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좋고,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때는 이미 발출.
번쾌친과 검령이 자줏빛을 발하며 표적을 향해, 생문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굉음이 터졌고, 타격 지점에 붉은 기운이 출렁였다.
하지만 그뿐이었기에,
검령과 번쾌친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뭐라고 버틴단 말인가. 뚫지 못한단 말인가.
튕겨져 나와서는 불쾌함을 격하게 드러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앙!
크르르르르르릉!
기음을 발하며 다시 폭사했다.
콰아아아아아앙!
붉은 기운의 출렁임은 더 심해졌고, 중심 타격 지점의 붉은 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옅어졌다. 타오를 듯한 붉은 빛이었던 것이 주홍에 가까워졌기에 검령과 번쾌친은 의기양양해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앙!
**
혈해탐예진 너머.
바깥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안쪽과는 달랐다.
붉은 구름이 반원의 형태로 꿈틀거리고 있는 광경.
멀리 여럿이 바라보고 있었고, 내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기는 돌파 소요 기간.
“난 닷새.”
멀리서 바라보며 광명우사 냉선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천화서고의 천재이니, 경지도 드높으니 후한 점수를 주었다.
하지만 즉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광명우사, 과대평가가 심하십니다.”
오마신 중 한 명인 백마신이었다.
백발에 분을 바른 듯 얼굴이 새하얀 노인이었다.
“나 백마신은 열흘을 보겠소.”
“백마신, 보여준 것이 있는데 열흘은 과하군. 난 칠 일.”
흑마신이었다.
백마신과는 반대로 흑마신은 먹을 바른 듯 온통 흑색이었다.
“난 엿새.”
“나 검마신은 아홉 날.”
“나 도마신은 십이 일로 하지.”
연거푸 의사를 밝히는 가운데, 오마신 중 최고 서열인 절마신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 쓸데없는 말들 뿐이군. 나는 보름.”
오마신의 시선은 이제 남겨진 독마녀와 찬살마, 쾌운동자에게 향했다.
“너희도 의견을 내봐라.”
“저는…… 그러니까…… 이틀입니다.”
“허허, 이틀? 네놈이 미쳤나 보구나.”
절마신의 타박에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던 쾌운동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항변할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대공자에게 당해 보기도 했고, 곁에서 보기도 했으니. 하지만 참기로 했다. 절마신 앞에서 떠들어봐야 돌아오는 건 폭력일 뿐.
“독마녀, 넌?”
“네? 저, 저는…….”
“말을 해!”
“그게…… 화를 내지 않으신다면…….”
“당장 말해라. 지금 화가 나려 해!”
“저는…… 하루면 족할 듯합니다.”
“뭐? 하루?”
절마신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검마신, 도마신 등도 마찬가지였다.
“넌 고독을 잃으면서 머리까지 어떻게 된 모양이지?”
“독마녀!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할 것 아니냐!”
“쯧쯧쯧! 정신 나간 년.”
흑마신은 고개까지 절레거렸다.
이제 남은 건 찬살마뿐.
모두가 찬살마를 바라봤다.
찬살마는 이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대공자의 위대함을 말할 수 있게 되었기에 찬살마가 크게 소리쳤다.
“저는! 반시진(약 1시간)입니다!”
“뭐가 어째!”
“반시진?”
“너 누구야!”
교의 인물이라면 적해탐예진을 두고 반시진을 외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찬살마의 존재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의심했다.
찬살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더 짧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겨져 보았다. 펴져 보기도 했다.
그 묘용은 얼마나 심오해야만 가능한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니 대공자에게 적해탐예진이 대수겠는가.
그런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곧바로 응징당했다.
퍼억!
뭔가 날아왔다 싶은 순간이었고, 복부가 뜨거워졌다 싶은 순간이었다. 찬살마는 실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가버렸다.
날려버린 건 흑마신.
저만치 꿈틀대는 찬살마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반시진? 더 짧을 수도 있다고? 넌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다면 적해탐예진에 빠지기도 전에 이미 간파했어야 한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광명우사 냉선도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찬살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반시진은 너무 나갔다.
하지만 찬살마의 생각은 불변.
몸을 일으키며 악을 썼다.
“시ㅂ, 대공자가 몰랐을 것 같습니까! 대공자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건 그겁니다. 천공단과 소교주님께 경험을 쌓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습…… 으어헉!”
소리치던 찬살마는 어느새 흑마신에게 머리가 붙들려 비명을 토해냈다.
“사, 살려…….”
“찬살마, 섭혼에라도 당한 거냐?”
“노, 농담이었습니다.”
“말이라도 다 말이 아니다. 말을 가려서 해!”
“……네.”
섭혼이 아니다. 그저 매료되었을 뿐.
뼈마디와 살이 구겨졌다가 펴지는 걸 경험하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더 주장했다간 사망이란 것도 알고 있었기에 찬살마는 조신하게 대답했다.
흑마신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경이로운 존재는 지존뿐. 그 누구도 경외의 대상이 될 순 없다. 한데 고작 천화서고 대공자?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에게 매료되다니, 교에 돌아가는 대로 난 네놈의 정신머리를…….”
그때였다.
쿠우웅웅!
거대한 울림에 흑마신이 말을 멈췄다.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흑마신은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혈해탐해진의 반원의 구름이 흩날리고 있는 것이다.
환상을 보았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땐, 어느샌가 모조리 흩어지고 소교주님과 소호탈마대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기에,
“시…… 발…….”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말았다.
그건 다른 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왜? 어, 어째서……?”
“혈해탐예진이…….”
“고작 일식경이 지났을 뿐인데?”
광명우사 냉선을 비롯 오마신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러면 안 된다. 이럴 순 없는 것이다. 혈해탐예진은 천마신교의 절진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절진.
그걸 고작 일식경 만에 풀어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건 시간이 아니었다.
“저, 저건 해제가 아니라…….”
“부, 부셔버렸다고?”
모두가 혈해탐예진의 발동과 해제, 그 모든 변화를 잘 알고 있었기에 경악했다.
진법이 해제되는 형태는 지금과 다른 것이다.
붉은 구름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말끔하게 사라진다. 결코 지금과 같이 서서히 옅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광경은 충격.
파괴된 증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고 있는 이 와중에도 혈해탐예진이 위치하고 있는 넓은 지반이 터지듯 솟구쳐오르는가 하면 어느 쪽은 푹푹 가라앉고 있으니 천마신교의 귀한 보물, 놀라운 공능의 절진이 소실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들 넋이 나가버렸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당해본 이들은 내심 쾌재를 외쳤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겪어봐야 안 다니까!’
‘역시 천화서고 대공자님! 보라고, 봐! 내 고독이 약한 게 아니었다고!’
쾌운동자와 독마녀가 내심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환호가 어디 둘 뿐이겠는가.
찬살마의 경우 이미 가슴이 웅장해졌다.
- 흑마신 님, 이제 그만 손 놓으시죠?
- 어…….
붙잡힌 머리가 풀려난 찬살마가 옷을 탈탈 털며 목을 이리저리 거만하게 저어댔다.
- 아까 제게 섭혼에 당했냐고 그랬습니까?
- …….
- 직접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 …….
- 흑마신님, 말씀을 해보세요. 제가 누구 칭찬한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 …….
흑마신은 여전히 꿀먹은 벙어리.
거기에 찬살마가 쐐기를 박았다.
- 흑마신 님,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제 시작이어요.
- …….
- 오마신 님 중에 첫 번째로 나서는 분이 흑마신님이시죠? 제가 두 눈 크게 뜨고 자아아아아알, 지켜보겠습니다.
- ……………….
흑마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첫 번째로 나서는 건 자신.
찬살마 따위가 자신 앞에서 실실 웃고 있음에도 어찌 된 게 화가 나지 않았다.
소감?
‘조금 무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