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달빛, 구름, 언약, 전율.
그 밤, 어느 산야.
어둠에 잠긴 산을 오른 후공은 한 산봉우리에서 멈췄다.
산의 이름은 모른다.
산봉우리의 이름도 후공은 알 수 없었다.
이 산 자체가 처음이었다.
멈춰선 이유라면 이곳의 지형적인 특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봉우리치고는 평지가 넓고, 또 높지도 않다.
그리고 주변의 높은 산봉우리에 둘러쌓인 형태.
또 다른 이유라면,
“대공자, 혹시 오고 있습니까?”
“네, 지금 오고 있습니다.”
도운연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한둘이 아니다.
멀리까지 의식을 퍼뜨려 파악해 보니, 군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고 있는 건 앞쪽만이 아니다.
뒤쪽에서도 몰려오고 있다.
지나온 길, 마주할 때마다 파묻어두었던 놈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신형을 다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그러니 이곳이 적당하다.
이곳에서 여유있게 기다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운연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운연은 그저 오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번엔 누가 올까?
광명좌사, 광명우사일까? 사대 호법일까?
아니, 오마신이 속절없이 무너졌으니 광마혈성이 직접 나설지도.
광마혈성을 떠올려서겠지.
운연은 분노가 일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들려왔다.
“도 형, 오늘은 달빛이 좋군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 말에 유도된 도운연이 자신도 모르게 대공자의 시선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평범한 밤하늘인 것이다.
반달보다는 크고, 보름달보다는 작은 달이 떠 있을 뿐이며 그 아래 구름이 달빛을 받아 유유히 흐르는 광경은 언제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는 흔한 밤 풍경이었다.
‘대공자는 알 수 없구나. 이 와중에 운치라니……. 이 여유라니.’
대체 어떤 사람인가?
대공자처럼 걱정이 아예 없어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이 나이에 이리도 거만한 이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오마신을 하나하나 일격에 끝내버린 이가 아닌가. 지금보다 더 거만해도 괜찮을지도.
그러자 운연은 궁금해졌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절마신이 사술이라고 불렀던 그 알 수 없는 공법은?
“대공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오마신을 상대할 때 보인 묘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무엇이라 칭하는지요?”
“이름을 들으시면 놀라실 텐데, 괜찮겠습니까?”
도운연의 눈이 커졌다.
“이름만으로 말입니까?”
“네. 그러니 듣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도운연의 눈은 더 커졌다.
대체 무엇이라 불리기에? 정녕 사술인가? 사술이기에 이름만으로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그러자 더 듣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들려주십시오.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 이름은…….”
운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름만으로 이렇게 긴장하게 될 줄이야.
안광까지 빛내며 대공자의 입을 바라볼 때였다.
“아수라발발타!”
“뭐라고요?”
도운연이 놀라 반문하자, 다시 들려왔다.
“아수라~ 발발타~입니다.”
“…………………….”
놀랄 것이라는 말이 맞았다.
도운연은 진심으로 놀라버렸다.
물론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아니, 말을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시지! 무슨 아수라발발…….’
바보가 아니다. 밀교라면 모를까, 그런 신비한 무공에 그딴 이름을 붙일 리가. 아니, 밀교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아수라발발타의 파장은 도운연만 뒤흔든 것이 아니었다.
적막한 밤의 산야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두 사람뿐이어서 모두가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터라,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천람을 아는 당명이 터져나갔고,
천람을 모르는 천공단도 난리가 났다.
“하하하, 아수라발발타였어?”
“그래서 그렇게 무서웠던 거였구만!”
“그러게. 오마신이 빌빌거린 이유가 있었네. 발발이라서 그런 거잖아! 하하하하하!”
“아수라발발타~~, 아수라발발타~~~~.”
소천개는 외치면서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조용한 건 소호탈마대뿐.
주군께서 놀림받고 있기에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웃긴 걸 어쩌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후공은 그러거나 말거나.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 형, 이왕 이름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여기 이곳 우리가 서 있는 봉우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또 이상한 이름일까요?”
운연이 찡찡하니 되물었다.
후공은 미소를 머금었다.
“전혀요. 이 봉우리의 이름은 언약(言約)입니다.”
“아……. 이곳에 와 보셨나 보군요?”
이번엔 제대로 된 이름이 나와서 운연이 탄성을 발했다.
“처음입니다.”
“네?”
“제가 방금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도운연은 다시 얼떨떨해졌다.
왜 대공자는 이름마다 멋대로 부르는 것인가. 원래 이름도 있을 텐데.
“뭐 어떻습니까. 부르는 사람 마음이지요.”
“언약봉이라시니 약속과 관련한 사연이 담긴 말씀 같습니다. 그 이름에 담긴, 감춰진 의미가 따로 있는지요?”
“크흐음, 뭐 아직은.”
“……네.”
시무룩하게 답하며 운연은 시선을 돌렸다.
난 지금 누구랑 이야기 중인가?
달빛이 좋다니, 약속의 봉우리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의미도 없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그때였다.
한순간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위대한 칭호! 만마의 주인!”
“만마앙복! 천마강림!”
얼마나 많은 이가 오고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이가 외치고 있는 것인가.
아직 먼 듯한데도 외침만으로 땅이 울렸기에 운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또한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더 커지니 무섭게 가까워지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이 밤, 만마의 칼날이…….”
길게 이어진 외침은 어느샌가 산 아래.
“천화서고 대공자를…….”
더 가까워져 산의 중턱쯤.
이윽고 그 말의 매듭은 주위 산봉우리에서 들려왔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죽일 것이다!”
운연을 비롯한 천공단과 소호탈마대가 주위 산봉우리를 둘러봤다. 각각 사방의 봉우리마다 풍경이 달라졌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빛나는 수천 개의 붉은 안광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붉은 별이 뜬 것처럼 보이고, 또 마치 붉은 눈을 가진 야수들이 에워싼 것처럼도 보였기에 운연은 하얗게 질려 연신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붉은 안광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파묻혔던 이들, 수라마정대와 혈겁혈해대, 염라귀멸대와 극악멸혼대, 그리고 칠마군과 오마신까지 서남쪽의 봉우리에 올라 눈을 빛냈다.
도운연은 진심으로 두려움에 휩싸였고,
소호탈마대는 두려움을 가장했다.
청랑은,
크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눈을 매섭게 뜨고 으르렁거렸지만 실은 반가움이었다.
영특한 데다 시각과 후각이 놀랄 만큼 뛰어난 청랑은 붉은 안광 속에 주인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왜 다른 모습이어야만 하는지는 몰라도 위험할 일이 아니란 건 직감할 수 있었다.
당연히 후공도 아우를 알아보았다.
자령안에 어느 한 지점, 역용한 풍제의 모습을 찾아내 시선을 고정했다. 한참을 바라봤다.
눈을 뗄 수 없는 건 풍제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의 달라진 모습을 본 건 처음. 하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어떤 모습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형님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보인다. 우러난다.
오만한 시선.
그 누구를 대하더라도 내려다보는 거만함.
대형의 거만함은 자신보다 더하다.
그러면서도 허허로운 느낌을 두르고 있으니 형님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러니 먼저 인사를 건네야겠지?
- 형님.
- 어.
어, 라니.
풍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참아야했다.
형님답다. 형님이 맞다.
바로 전음을 이었다.
- 젊고 호리호리한 모습이 적응이 안 되는군요.
- 너 처음 만날 땐 지금보다 더 잘생겼었다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결국 풍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 그럼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처럼, 한창 젊고 어렸던 그날처럼 다시 손속을 겨뤄봅시다.
- 크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 후후.
풍제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천람이 운용된다면 염혼은 아무 의미 없다. 아니 염혼뿐 아니라 천람은 마기를 뒤흔든다.
‘흔들려보자. 무너져보자. 그날처럼!’
풍제는 산봉우리에서 신형을 날려 허공을 질주했다.
동시에 허공의 한 지점에 염혼을 불러낸 다음, 염혼의 어깨를 딛고 섰다.
몽글몽글 묵빛 연기가 흐르는 형태로 떠 있는 염혼과 그 위에 선 광마혈성의 모습에 운연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어, 어찌…… 네놈이 염혼을?”
대체 언제부터 역모를 준비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지만, 풍제는 내심 혀만 끌끌 차며 무시했다.
그저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본좌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놀랍다만, 오늘 이 밤이 너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그러한가. 뭐 곧 알 수 있겠지. 누가 마지막 밤을 맞이할 것인지.”
뻔한 말, 그리고 그 말이 전부.
후공은 검령과 번쾌친을 발출하며 신형을 날렸고, 풍제는 염혼들을 생성해냈다. 모든 염혼을 불러냈을 땐 스물하나.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르르르르르릉!
자줏빛 광채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기음을 토해냈고,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염혼은 울부짖으며 자줏빛 광채에 맞서 신형을 내던졌다.
순식간에 뒤엉키면서 네 개의 염혼이 부서져나갔고, 그 즉시 다른 염혼들이 검령과 번쾌친에게 달려드니 이내 혼전.
혼전의 양상은 후공과 풍제도 같았다.
능오침이 발출되는가 하면, 풍제의 장력이 후공의 머리를 향하기도 했다. 여력이 있는 염혼들의 공세도 후공에게 밀려들었고, 그때마다 그 위치마다 환명이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이 풍제에겐 의미로 다가왔다.
‘환명…… 능오침…… 지무…….’
함께하면서 들었던, 보았던, 그리고 직접 겪었던 대형의 무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대형이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이 대결은 그저 자신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 그렇기에 풍제는 손을 맞댈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 염혼이 늘었구나. 입도 생기고?
- 형님의 신검도 하나가 늘었군요.
- 이름은 검령이다. 인사해라.
- 하하하하!
모두가 경악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보고 있는 내내 이것이 과연 사람과 사람의 대결인가 싶은 경이로운 광경 속에 그렇게 둘은 전음을 나눴다.
그 와중 풍제에겐 의문도 있었다.
- 천람은 왜 아껴두는 겁니까?
- 왜 그럴까?
- 이유가 있습니까?
- 운연 때문에.
- 운연이 왜?
- 자식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언제나 위대한 모습이어야 하거든.
- 아…….
풍제가 잠시 멍해질 때, 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 후후, 그런 의미에서 한 대 맞아 주마.
이미 염혼의 장력이 거의 당도하는 와중이었다. 후공은 천람도 환명도 두르지 않고, 그저 호신강기만 가볍게 두른 채 염혼의 장력을 어깨로 받아들였다.
쿠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후공의 신형이 내리꽂히듯 지면에 박히면서 흙먼지를 일으켰다.
풍제는 잠시 멍해져 바라봤지만,
도운연은 달랐다.
광마혈성에게 대공자가 당한 것이다.
격정에 차고 피가 끓어올라 크게 소리쳤다.
“대공자, 어서 아수라발발타를!”
후공이 먼지를 털다 뚱하니 운연을 바라봤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뭔 갑자기 아수라발발타인가!
풍제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건 광명우사를 비롯한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천공단만 키득거리는 상황에,
- 천강, 이쯤 하자.
후공이 전음을 발했다.
풍제도 같은 마음이었다.
무엇을 더 확인할 것인가.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그렇게 염혼을 거둬들일 때,
주인의 마음을 읽은 번쾌친이 달빛 아래 구름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날과 같이,
그날 달빛 아래 구름을 수놓았던 것처럼,
구름을 흩고, 모으고 다듬어갔다.
그리하여 그날과 같아졌다.
구름으로 만들어진 이름은,
도.운.연.
모두의 시선이 구름을 향했다.
달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름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
그 광경을 바라보는 풍제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켰다. 곁에 제갈 아우가 있는 것만 같았고, 당명도 지금보다는 젊은 모습으로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또한 이제 곧 태어나게 될 운연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도 이곳에 있었다.
마치 선물 같아서,
천람이 없이도 풍제는 뒤흔들렸다.
그리고 들려왔다.
“풍혼마제의 뒤를 잇는…….”
나직하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천화서고 대공자의 목소리,
후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마신교의 위대한 지존이 될 이는 누구인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도운연이 멍해졌다.
그 의문에 답하듯 사방에서 수많은 붉은 눈들이 거대한 외침을 토해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금빛 찬란한 이름!”
산야가 쩌렁 쩌렁 울렸다.
외침은 이어졌다.
“그가 바로 위대한 마의 지존이 될 것이다!”
‘아……!’
그제야 도운연은 깨달았다.
아버지가 역용을 하고 있었음을.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속인 것에 불과한 일임을.
대공자가 말한 의미도 비로소 이해되었다.
이 밤의 달빛이 왜 좋다고 말한 건지,
그리고 대공자가 이 봉우리의 이름을 왜 언약봉이라 칭한 건지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