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웃음이 넘쳐나는 밤, 침묵이 길어지는 밤.
전율.
그 짜릿함은 도운연만은 아니었다.
목청껏 외치는 천마신교의 모두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구름이 흩어지며 소교주님의 이름이 떠오를 줄은 몰랐다. 또한 자신들이 이렇게 외치게 될지도 몰랐다.
광마혈성의 반란으로 소교주님을 속인다는 그림의 끝이 이런 광경이 될 줄은 몰랐다.
대공자를 처음 보는 이들이나, 겪어 보고 구겨져 보고 파묻혔던 이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다.
왜 이렇게 되는가.
대공자는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저 어린 나이에 왜 위축되지 않는가.
어찌하여 무심하면서도 오만하게 서 있을 수 있는가. 모두를 홀릴 수 있는가.
의문도 떠오른다.
얼마 전 지존께서 구름을 흩고 모아 도도도를 그리셨는데, 이번엔 대공자가 이름을 그렸다.
도도도는 소교주님의 태명.
도운연은 소교주님의 이름.
같은 형태, 같은 방식.
대공자는 그때 근처에서 보았던 걸까?
멀리서 도도도를 보았던 걸까?
보지 않았다.
이는 대형과 우리 사이 추억의 한 부분.
다시 만난 대형의 선물.
풍제도 여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지금의 광경은 대형이 산 하나를 빌려 아름답게 포장해 폭죽을 터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다.
대형은 언제나 선물을 했다.
함께하며 대형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무언가 준 적은 드물었다.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 선물이거늘…….
돌아온 것만으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던 구멍 난 가슴이 메꿔지고, 더 이상 계절과 계절이 지날 때마다 기억과 녹아내리길 바라지 않아도 되어 존재 자체로 선물이거늘…….
이젠 환영하자.
언제까지 이곳에 대형을 서 있게 할 것인가.
풍제는 역용을 해제했다.
“만마앙복! 마의 하늘이시여!”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 잦아들 때, 풍제는 입을 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본좌는 그대가 무척 마음에 든다.”
무척?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모두의 머리로 ‘무척’이란 단어가 맴돌았다. 지존께서 이런 단어를 쓰시는 걸 본 적이 없다.
후공은 미소로 응했다.
‘후후, 나도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이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며 화답했다.
“만마의 지존께서 환대해주시니,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풍제의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천하제일인이 영광이라 말하고 있지 않는가.
‘흐음, 이것도 나쁘지 않은걸. 대형에게 이런 인사를 받게 되는 날을 보게 되다니.’
이어 풍제의 시선은 천공단에게로 향했다.
각양각색 기이한 조합.
과거 천하십객을 보는 듯하고, 더 기괴한 것도 같아서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시간부터 천공단은 본교의 귀빈이다.”
그 선언에 천공단이 얼어붙었다.
‘귀빈?’
‘우리가?’
‘마교의 지존이…… 풍제가 우리를?’
들었음에도 믿을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천공단은 천공단이기에,
“만마앙복! 만마의 주인이시여!”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충성! 충성!”
환호성을 터뜨리며 펄쩍펄쩍 뛰었다.
**
이 밤은 특별한 밤.
어쩌면 영원할 것 같은 밤.
또한 잠들 수 없는 밤
둘러앉은 네 사람은 긴 이야기를 나눴다.
후공과 풍제, 그리고 당명과 제갈혜였다.
주로 말한 건 후공이었고, 풍제는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섭혼을 통해, 제갈혜를 통해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풍제는 다시 듣고 싶어 했다. 천화서고의 어린 두 아우에 대한 이야기는 강호와는 거리가 먼 일상의 이야기였지만, 풍제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윤과 부몽이라……. 고 녀석들 귀엽군요.”
“후후, 귀엽긴 하지.”
“저는 송화라는 아이도 보고 싶어집니다.”
“함께 가자. 슬슬 가볼 때도 되었거든.”
이어진 서문세가의 이야기에는 풍제는 너털거리고 말았다.
“허허…… 서문세가 따위가.”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주양의 등장에는 다른 의미로 고개를 절레거렸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렀다.
약왕문, 남궁세가의 천룡대전을 지나면서 추억의 한 부분이 겹쳐지기도 했고, 하오문의 독안미녀의 이야기에는 박장대소했다. 소요파를 지나 유령곡의 아이들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그때 유령곡을 온전히 끝냈어야 했나, 남겨뒀어야 했나 풍제는 다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백혼곡의 마두들을 상대했던 이야기까지.
대형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풍제의 구멍 난 가슴은 온전히 메꾸어져 갔다.
이야기가 끝났으므로 당명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신륜염제의 신병이기인 금륜이었다.
당명이 후공에게 전하려 했지만, 후공은 턱짓만으로 풍제에게 건네라는 뜻을 전했다.
금륜을 받아든 풍제는 얼떨떨해졌다.
“대형, 이게 무엇인가요?”
“길에서 주웠다.”
“……?”
“농담이고, 실은 좋아 보여서 빼앗았다. 너 가져라.”
“……??”
풍제는 여전히 눈만 깜박였다.
애초에 무엇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사백 년 전 신륜염제의 금륜. 신륜염제 이전부터 천마신교의 신물 중 하나가 돌아온 것이다.
“싫어?”
“그런 게 아니라.”
“싫은 것 같은데?”
후공이 다시 빼앗으려 했기에 풍제는 얼른 손을 뒤로하며 금륜을 숨겼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내놔아아아! 당장!”
이내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제갈혜도 마음껏 웃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다 함께 모인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웃음소리는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어떤 목소리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
그 시각,
마교의 지도부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품평회가 한창이었다.
대상은 당연히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지력은 10점.”
“물론이지.”
“광명우사, 이견의 여지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광명우사 냉선의 말에 마뇌를 비롯 칠마군과 오마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솔력은 9점.”
이번에 말을 꺼낸 건 마뇌였다.
광명우사가 즉각 반박했다.
“9점이라고? 천공단을 통솔하고 있는데도?”
“숫자가 적잖아!”
“나도 9점은 조금 박하다 싶군.”
“동감이오. 지존 앞에서 환호성을 내지르는 걸 보았지 않습니까. 천공단은 한 명 한 명이 일당백 정도가 아니라 일당천은 되니, 보이는 숫자가 전부가 아니지.”
마뇌의 9점은 빠르게 진압되어 결국 통솔력도 10점이 되었다. 초조해진 마뇌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직접 본 천화서고 대공자는 너무 대단해 보였기에 도리어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었다.
그렇게 바삐 머리를 굴리다 번뜩하고 떠올렸다.
“표정은 5점.”
이번에는 통했다.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지. 어린 친구가 너무 거만해.”
“초탈한 표정도 영 마음에 들지 않고!”
“난 4점.”
품평은 무력으로 넘어갔다.
“무력은 만점.”
말을 꺼낸 건 오마신 중 하나인 흑마신이었다.
나머지 오마신과 칠마군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광명좌사 목호와 마뇌는 갸웃했다.
“별것 없던데?”
물론 보여준 바가 많다. 충분히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지존과의 일전에서 처박히던 대공자의 모습을 떠올린 목호와 마뇌는 10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볼만도 하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광명우사,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건가?”
“당연하지.”
“오마신이 당했다는 그 사술?”
“그래. 아수라발발타.”
뭐…… 원래 이름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모든 걸 지켜보고 들었던 광명우사 냉선의 발언에 좌중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생각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도리어 너무 생각이 많아져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칠마군은 아수라발발타를 구경도 못 하고 당했고,
오마신은 아수라발발타를 몸소 겪은 터.
내력을 흩어버리는 공능이었다.
만약 그것이 펼쳐졌다면 승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니 결론은 하나.
승리는 어쩌면 대공자의 것일지도.
그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고, 원하지 않는 결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기에 침묵은 길어졌다.
상대가 후공이라면 모를까.
후공은 지존과 특수한 관계이고, 무림맹주인 주제에 천마신교를 제집 드나들 듯했으니 거의 천마신교의 명예 태상 장로급이다.
애초에 천하제일인이기도 하고.
하지만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천화서고 대공자는 다르다. 대단한 건 알겠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그 결과를 입에 올린다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이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그게 광명우사여도, 광명좌사여도.
그런 분위기였기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긴 눈치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마뇌였다.
“어…… 나는 조금 피곤하네. 쉬어야겠어.”
“허험,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럽시다, 그래.”
마음에 묻어두자. 괜한 일에 목숨을 걸 수는 없으니.
그런 생각으로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다른 한 곳은 아직 대화가 한창이었다.
소란이 한창이었다.
천공단은 여전히 마교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고 있음이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게 다 두목을 잘 만난 덕이야!”
“여기까지 온 데는 무극살부도 한몫 거들었지. 하하, 이쁜 놈들!”
“그러고 보니 처음 천공단 때가 떠오르네.”
“그때? 우리가 서로 천공단주 되겠다고 지랄염병을 떨었던 때?”
“하하하하, 맞아. 그때 적당히 안 멈췄으면 이런 영광의 날도 없었겠지.”
“우리 적당히 멈춘 적 없잖아요!”
“아, 그런가? 하긴, 수면독에 취해서 저승사자가 눈앞에 오고 나서야 멈췄지.”
“난 그때 없어서 다행이야. 하하, 얼마나 병신 같았을지.”
처음부터 함께했던 이들이나, 그 후에 합류했던 이들이나 누구 할 것 없이 웃고 떠들었다. 아마도 아침이 온다 해도 아침이 온 줄 모를 정도.
그 와중 남궁연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었고, 걷고 싶어서였다.
“하아…….”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남궁연은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처럼 태평하게 마교의 밤을 거닐 줄이야. 어떤 근심 걱정 없이 이곳을 바라볼 줄이야.
“하하…….”
절로 웃음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남궁 공자.
갑자기 들려온 전음에 남궁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찾지 못해 미간을 찡그릴 때, 다시 들려왔다.
- 여기네, 여기.
“누구십니까?”
- 나야.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볼 수 있었다.
- 아…… 그때 구겨지셨던 분?
- 쯧.
찬살마가 혀를 찼다.
새로운 별호가 생겨버린 느낌.
- 난 찬살마라고 하네.
- 한데 무슨 일로?
- 별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
- 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해드리겠습니다.
- 남궁세가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 네? 그게 왜?
- 그냥 뭐 심심해서.
남궁세가를 선망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찬살마는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변명했다.
- 뭐 특별할 게 없습니다만.
- 그래?
- 네, 수련하고 자고, 수련하고 자고 그렇습니다.
- 또?
- 또 수련하고, 자고. 또 수련하고 잡니다.
- 그게 다야?
- 네.
- 우리랑 같네?
- 그렇겠죠?
- 흐음, 그래도 남궁세가는 때리진 않겠지?
- 많이 때리는데요?
- 맞아봤어?
찬살마의 눈이 커졌다.
- 수도 없죠. 한 번은 열흘 내내 거동도 못 할 정도였는걸요.
- 왜?
- 제가 맞을 짓을 해서 맞고,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어서 맞고 그랬습니다만.
- 우리랑 같네?
- 그렇겠죠?
- 아니, 진짜 특별할 게 없네?
-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 …….
찬살마가 입을 쓰게 다셨다.
선망하던 가문에 대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 안 되겠다.
- 뭐가요?
다시 태어나면 남궁세가에서 태어나고 싶었는데, 거기가 거기인 셈. 찬살마는 생각을 바꿨다.
‘다시 태어나면 천화서고에서 태어나야겠어.’
- 무슨 생각하십니까?
- 잠시 꿈꿨어.
- 무슨 꿈을요?
- 내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되는 꿈.
“하하하하!”
남궁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왜 웃어?
- 그냥 천공단 되는 꿈이나 꾸세요.
개소리 그만하시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남궁연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웃어도 괜찮아서,
이곳이 마교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