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우리는 그저.
하루를 결정하는 말이 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침에 떠올리는 말.
젠장, 오늘 하루도 지옥이겠군.
비까지 내리고 지랄이야.
하아, 답답해.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떴구나.
어떤 이는 한숨과 함께 하루를 열고, 또 다른 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외치곤 한다.
기대돼. 오늘은 어떤 행운이 찾아올까.
끝내주는 하루가 되겠지?
비가 와. 징조가 좋아!
그 어느 날보다 나는 빛나겠지!
그럼 그렇게 된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에 누군가에겐 답답함이 찾아오고, 누군가에겐 행운이 찾아온다.
그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십 대 초반, 빼어난 미남자.
이름은 규산.
‘기분 좋은 날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럼 그대로 되었다.
하지만 최근엔 동의할 수 없었다.
되는 일이 없다.
어떤 새끼가 그딴 말을 한 걸까. 찾을 수만 있다면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을 정도. 매일매일 기분 좋은 날이야, 라는 말을 잊지 않고 하는데도 하루를 마칠 때면 꿉꿉한 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좀처럼 찾기 힘들어서다.
여태 겁탈하고 죽인 여인은 백여 명.
그렇게 다녔더니 눈이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미인이 씨가 말랐다.
물론 빼어난 미녀들은 있다.
제갈세가의 제갈혜가 그렇게 이쁘다던데.
남궁세가의 남궁소예가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사천에는 은소소라는 여인이 천하제일미라고 불린다던데…….
시도해볼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만 했다.
무리다. 과욕이다. 실력은 충분하다고 자부하지만, 소문난 미녀들은 독이 묻은 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욕구를 채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어리석다.
나는 현명한 자니까.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
‘찾았다!’
저잣거리를 걷던 중,
뒷모습이 아름다운 한 여인을 멈춰 세웠다.
“저기 소저, 잠시만.”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눈이 부실까.
여인이 돌아서면 미소를 보내주어야지. 여인의 눈은 커질 것이고, 이내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것이다. 그럼 끝이다. 약도 있지만 약은 아껴두자.
여인이 돌아섰다.
기대한 대로 미소 짓는 여인.
하지만 여인의 얼굴은 기대에서 벗어났다. 뒷모습만 경국지색. 얼굴은 평범했기에 규산은 원래 하려던 말을 삼키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착각했군요.”
시발.
그래, 이런 식이다.
요즘 통 재수가 없다.
이 비법이 왜 통하지 않는 걸까?
아름다운 여인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자.
명승지. 관광지.
멀지 않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많다. 몇 개월 전 화산이 폭발한 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용암이 아직까지 흘러넘치는 것을 멀리서라도 구경하려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멋지긴 하네.
신기하기도 하고.
한데…….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시발,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시발, 없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여인들이 많은데, 아름다운 여인이 없다.
밤이 찾아왔다.
밤이 깊어간다.
‘외로워.’
객방을 잡고 혼자 덩그런히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공허해졌다.
‘쓸쓸해.’
혼자라서, 혼자라서, 혼자라서.
그러다 떠올랐다.
“흐흐흐, 잊고 있었네. 난 혼자가 아니었지.”
착각했다. 잊고 있었다.
나는 추격받는 몸.
늘 쫓아오는 놈들이 있다. 날 죽이려고 기회를 노리는 놈들이 있다. 시발놈들이다.
죽은 여인들의 연인, 죽인 여인들의 아버지.
혹은 그들의 부탁을 받고 내 목숨을 노리는 놈들. 그런 놈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현재 이곳까지 추격해 온 건 넷.
언제나 기회만 엿본다.
화산 구경하러 왔냐!
평생 때만 기다릴 거냐!
멍청한 새끼들.
놈들을 살려둔 건, 알고도 죽이지 않은 건 아껴둔 것일 뿐이다. 너무 아끼다보니 그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떠올렸으니,
찾아가주마.
잠들어 있다. 미친 새낀가? 추격하는 주제에 자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깨우자. 푸욱! 칼이 목에 쑤셔박히고 나서야, 피가 튀어오르고 나서야 부릅뜬 눈.
클클, 너무 요란하게 깨웠나?
“나야.”
죽어가는 놈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넸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알아본 듯하다. 억울하겠지, 참담하겠지. 그러게 미친 새끼야, 왜 쫓아오냐고. 딸이든 연인이든 이미 죽었잖아!
그다음 한 놈을 더 죽였다.
남은 건 이제 둘.
한 놈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청년이었고,
또 한 놈은 딸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
청년은 아껴두자.
아버지를 찾아갔다. 이놈도 자고 있다. 몸을 새우처럼 말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나쁜 꿈을 꾸나 보다. 불쌍하기도 하지. 딸을 잃었으니 그럴 만하다.
불쌍한 새끼, 한심한 새끼.
광대뼈가 튀어나온 놈, 못생긴 놈.
딸이 아버지를 닮았더라면 살았을 텐데, 클클.
한심함도 말로 할 수 없다. 찾아올 용기도 없으면서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이렇게 다짐만 하며 따라오기만 한다.
별호가 뭐였더라?
권섬비. 그래, 그거다.
화경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만 어느 세월에.
하지만 이쪽은 이미 화경의 예다.
죽이지 말자. 오늘은.
자비냐고?
놈이 잠결에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냐고?
개소리는. 이놈은 그때 보지 못했다. 그날 보지 못했다. 본 것은 딸이 죽고 난 다음 주검뿐. 그러니 그때 못 본 것을 봐야 한다. 쫓아오는 건 잘하니 곧 보게 되겠지. 그땐 딸이 죽기 전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게 되겠지. 미쳐버리겠지.
아침이 왔다. 정오가 되어간다.
반점에 들었다. 보았다. 찾았다.
‘말도 안 돼…….’
규산은 너무 놀라 손을 덜덜 떨었다.
반점의 이 층. 창가에 자리한 두 여인. 아니, 두 여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는 너무 어리다.
고작 열 살? 열한 살? 그 정도로 보인다.
귀엽기는 하다만 그뿐.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 아예 그녀 외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면사를 쓰고 있었지만 바람이 불어 다행이다.
바람에 면사가 휘날려 잠시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반점이라서 다행이었다.
면사가 한 번씩 걷어지며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천하제일미.
아니, 이쯤이면 선녀의 강림.
음식을 대충 주문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심장이 요동치고 자꾸 곁눈질하게 되면 먹을 수 있을 리가.
여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화산에 가까이 가 볼까?”
“좋아요.”
소녀가 밝게 웃었다.
규산도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아름답다. 소녀야, 나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가 볼 생각이다.
반점을 나와 뒤를 밟았다. 여인이 천천히 걸었기에 규산도 천천히 걸었다. 여인은 모든 게 신기한가 보다. 이것저것 별 볼 일 없는 풍경에도 감탄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규산은 그것도 좋았다.
순진한 여인이로군. 세상이 처음인가? 꼭 그렇게 보여 규산은 웃음이 났다.
“기분 좋은 날이군.”
최근 하지 않던 말을 뒤늦게나마 작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이 말을 꼭 하자.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작은 산 언덕을 지나면서 인적이 뚝 끊어졌다.
장소가 좋다.
여인은 또 멈췄다.
이제 막 싹이 움트려는 꽃망울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환경도 좋다. 구경꾼이 있다.
권섬비가 뒤따르고 있다. 가까이 있다.
딸을 잃은 아버지. 지난밤 악몽을 꾸며 눈물을 흘렸던 아버지는 보게 될 것이다. 딸이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놈은 튀어나올까?
아니면 머뭇거릴까?
흐흐, 궁금해지는군.
허용했기에 추격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멍청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규산은 궁금해졌다.
“소저!”
멀리서 불렀다.
그때 좌측 풀숲에서 한 인영이 솟구쳤다. 못생긴 얼굴, 광대뼈가 도드라진 놈. 권섬비였기에 규산은 갸웃하다 히죽 웃고 말았다.
“튀어나왔네?”
권섬비는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연약한 여인과 어린 소녀가 아닌가. 여태 추격하면서도 권섬비는 내내 머뭇거리고 망설였지만 지금은 나설 때였다.
“악귀 놈아! 내가 오늘 너의 목숨을 거둬주마.”
“쯧쯧쯧쯧.”
“……?”
“실망스럽네.”
“뭐……?”
규산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난 예상이 빗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솔직히 난 네놈이 얌전히 구경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이 죽일 놈이!”
권섬비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것이 규산의 웃음을 불러왔다.
“하하하, 뭐 이것도 나쁘진 않다. 어차피 넌 구경꾼. 숨어 지켜보나 팔이 떨어져 나간 채로 여기서 지켜보나 그게 그거겠지. 그렇게 지켜봐라. 네 딸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어떻게 비명을 내질렀는지.”
그 대화만으로 충분했다.
현이신녀와 현음신녀는 모든 걸 본 것처럼 이해했다.
딸을 빼앗아간 중년인.
딸을 잃은 아버지.
딸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리고 중년인은 여태 어떤 일을 벌여왔는지도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물을 것도 없었다.
“소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시오.”
결과가 뻔한 걸 알면서도 자신이 시간을 벌어보겠다며 말하는 아버지를 보며 현음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려던 참이다.”
“……?”
권섬비의 눈이 커졌다.
여인도 아니고, 소녀의 말.
“가기 전에 너에게 답례를 해야겠구나. 위로가 되길.”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권섬비뿐 아니라 규산도 갸웃했다.
무공을 익혔다고?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볼 수 없거늘.
그땐 이미 현음은 걸음을 떼고 있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세 번째는 지면을 딛지 않았다. 형체가 나타난 건 어느새 규산의 눈앞.
규산이 경악하며 신형을 뒤로 물리려 했을 땐,
쩌저저저저적.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어갔다.
‘왜…… 내 몸이?’
손이 몸에 닿았나?
도대체 언제?
어디부터 얼어붙었던 거지?
발끝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규산은 어디서부터 얼어붙은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너, 너는…….”
장력조차 발출하지 못한 것에 놀라 누구냐고 물으려 했지만, 이내 목까지 얼어붙으면서 말을 마칠 수도 없었다.
이내 깨뜨리려 호신강기를 일으켰지만 무소용.
얼음이 깨지지 않는다.
몸은 급속도로 차가워진다.
이대로…… 머리까지 얼어붙게 되는 건가?
그건 아니다.
현음은 어느새 다시 권섬비 곁으로 돌아와 말을 건넸다.
“여름이 온다 해도 얼음은 녹지 않는다. 다시 계절이 바뀌어도 녹지 않는다.”
“가, 감사합니다.”
권섬비가 머리를 크게 조아렸다.
보았는데 모를 수가.
북해빙궁의 절세고수. 소녀의 모습이니 반로환동.
말한 의미도 이해했다.
원한다면 여름이 올 때까지 놈을 살려두고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처절하게.
오늘은 빛나는 날.
이루는 날.
깨어나며 이 말을 했기 때문일까?
현음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내 현이의 곁으로 나아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권섬비가 용기를 냈다.
“은인의 존성대명을 알려주십시오. 평생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존성대명이랄 게 있나.”
어느새 멀어졌다.
그러다 다시 들려왔다.
“우리는 그저 천화서고로 향하는 이들, 대공자를 만나러 가는 이들.”
권섬비는 그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천화서고 대공자.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이.
은인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