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손님들.
쿠우웅! 쿠우우웅!
천화서고는 계속 흔들렸다.
이 정도면 산 전체가 흔들린다고 봐야 했고, 지진이 발생한 것 같았기에 모두가 놀라 뛰쳐나왔다.
“지진인가?”
“으헉!”
몇몇은 흔들림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 사이로 윤과 부몽이 달리며 풍제를 보았다.
“교주님! 화산파가 왔대요. 함께 가시겠어요?”
“아는 얼굴일 수도 있잖아요!”
풍제는 뚱해졌다.
검선이야 아는 얼굴이 맞지만, 이놈들 말투가 문제였다. 이제 익숙해졌다 이건가? 마교 교주인데 어쩐지 옆집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었다.
“싫으시면 저희만 다녀올게요.”
“살아 돌아올게요!”
그 말에는 풍제도 그만 웃고 말았다.
“후후, 귀여운 놈들.”
*
그 와중 검선과 능량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애초에 계획이라면 얌전히 기다린다였는데, 진법의 환상이 변화를 일으킨 터.
물론 시작은 화산이었다.
정확히는 능량.
절벽에 거미가 달라붙듯 붙은 채로 어디 한번 찔러나 보자며 검을 날려 보았는데, 멀리 허공의 한 지점이 퉁 하고 가격당한 순간 진법이 급격히 변화했다.
절벽이 뜯어져나가듯 무너져내리니 손을 붙들 곳이 없어졌고, 떨어져내리는 암석 덩어리를 피하는 한편으로 연신 밟으면서 추락을 면하고 있는 상황.
“능량, 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놈아!”
“진법이 이렇게 지독하게 변화할 줄 제가 알았습니까!”
“네놈이 더 지독해! 지독한 멍청이 놈아!”
아웅다웅 다투면서 검선의 선택은 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진법을 날려버리자였다.
그 결과 쏘아진 검이 빛살처럼 사방팔방 날아다니며 진법을 한없이 타격하니, 그 충격파로 인해 천화서고가 뒤흔들렸다.
“사숙, 이러다 저녁 오겠습니다!”
“저녁이 뭐냐. 내일 아침도 이러고 있을 것 같다.”
“그럼 밥은?”
“하하하하!”
검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중에도 쏟아져내리는 암석을 계속 딛고 옮겨다니며 그 자리를 유지했고, 검의 운용도 멈추지 않았다.
그 광경을 윤과 부몽이 보았다.
“뭐냐?”
“형님, 검이 또 날아다닙니다!”
“내 말이.”
윤과 부몽이 보고 있는 광경은 달랐다.
진법 밖에서 볼 때 절벽은 없다. 그러니 무너져내릴 것도 없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두 고수가 신형을 번뜩이는 모습과 검이 미칠 듯 날아다니고 있는 광경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또한 검이 허공을 타격할 때마다 충격으로 땅이 흔들려 균형을 잡기 힘들 지경.
덕분에 마음에 겸손함과 예의가 날아들었다.
“부몽, 최대한 공손해지자.”
“그, 그래야죠.”
이윽고 진법을 해제.
한달음에 달려간 윤과 부몽이 예를 취했다.
“늦었습니다. 천화서고가 화산파의 고수분들을 환영합니다.”
능량은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방금까지 무너져내리던 절벽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자신과 사숙이 평온히 지면을 딛고 서 있는 터라,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굉장하네. 천화서고 진법.”
“죄송합니다. 두 분께 번거로움을 끼쳤습니다. 설마 뛰어내리는 분이 계실 것이라곤 생각지 못해…….”
“하하,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던져진 것이야.”
“그, 그러시군요.”
그 말이 더 황당해 부몽이 더듬거리며 눈치를 볼 때, 외마디 비명과 같은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이 달려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노가주였다.
화산의 검선이 왔다고?
그럴 리 없는데…….
검선이 천화서고에 올 리가 없는데…….
보면 알 수 있겠지.
노가주는 검선을 과거 외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친분이랄 것까진 없었고 안면이 있는 정도.
그렇게 달려오다 검선을 알아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 검선 아니시오?”
“가주, 오랜만이군.”
“어쩐 일로 검선께서 천화서고를…….”
“뭐 겸사겸사.”
검선의 말은 천화서고 대공자도 보고, 풍제와 암향야도 볼 겸 왔다는 의미였지만 노가주는 오해했다.
“호, 혹시…… 누가 천하제일인이냐를 두고 천화서고에서 대결을 벌이기로 하신 것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몰려올 수 없다.
이 기세면 무당파의 검존까지 오는 건가 싶을 지경.
하지만,
“하하하하하!”
검선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능량은 갸웃했다.
“잠깐만. 듣고 보니 그럴싸하네?”
“능량, 엎드려.”
“아, 정말.”
능량이 짜증을 내고 말을 이었다.
“다섯 대.”
“열 대. 일단 저축해 둔다.”
“…….”
**
천화서고는 다시금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마교 교주와 사천당가주의 정체가 사실로 드러났을 때만큼이나 충격에 빠져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분명 이제 적응되었다 싶었는데,
누가 온다고 해도 그저 사람 한 명 왔는가 보다 할 자신이 있었는데, 화산파의 검선이 누구인지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면서 처음과 같아졌다.
“할아버지, 이제 누구 남았죠?”
“무당파에 검존이란 분이 있다.”
“올까요?”
“끄응, 올 것 같다.”
“진법은 계속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누군가 쳐들어온다 해도 죽은 목숨일 테니.”
“싸우진 않겠죠?”
“그게 걱정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서로 서로 익히 아는 얼굴.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미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풍제,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그렇군.”
패거리는 아니었지만, 검선도 가끔씩 함께한 적이 있었기에 풍제와 당명은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검선, 여긴 어쩐 일로?”
“그댈 만나러 왔을까 봐?”
당명의 말에 검선이 쏘아붙이고는 이내 대공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대공자인가?”
“검선을 뵙습니다.”
“자네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군.”
그 말과 함께 검선은 지난 날 북교산 사건 후 만나러 갔었다는 말을 꺼냈다.
“저를 찾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까지야.”
검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기묘한 느낌에 내심 갸웃하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나?’
풍제와 암향야와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를 수정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저 풍제와 암향야가 강호의 샛별을 기특하게 여기고 귀엽게 여긴다 싶었거늘, 마주하고 보니 허허로움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예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기운조차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북교산 때보다 경지가 더 나아갔다는 의미. 화경의 중이나 화경의 극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놀라울 지경인데, 지금 내보이는 기도는 현경을 떠올리게 하니 어찌 이럴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험해 보자.
검선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암경을 발했다.
날카로운 예(銳)의 결이 아닌 무거움의 중(重)을 택했다.
밀어내는 힘이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에 따라 경지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버틴다면 현경의 예.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다면 화경의 극.
화경 중기라면 대공자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 터.
그리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버텨낸다면 조금 더 암경의 기세를 올릴 생각이었다.
검선의 생각은 길었으나 결과는 빨랐다.
후공은 당연하게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천람이 산들바람처럼 일어나 암경을 흩어버린 탓에 가볍게 옷자락만 휘날렸다.
검선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건 사실 당혹스러움을 숨기기 위함일 뿐.
‘암경을 흩어버린다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검선이 기세를 올리려 할 때였다.
“검선, 이쯤하지? 슬슬 짜증 나기 시작하거든.”
당명이었다.
후공과 풍제는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지만, 패거리의 막내는 원래 성격이 더럽다.
눈앞에서 대형을 시험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당장 어떻게 해버리고 싶을 지경.
모습은 달라졌다지만 대형이다.
감히 대형을 시험해? 그런 심정이라서 두 번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검선도 마찬가지.
당명이 은은히 살기까지 흘려대니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렇기에,
“하하하하하, 그만하려고 하던 참이네. 내가 실례를 범했군. 하하하하하하!”
참았다.
참아야지. 아무렴.
암향야 혼자라면 모를까, 후공의 패거리가 둘이나 있는데 싸울 수는 없는 노릇.
근데 이상하네.
이놈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기이한 느낌이 든 검선이었고, 곁에 있던 능량은 빠르게 작아졌던 간이 서서히 복구되고 있었다.
- 사숙, 우리는 손님입니다. 손님! 방금 도착했고요!
*
이후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가 오갔다.
검선과 능량은 궁금한 것이 많아 여러 질문을 쏟아냈고, 주로 답한 건 후공이었다.
질문은 많았고 예리했지만 후공은 암경을 흩어버리듯 교묘히 답했기에, 들을 때는 놀라웠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밤.
“능량아, 신검 이야기 말이다. 어떻게 찾았다고 했지?”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가 뭐였냐고?”
“왜죠?”
“응?”
“왜 생각이 안 나죠?”
“…….”
검선도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호 삼대 대도(大盜)며 지천과 흑전 이야기를 듣고 그다음 이야기도 듣긴 했다. 들을 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흥미진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알맹이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뭔가 빠졌는데…….”
“큰 것이 빠진 것 같은데 말이죠.”
“뭘 놓친 걸까?”
천화서고 대공자가 후공이라는 것이 빠졌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를 들어도 뭔가 허허로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행운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사숙, 그것 같습니다.”
“오호! 생각이 난 것이냐!”
“네, 그겁니다.”
“그니까 그것이 뭐냐?”
“행운의 부적.”
“…….”
“대공자는 행운의 부적을 얻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
“그렇지 않고서야 대공자가 삼악을 어떻게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신검을 어떻게 운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
“엎드려야겠죠?”
“그래.”
*
그 밤.
능량이 맞고 있는 밤.
천화서고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여인이었다.
한 사람은 젋고 아름다웠고, 한 사람은 작고 귀여웠다.
산을 올라 천천히 나아가는 길.
멀리 천화서고가 보였기에 두 여인은 걸음을 멈췄다.
“……왜?”
현이신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현음신녀도 마찬가지.
이야기 듣기로 절벽이 있다고 했는데 절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절벽은 환영진이며 쉽게 여기고 나아갔다간 봉변을 당한다고 하였는데, 진법을 열어둔 모습이니 도리어 당혹스러워졌다.
“사저, 대공자는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는 걸까요?”
“그, 그럴 리가.”
현이가 더듬거렸다.
오는 걸 알고 있을 순 없다.
하지만 대공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었다.
부근에 오면 마중나오겠노라고.
그때 대공자는 손을 잡았고, 잡은 손에 무언가를 남겼다. 혹시 천리향을 남겼나 싶어 한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 그러다 혼자 멋쩍게 웃고는 잊고 있었다.
“일단 가봐요.”
“…….”
현이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상상했던 천화서고의 첫 모습은 절벽 끝자락, 그리고 그 너머 하늘이었는데 천화서고의 전각이 훤히 보이니 망설여졌다.
언제든 천화서고로 오라고 말했지만, 그저 흔한 인사말에 불과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음.”
“네.”
“안 되겠다. 우리 그냥 여기에서…….”
돌아가자.
그 말이 끝나기 전, 들려왔다.
“현이신녀.”
목소리가 먼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 앞에서 번뜩인다 싶을 때 볼 수 있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이내 대공자가 눈앞에 이르렀다.
현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
그리고 북해빙궁에서 함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신녀, 설마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요?”
현이는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대공자가 미소 짓고 있을 뿐인데, 수많은 보석이 빛을 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현이신녀를 구한 건 현음이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이에요.”
“하하하하하하!”
현음의 말에 대공자가 웃음을 터뜨렸기에 다행이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 너머로 이제야 비로소 제 얼굴이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