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그녀에게 봄을.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갔다.
천화서고의 각 전각 지붕마다 하얗게 뒤덮였고, 지면에 쌓인 눈은 발목까지 올라와 딛는 걸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환상이 아니었다.
천화서고가 북해빙궁이 된 건가.
모두가 넋이 나갔다.
하지만 색관조와 금섬은 아니었다.
퍼억, 퍼억!
자존심 강한 두 영물은 벌써부터 눈을 뭉쳐 던지며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맞고 죽어라! 금빛 찬란한 두꺼비!]
[극극!]
색관조가 눈을 뭉쳐 연신 던졌지만, 금섬도 만만치 않았다. 요리조리 피하면서 눈을 커다랗게 뭉쳐 어른 머리 크기만큼 만든 다음 내던졌다.
색관조의 몸통에 직격.
퍼석.
흰 눈의 파편과 함께 색관조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크으으으…… 나 죽음.]
[큭큭큭!]
금섬이 달려가 쓰러진 색관조의 몸을 딛고 거만하게 승리자의 포효를 내뱉었다.
[그으으으으으으으윽~~~.]
그것이 시작이었다.
모두가 뛰어들어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부몽, 받아라!”
“어림없습니다, 형님!”
“눈에 누가 돌 넣었냐!”
“나도 피 나.”
“진짜?”
“거짓말이지. 하하하하!”
눈덩이가 사방에서 던져지고, 눈사람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졌다.
노가주도 눈덩이를 맞았다.
쓰러져야 하나? 차마 죽은 척은 할 수 없어 가주는 껄껄 웃고 말았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이 필요 없어졌다.
눈꽃 축제였다.
“사숙, 이런 광경은 처음 봅니다.”
“동감이다.”
능량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이야기는 멈췄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북해빙궁 현음신녀의 사저라고 했던가?
내내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지금의 광경은 너무 놀라워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사숙, 우리도 가죠.”
“후후.”
검선이 웃기만 하니 능량만 달려갔다.
이내 능량은 아이처럼 눈을 뭉쳐 던졌고, 연신 죽었다가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났다.
그 모습에 검선은 끌끌 혀를 차고는 시선을 옮겨 현음신녀를 바라봤다.
“궁주, 그대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지금의 광경처럼,
온통 사방을 눈으로 뒤덮을 수 있느냐는 물음.
현음신녀가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사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답니다.”
“괴이하구려. 어찌 여태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오? 혹여 최근 어떤 깨달음에 이르러 경지가 오른 것이오?”
“사저는 이미 오래전 꽃다운 나이에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궁주, 그 말은 틀린 듯하오.”
“?”
현음이 갸웃하자, 검선이 답을 들려주었다.
“지금도.”
“아!”
지금도 꽃다운 나이로 보인다는 의미요, 여전히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이었기에 현음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허허, 뭘 또 고맙기까지. 무슨 말을 못하겠구려.”
현음이 웃었다.
하지만 고마움은 진심이었다.
빙벽 안에서 70년. 사저는 그 긴 세월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냈고, 빙궁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현음은 사저가 보상받길 원했다.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찬사받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 한편 풍제와 당명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찡찡해져 있었다.
- 사긴데?
- 사기입니다.
한바탕 축제.
천화서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차 싶어진 두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들은 빈 손으로 온 것이다.
한데 이제 막 도착한 빙궁이 대형의 천화서고에 선물을 뿌리고 있으니 기분이 마냥 좋지만 않았다.
이쪽은 무려 아우들이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염혼을 생성해 보여줄 수도 없다. 좋은 분위기가 한순간 서늘해지고 만다. 그쯤이면 선물이 아니라 위협. 공포 분위기만 조성하게 된다.
당명의 만천화우도 마찬가지.
그러니 지금의 광경은 사기였다.
모두를 즐겁게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 극음지체라고?
- 네, 빙벽 안에서 70년을 보냈다니…… 사기꾼입니다.
- 사기꾼이지.
풍제와 당명의 찡찡함은 깊어졌다.
대형에게 들었다.
상세히 들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내내 북해빙궁에서 천공단과 함께 있는 것만 같았었다.
그러니 사기였다.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사기.
도대체 어떤 인내심인가.
얼마나 깊은 마음을 지녔음인가.
얼마나 성정이 곧은가.
그 세월이면 한이 쌓이고, 원망이 쌓여야 맞다.
사람이면 그래야 한다.
분노를 표출하고 살인을 자행해도 탓할 수 없다. 빙궁이 온통 붉은 피로 젖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한데 왜인가?
어찌하여 마화(魔化)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도 그렇다.
현이는 평온한 미소를 띄운 채 천화서고를 보고 있을 뿐. 그 세월을 지나고도 그 시간을 견디고도 이처럼 밝음을 유지하다니…… 풍제와 당명은 경이로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사연을 아는 이나,
사연을 모르는 이나 모두가 현이를 경이롭게 여겼다.
밤의 눈꽃 축제는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그 밤,
멀리서 또 다른 손님들이 밤을 잊은 채 천화서고로 향하고 있었다.
“장문 사형, 대공자가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신형을 날리는 이는 둘.
흰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들이었다.
“그러길 바랄 수밖에.”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도착할 때 풍제와 암향야가 아직 머물고 있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길 바랄 수밖에.
질풍과도 같이 내달리는 두 사람의 옷깃이 미칠 듯이 펄럭였다. 수놓아진 태극 문양도.
무당파가 천화서고로 향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천화서고.
천화서고는 아직까지 지난 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큰형님, 아침 인사 드립니다.”
“큰형님, 아직도 눈이 쌓여 있습니다. 믿어지시나요?”
늦게 잠들었음에도 일찍 일어난 두 아우가 들어섰기에 후공이 반겼다.
“너흰 일찍 일어났구나. 일찍 일어난 새가 매도 많이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윤과 부몽의 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요?”
“저희가 뭘…….”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기분 좋게 왔다가 날벼락이었기에 이내 울상이 되었다.
“눈을 치우는 것 때문에 그러시나요?”
“큰형님, 운치는 어디에 두시고 눈 걱정이신가요. 눈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치울 테니까요.”
“눈은 무슨.”
“그럼요?”
“본 서고를 찾아온 귀한 손님께 다짜고짜 눈을 내려 달라는 부탁한 것이 문제다. 하루가 지났느냐, 이틀이 지났느냐.”
“아…….”
“죄, 죄송합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기에 윤과 부몽은 해야 할 일을 했다. 엉거주춤 엎드렸고, 후공은 송화를 불렀다.
송화가 몽둥이를 들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공자님, 여기요.”
이 정도면 거의 몽둥이를 들고 다니고 있다고 봐야 하는 수준. 후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차를 내와라.”
“……네.”
송화가 시무룩하니 돌아서자, 벌떡 일어난 윤과 부몽이 송화를 죽일 듯 노려봤다.
“넌 왜 서운해하는 거냐?”
“우리가 맞아야 속이 시원하냐!”
“헤헤헤!”
송화가 헤실거리곤 꽁무니를 뺐다.
잠시 후 탁자에 찻잔이 놓였다.
“큰형님,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큰일이 터졌는데 너희는 태평하기 짝이 없구나.”
“큰일이 터지다뇨?”
윤과 부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이 왔을 뿐인데요?”
“그리고 큰일이 난다 해도 마교 교주님이 계시고 사천당가주에 화산의 검선이 와 있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쯧쯧, 모자란 놈들.”
후공은 혀를 끌끌 차고는 말을 이었다.
“지난밤에 본 서고가 신녀에게 이렇게, 이렇게, 이이이이렇게 큰 선물을 받지 않았느냐.”
“이이이이렇게요?”
“이러어어어렇게가 틀림없죠!”
윤과 부몽이 따라하면서 두 팔로 큰 원을 연신 그렸다.
모두가 팔로 원을 그려가니 영락없이 모자란 세 형제들처럼 보였다.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천화서고에서도 그만큼 큰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자, 그러니 생각해 봐라. 신녀께 어떤 선물을 드려야 격에 맞을지.”
“…….”
“…….”
윤과 부몽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생각을 못했다.
지난밤 쏟아져 내린 눈에 견줄 만한 선물이 무엇이 있을까.
“육각망 껍데기…….”
파악!
부몽이 말을 꺼내자마자 윤이 머리를 후려갈겼다.
“부몽, 미쳐버렸냐!”
“나름 진귀한 것을 고르다 보니.”
“그렇다고 어떻게 넌 손님께 껍데기를 드릴 생각을 하냐!”
고심해 봐도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결국 윤과 부몽은 항복했다.
“큰형님, 혹여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 아우,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당연히 후공은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신녀께선 아직 봄을 맞이한 적이 없다.”
“네?”
“여름도, 가을도.”
“네??”
“수행에 정진하시느라 그럴 여력이 없으셨지. 신녀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아!”
윤과 부몽이 동시에 탄성을 발했다.
“할 수 있겠지?”
“그럼요!”
“큰 형님, 맡겨 주세요!”
윤과 부몽이 씩씩하게 답하는 소리를 현이가 들었다.
거처는 멀었지만, 그리고 귀담아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왔기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듣게 되었다.
‘선물이라니……. 무엇일까?’
*
그 밤.
아직 눈은 녹지 않았다.
전각의 처마마다 고드름까지 얼어 도리어 운치가 깊어졌고, 곳곳에 눈사람을 볼 수 있었다.
현이가 그 밤을 걸었다.
지난 밤 차분히 혼자 걸으려 했던 걸음을 다시 걸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떠올랐다.
‘선물은 뭘까?’
선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처럼 천화서고를 걷는 것이 선물인데…….
대공자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선물인데…….
그때 들려왔다.
“현이신녀.”
인기척과 함께 대공자가 다가왔기에 현이는 뺨이 붉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렸다.
“대공자, 어서 오세요.”
“저도 조금 걷고 싶어져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가 천화서고를 걷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가만히 있을 수 없더군요.”
“하하, 세상의 모든 미녀를 다 만나 보았을 대공자가 그리 말씀하시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밤 건네주신 선물은 감사합니다.”
“아! 그것 때문에…….”
대공자가 온 건 선물에 대한 답례로구나.
현이는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선물을 준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궁금하긴 해도 의미를 두진 않았다.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이 선물.
대공자와 함께 걷는 것이 선물이었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선물이었다.
“신녀, 저희가 답례로 선물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짐작하실 수 없을 겁니다.”
“껍……질?”
“하하하하하!”
“아닌가요?”
현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말에 대공자가 웃은 것이다.
“신녀, 지금 선물이 오고 있는데 들리십니까?”
“어떤…….”
“봄.”
봄?
현이가 어리둥절해할 때, 봄이 찾아왔다.
한줄기 봄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이 스치며 주변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르르.
기존에 보이던 모든 풍경이 사라져갔다.
지면을 포근히 덮고 있던 눈이 사라지고, 처마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도 사라졌다. 눈사람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대신 땅을 뚫고 나무가 솟아났고, 싹이 움틈과 동시에 꽃이 피었다. 작은 나무들과 큰 나무마다 꽃이 형형색색 만개하면서 진한 꽃향기가 번져 갔다.
현이의 주변에도 같았다.
그녀 주위로 허리 높이까지 올라온 작은 꽃나무들이 살랑거리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 사이를 나비가 날고, 벌이 오갔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현이는 넋을 잃었다.
‘봄이구나!’
현이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봄이었다.
그 봄이 너무 아름다워,
향기에 취해,
또한 그 봄을 맞은 곳이 천화서고여서 현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최고의 시간,
그리고 최고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