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무당 장문인의 탄식.
현이는 꽃길을 거닐었다.
그녀가 걷는 길에 노랗고 붉고 하얀 꽃들이 그녀를 맞이하며 살랑거렸고,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그녀를 따라 날았다.
‘겨울에 만나 함께 봄을 맞이했어.’
현이는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노란 나비가 그녀의 손 끝에 내려앉았다. 잠깐 날개를 펄럭인 탓에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분명 이 봄은 환상.
한데 실제처럼 느껴지니 현이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신녀, 천화서고의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대공자, 생애 최고의 선물이에요.”
거짓말이었다.
가장 큰 선물은 빙궁에서 받았다.
대공자가 빙벽을 녹였을 때였고, 대공자가 자신을 죽이려 할 때였다. 그리고 그런 대공자를 현음이 가로막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맞섰을 때가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빙궁의 모두가 반겨주며 크게 외칠 때는 온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날 빙궁의 밤이 최고의 선물.
하지만 이 밤도 못지 않다.
그리고 그날의 선물도 대공자가 보내온 것이고, 이 밤도 대공자.
대공자는 언제나 선물을 건네는 이다.
“다행입니다.”
“대공자, 그대는 선물을 고르는 재주가 실로 뛰어나군요.”
“크흠, 원래 선물하면 접니다. 아부가 몸에 배었습니다.”
“하하하!”
현이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자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뒤흔든다. 울림을 주었다가 웃음을 주었다가 한다. 지금처럼 한 번씩 엉뚱한 말을 할 때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에 만나 대공자와 봄까지 함께한 것 같아.’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하나의 계절을 지나온 느낌. 여름과 가을도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름에는 매미가 운다고 했다.
가을에는 시원한 가을 바람 속에 귀뚜라미가 밤의 정취를 더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현이가 봄에 익숙해졌을 때,
일순 바람이 뜨거워졌다.
그와 동시에 꽃과 나비와 벌이 빛이 부서지듯 흩날렸다.
온 사방이 푸르름으로 뒤덮였고, 들이마시는 호흡에 후끈한 공기가 들어왔다. 그 더위 속에 사방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맴맴맴. 맴매에에에에에에엠.
푸르른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반딧불이도 볼 수 있었다.
현이는 이야기로만 들어온 광경이었다.
‘여름 밤…….’
멍해진 현이는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처럼 덥고 후끈한 공기는 처음이었다. 나뭇잎의 푸르름과 매미의 힘찬 울음소리가 생동감으로 가득한 것도 처음이었다.
“대공자, 매미는 계속 우는 게 아닌가 봐요?”
싸우는 것처럼 맹렬하게 들려오던 매미 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기에 현이가 갸웃하며 물었다.
“네, 매미는 한 번씩 쉽니다.”
“쉴 땐 한꺼번에 쉬는 건가요?”
“네, 저도 매번 그 점이 궁금하긴 했습니다. 일사불란한 것이 아마도 두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공단 같네요.”
“하하하!”
여름 밤에.
대공자가 웃었기에 현이도 함께 따라 웃었다.
가을이 찾아왔다.
드디어 듣게 된 귀뚜라미 소리.
뛰뛰뛰뛰? 띠띠띠? 뀌뀌? 따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현이는 시원한 가을바람과 함께 작게 따라해 봤다.
가을은 길었다.
겨울이 올 때가 되었다 싶었는데도 가을만 이어졌다.
현이는 짙게 물든 단풍이 봄의 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떨어져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을 밟고 걷기도 했다.
사락, 사락.
겨울 낙엽을 딛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좋아 현이는 한참이나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가을 밤.
아무도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끼어들 수가 없었고, 방해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 사숙,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겠지.
- 근데 어째 그림이 자연스럽습니다만?
- 후후, 그렇구나. 아쉽다.
- 아쉽다뇨?
- 대공자 대신 내가 서 있어야 하는데.
- 상상만 해도 그림이 엉망…….
- 거기까지.
- 네!
화산파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지만, 진지한 이들도 있었다.
‘부몽, 북해빙궁의 절세고수가 우리의 형수님이 되는 거냐?’
‘경쟁자가 많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너무나도 잘 어울리잖냐.’
‘그건 그렇네요. 싸움도 제일 잘하실 것 같고요.’
‘싸움을 하면 다 얼려버리는 건가?’
‘그렇겠죠?’
윤과 부몽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입 모양만으로 대화하며 미래를 떠올려보고 있었다.
‘꼭! 반드시! 신녀님께서 형수님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너 너무 간절한데? 제갈 누님과 남궁 소저는 어쩌고?’
‘그 두 분은 안 됐으면 좋겠습니다.’
‘왜?’
‘형님, 지금이 무더운 여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응.’
‘익힌 달달한 팥에 얼음을 즉석에서 갈아넣고 먹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을까요? 얼마나 시원할까요? 그 맛있는 걸 여름이면 매일 먹는 겁니다.’
‘와아, 죽이네.’
‘그러니까 다른 형수님은 생각도 마세요.’
‘응!’
제갈 소저, 남궁 소저.
그 외 기타 등등.
모조리 윤과 부몽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남은 건 오직 현이신녀뿐이었다.
정확히는 얼음 얼음.
그리고 팥.
- 명아, 형님과 잘 어울리는구나.
다른 한편에선 풍제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전음에 당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 기묘함까지…… 어울립니다.
- 그렇지.
한 사람은 환혼되어 젊어졌고,
한 사람은 빙벽에 갇혀 세월을 잊은 이.
젊어진 이와 젊음의 때 멈춘 이들이라, 함께 가을밤을 걷고 있는 것을 보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다른 공통점도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경을 맞이했음에도 두 사람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까지 비슷했다.
그런 대화 사이에 제갈혜가 끼어들었다.
- 백부님, 숙부님. 저 고백할 게 있어요.
- 고백?
- 네, 실은 저 정혼자가 있어요.
- 뭐?
- 어떤 놈이야!
풍제와 당명이 발끈했다.
아버지처럼 구는 모습에 제갈혜가 터지려는 웃음을 손을 들어 막았다.
- 어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현이신녀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요?
- 크흐으음.
그제야 풍제와 당명이 불편한 기색을 떨쳐냈다.
현이신녀는 좋아할까?
그럴 것 같다.
제갈혜가 늘 대형의 곁에 있는 모습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니까.
그리고 대형의 마음은 알 길이 없어도 현이신녀는 이미 대형에게 마음이 빼앗긴 듯하니.
-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 저희가 불공평한 사람과 함께 다닌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다.
수많은 미녀들이 대형을 흠모했다.
진전은 없었다. 패고 다니기 바빴고, 파묻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를지도.
그렇게 각각 바라보는 시선과 기대 속에 가을 밤이 깊어갔다.
단풍은 더욱 깊어지고 화려하게 빛났으며, 귀뚜라미의 울음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운취를 더해 주었다.
그렇게 다음 날도 가을이 이어질 때, 또 다른 손님이 천화서고를 찾아왔다.
*
“허허, 천화서고는 가을이로구나.”
“사형, 오늘이 천화서고에 기념할 만한 날인가 봅니다.”
무당파 장문인 청인자와 사제 청진자가 가을 풍경 속으로 들어섰다.
분명 놀라게 된다면 풍제와 암향야를 보고 놀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늦겨울에 풍취 가득한 가을을 보게 되면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주변 풍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무당의 놀라움은 이어졌다.
풍제와 암향야뿐 아니라 화산의 검선과 반로환동한 북해빙궁의 궁주와 그녀의 사저까지 보게 된 탓이었다.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인사 중에 청진자는 특히 더 반가워했다.
“대공자, 이리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네.”
청진자는 금원장에서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제자와 함께 갔던 길에 만난 천공단. 그리고 대공자.
땅 속을 이동하는 지천을 상대하던 대공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한 번씩 눈에 어른거렸다. 무당으로 돌아간 후에는 그 일에 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 했는지 모른다.
“저도 반갑습니다. 도장께서 오실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장문인과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후공의 말은 진심이었다.
온다면 청진자의 사형.
검존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
장문인보다는 검존이 와야 격에 맞는다.
무려 마교 교주와 사천당가주가 와 있는 자리에 고작 화경의 중에 이른 장문인이라니.
그러니 이는 질문이기도 했다.
검존은 왜 오지 않았는가?
청진자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존재의 무게는 다르다.
무당 장문인이라는 직분의 무게가 가볍진 않아도 이 자리에 맞는 건 아니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네.”
“?”
그렇게 자리를 함께 했다.
모두가 둘러앉았다.
말을 꺼내기 전 무당 장문인 청인자가 면면을 둘러봤다.
천화서고의 후계자인 대공자.
대공자를 신뢰하는 천하제일인의 패거리.
그리고 화산의 검선과 북해빙궁의 궁주와 궁주의 사저.
하나같이 믿을 만한 이들이었다.
청인자가 무거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실은 본 파에 문제가 생겼소이다. 정확히는 사형에게 문제가 생겼지요.”
“검존에게 문제가 생길 일이 있나?”
당명이 건들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시비는 아니었다.
그저 무당 장문 청인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았기에, 이는 도리어 걱정 말라는 위로나 다름없었다.
청인자가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암향야의 말씀이 옳습니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일이 아니다 싶기도 합니다.”
좌중에 호기심이 커지는 가운데 청인자의 말이 이어졌다.
“이십여 일 전입니다. 사형께서 한순간 모든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응?”
“기억을?”
“갑자기 말인가요?”
예상 밖의 말에 누구 할 것 없이 눈이 커졌다.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 표헌이 맞습니다. 머물고 계시던 암자의 침소에서 주무시던 중에 깨어나셨을 뿐인데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셨고, 현재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시며 스스로도 당혹을 금치 못하시는 모습이었다오.”
“허허…….”
“……주화입마로군요.”
검선은 어이가 없는지 너털거렸고, 빙궁의 궁주 현음은 주화입마를 당한 당사자인 탓에 그렇게 단정했다.
하지만 후공은 달랐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
운기행공 중이 아닌 상황에서 주화입마는 극히 드문 일. 천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이다.
그런 마음의 동요는 풍제와 당명도 같았다.
대형에게 상세히 들었기에 두 사람 다 머리에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환혼’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청인자의 말이 이어졌다.
“주화입마라고 봐야겠지요. 비록 운기행공 중이 아닌 취침에 드신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긴 해도, 그 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억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이군요?”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찾지 못하셨소이다. 이 노부가 온 것도 사실 그 부분을 해결하고자 도움을 청하려 온 것입니다.”
검존이 기억을 잃었다면 검존은 사라진 셈이나 마찬가지.
언제 회복할지 막연하고, 회복이 되기는 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흐음…….”
현음신녀가 고개를 돌려 대공자를 바라봤다.
대공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였다.
자신도 주화입마를 당했고, 반로환동과 함께 기억을 상실했던 터. 대공자가 극단으로 몰아가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영 기억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서서 대공자를 부추길 수는 없다.
이건 오롯이 대공자의 선택.
대공자는 자신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이.
대공자가 선택해야 하고, 대공자가 판단할 일이었다.
청인자의 시선이 풍제에게 향했다.
“풍제,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한번 살펴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풍제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공교롭군. 내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려면 한 달은 지나야 할 것 같군.”
“아…….”
청인자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청인자의 시선은 당명에게로 옮겨졌다.
당명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형님과 동행.”
“아…….”
그럴 수 있다.
청인자는 못내 서운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기에 받아들였다.
그래도 아직 실망하긴 이르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저도 두 분과 동행하기로 약속이 된 터라 당장 시간을 낼 수 없겠군요.”
“아…………………….”
이번에는 탄식이 길었다.
가장 믿을 만한, 그리고 기대했던 세 사람이 여건이 안 되다니.
“그럼 검선께선.”
기대를 품고 화산의 검선에게 물었다.
검선이 쓰게 웃었다.
“이거 미안하구만. 나도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아…………………….”
깊은 탄식과 함께 청인자의 낯빛이 썩어들어갔다.
왜 이렇게 다들 바쁜 것인가?
정녕 다들 바쁜 것이 맞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혀 바쁘지 않았다.
진실은 전혀 달랐다.
이미 전음이 오간 터.
거절하라는 대공자의 전음이 있었다.
풍제와 당명 그리고 빙궁은 절대적인 신뢰 속에 의문을 품지 않았고, 화산의 검선은 다른 이유였다. 뭔가 재밌을 것 같았기에 그 말대로 하겠노라 답했을 뿐.
과연 환혼일까?
후공은 누구보다 궁금해졌다.
서둘러 무당으로 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