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기억을 잃은 노인. 모든 것이 흥미로운 여인.
‘하아…….’
무당 장문인 청인자는 내심 탄식이 멈추지 않았다.
강호의 절세 고수들을 만나게 되어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강요할 순 없다.
이 자리에 있는 면면은 자신이 강요당할 입장이지, 강요할 수 없는 이들.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어본들 답은 듣지 못하겠지. 예의도 아니다.
그래도 물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무당파에 먼저 들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장문인의 탄식을 외면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대공자였다.
뜻밖의 말에 희망을 본 청인자가 풍제를 바라봤다.
풍제의 입이 열렸다.
“대공자, 그대가 편치 않다면 동행을 권할 생각은 없다. 그대의 재주가 뛰어나니 혼자 무당파로 가서 돕는 것도 좋겠군.”
“죄송합니다.”
청인자는 퀭.
희망은 떠오르기 무섭게 사라졌고, 풍제가 은은히 발한 분노에 분위기도 한순간에 얼어붙고 불편해졌기에 좌불안석이 되었다.
청인자는 자신이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수습에 나섰다.
“대공자, 마음 고맙네.”
이어 풍제를 향해 말을 이었다.
“풍제, 노여워 마십시오. 한 달이면 긴 시간도 아닙니다. 일을 마치신 후 편히 찾아주십시오.”
“빠르면 빠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가겠다.”
“감사합니다.”
예를 표한 청인자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서둘러 떠나 주는 것이 하루라도 빨리 풍제와 암향야, 그리고 대공자를 맞이하는 길.
밖으로 나가 작별 인사가 오갔다.
아쉬움과 다음 만남을 기약했고, 소리없이 전음이 오가기도 했다.
- 현음신녀, 반로환동은 어찌되신 겁니까?
- 주화입마를 겪고 깨어나 보니 이렇게 귀여운 소녀가 되어 있더군요.
- 혹시 기억을 잃지는 않았습니까?
- 전혀요.
- 아, 그러시군요. 무량수불……. 다행입니다. 실로 천운입니다.
기억을 잃었던 현음신녀는 태연하게 둘러댔고, 청인자는 그 말이 거짓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
무당이 떠난 후,
다시 자리를 함께했다.
“자, 들어보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현음신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대공자를 향했다가 다시 풍제에게로 옮겨졌다.
그녀로선 누구의 생각인지도 이젠 헛갈리는 상황.
처음 대공자의 전음을 들었을 때만 해도 대공자가 주도한다고 생각했는데, 대공자가 풍제에게 권하는 말을 듣게 되면서는 풍제가 시작인가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공자를 배제하진 않았다.
직접 겪어 보지 않았던가.
대공자는 신출귀몰한 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측이 안 되는 인물.
그런 현음의 시선의 의미를 모를 후공이 아니었다.
누가 주도한 것인가?
그렇게 묻고 있다.
분명 자신이 주도한 건 틀림없지만, 그렇게 가선 안 된다. 환혼일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건 풍제.
“궁주, 저는 그저 풍제께서 지시하셔서 따랐을 뿐입니다. 전음은 물론이고 방금 전 권유의 말도 풍제께서 그리하라 지시하신 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 말을 풍제가 이어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궁주, 검선! 청인자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였소?”
“이상한 점?”
현음과 검선이 동시에 갸웃했다.
“잠을 청하는 중에 주화입마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운기행공 중에 주화입마를 겪는 일조차 극히 드문 일이거늘.”
“흐음, 일어나기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어요.”
“하지만 풍제, 그렇다고 없다고 볼 수도 없지 않소. 비록 천 년에 한두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긴 해도 말이오.”
만약 검존이 심마에 쌓여 있었다면 가능성은 커진다며 검선이 말을 보탰다.
풍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주화입마가 아니라 사람이 바뀐 것이라면?”
“역용?”
“환혼?”
현음신녀와 검선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역용을 말했던 현음이 이내 갸웃했다.
“검선, 환혼이라뇨?”
“허험, 내가 너무 나갔구려. 환혼은 고대 문헌에 그저 한 줄 언급되었을 뿐이거늘.”
검선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현음은 풍제를 바라봤다.
정녕 환혼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풍제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문헌에서 본 것일 뿐. 하지만 거기엔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이 있었소. 환혼은 진법의 운용으로 가능하며 초기에는 환혼 대상의 기억을 흡수하지 못한다. 짧으면 열흘, 길면 한 달. 그 이후 비로소 새로운 몸의 기억을 흡수한다.”
당연히 문헌을 보았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모두 대형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들었던 말.
“아! 기억 상실…….”
“허허허…….”
현음과 검선이 탄성을 발했다.
비로소 둘러댄 이유가 이해된 것이다.
풍제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까진 무엇도 단언할 수 없소. 역용이나 환혼이라기엔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으니.”
“어떤 점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다르겠지만…… 불순한 목적으로 역용이나 환혼한 이라면 굳이 기억을 잃었다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이 말 또한 대형이 따로 보내온 전음이었다.
풍제도 바로 이해했고, 동의를 표했다.
대형의 경우는 의도치 않은 환혼이었기에 기억상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았다. 모든 것이 생소했을 테니.
하지만 의도된 환혼이라면 상대는 환혼 대상의 정보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일 터. 굳이 기억상실이란 말로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일은 확인이 필요하다.
무당 장문인과 그의 사제인 청진자가 무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끝내야 한다.
먼저 무당에 도착한다.
“풍제, 무당에 세 분만 가시는 건 아니겠죠?”
현음신녀가 빙긋 웃으며 청했다.
바로 이어 화산 검선도 동행을 요구했다.
풍제가 잠시 고민할 때, 전음이 들려왔다.
- 함께 가자.
대형의 전음.
풍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같이 갑시다. 대신 내 방식대로.”
“물론이에요.”
“당연히.”
현음과 검선이 웃으며 답했다.
방식에 담긴 의미를 모를까. 후공의 패거리. 그들의 방식.
거칠고 과감하며 속전속결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가운데,
한 사람만 고요했다.
현이신녀는 내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강호의 일상…… 강호의 대화. 흥미로워.’
기쁘기도 했다.
무엇을 보게 될까?
대공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되겠지.
얼마나 보기 좋을까.
현이는 한껏 기대되었다.
**
그렇게 길을 떠났다.
마교 교주, 사천당가주.
화산의 검선과 신비함에 쌓인 북해빙궁.
그리고 천화서고의 후계자.
모두가 현경의 고수.
나아가는 길, 풍경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났고 바람조차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새는 그들보다 빨랐다.
[까르르르르르르! 강호야, 우리가 간다. 금두꺼비와 아름다운 새가 나가신다. 야, 저리 비켜! 부딪힐 뻔했잖아!]
색관조가 그저 갈 길 가고 있는 새에게 호통치고는 빠르게 주인의 머리 위로 날았고, 금섬이 극극거렸다.
이 길에 초대받지 못한 건 화산의 능량.
“대공자, 어디 갔어? 사숙은 또 어디로 가고? 이러는 게 어딨어! 왜 나만 남겨 두고 가냐고오오오오!”
말도 없이 가버린 탓에 천화서고에 덩그런히 남아 절규했다.
천화서고 노가주 또한 분통을 터뜨린 건 당연했다.
“그럼 그렇지. 내 어쩐지 오래 있는다 했다.”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여름이면 돌아오겠죠.”
“금방 돌아올 수도 있고요.”
“이번엔 또 뭘 찾으러 간다더냐? 너희는 들은 것이 있느냐?”
“어…… 그게 그러니까 큰형님이 물론 농담하신 것이겠지만, 누구 하나 담그러 간다고 하시던데요?”
“사람을 담가?”
“네.”
부르르르르.
노가주가 거품을 물고 모로 쓰러졌다.
**
무당산.
‘나는 누굴까? 나는 도대체…….’
산자락에 지어진 암자에서 노인은 그렇게 한 번씩 되뇌었다. 모든 것이 생소했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찌 자신의 얼굴조차 낯설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건지 모를 일. 그 점이 무척 신기했다.
땅이 땅이란 것도 알겠고, 하늘이 하늘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나무도 꽃들도. 한데 감쪽같이 자신과 관계된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기묘할 따름이었다.
‘나는 누굴까……?’
누구인지 듣긴 했다.
검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무당파라는 이름도 생소하고, 검존이라는 칭호는 더욱 생소했다.
장문인이란 이가 찾아왔고, 여러 제자가 공경의 눈빛을 보내왔지만 공감은 어려웠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누구일까?’
그렇게 밤을 맞이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텅 빈 마음이 한없이 공허하게 느껴지면서 잠을 앗아갔다.
‘내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걸까? 무당파라는 곳의 필요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
‘잠을 청하자. 혹시 아는가.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지. 그래, 잠들자.’
한 마리, 두 마리.
머리로 소를 떠올렸다.
소가 그렇게 한 마리씩 울타리를 넘었다.
어느샌가 오백 마리.
‘젠장…….’
이건 아니다 싶어 뺨을 긁적일 때였다.
“?”
자신도 알 수 없는 감각에 의해 눈을 부릅떴다가 보았다.
‘누, 누구?’
끔찍한 얼굴이었다.
곱추였고, 광대뼈가 괴상하게 튀어나왔다. 두 눈의 위치도 이상했다. 입도 비뚤어져 있었다.
괴, 괴물.
괴물이 틀림없었다.
죽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는데 기이하게도 이미 자신이 손을 뻗어가고 있었다. 공간을 찢으며 괴물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괴물이 죽는다.
그저 알 수 있었다.
괴물은 죽어야지.
아니, 살려둘까?
이자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뻗어낸 손에 변화를 가하기도 전,
물컹!
손은 수렁에 빠졌다.
강대한 파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손을 거둬들일 수도 없었다.
이것은 뭘까?
뭐라고 불러야 할까?
둥그런 막이 투명하게 일렁이고 있다.
덫?
그런 생각을 할 때, 가슴에 손이 닿았다.
기운이 한순간에 빠져나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경악성을 내뱉으려 했지만 목이 잠기고 혀가 굳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뻐끔 뻐끔.
‘누, 누구냐?’
- 클클, 궁금해?
괴물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래. 넌 누구지? 나는 누구고?’
- 클클클…… 나는 화공신타.
‘화공……신타? 처음 들어보는데…….’
그러다 웃을 뻔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데 처음 들어본 게 당연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너.
‘…….’
- 기억을 잃었다고?
‘그래.’
- 기억나게 해 주마.
‘어, 어떻게?’
- 클클, 비밀.
노인은 그때 보았다.
괴물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둘이 더 있었다.
‘아…….’
그 둘도 괴물.
한 사람은 얼굴이 끝도 없이 흩어지고 부서져내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너무 아름다웠기에 괴물처럼 보였다.
- 가자.
노인에게 향한 전음이 아니었다.
후공의 전음에 당명이 노인을 들쳐맸다.
그리고 이내 모두가 문을 나섰다.
뒤따르는 현이신녀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 피어나 있었다.
‘이것이 강호……. 괴상해.’
그리고,
‘즐거워.’
70년의 세월을 빙벽 안에서 보낸 여인은,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흥미로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