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기억을 회복시키는 방법.
‘대체 나는 누구일까?’
끌려가는 길,
노인은 납치범들보다 자기 자신이 더 궁금했다.
‘나는 검존이 아니었던 건가? 사실 나는 악인이었던 걸까?’
그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사라졌다.
검존일지는 몰라도 악인은 아닐 것 같았다.
자신을 제압한 이…….
화공신타라고 말한 이의 얼굴이 흉악한 데다 말투도 경망스럽기 그지없었으니.
분명 내가 놈들과 원한을 맺었겠지.
그렇다는 건, 놈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의미다.
불행인가, 다행인가?
이건 불행.
노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해도 곧 죽음을 맞게 될 것 같은 것이다.
산을 벗어나 또 다른 산.
계속 이동했다.
그러다 멈춘 건 숲 안.
목에 거친 손이 스쳤고, 바로 내동댕이쳐졌다.
노인은 꼴사납게 몇 번 구르다 누운 자세로 눈동자를 굴려 바라봤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셋.
거기에 더해 다른 세 사람이 더 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어떻게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화공신타를 바라봤다.
이놈이 우두머리겠지?
“화공신타, 나는 누구지? 어?”
노인은 무심결에 말을 던졌다가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걸 깨닫고 당황했다.
“클클클, 내가 말했을 텐데. 곧 기억이 날 거라고.”
“어떻게?”
“널 찢어버릴 생각이거든.”
“그, 그게 무슨?”
노인은 당혹을 금치 못했지만, 화공신타의 잔혹한 웃음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때, 나타났다.
노인의 주변으로 묵빛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나는가 싶더니 사람의 형체를 갖춰 갔다.
풍제의 네 염혼이었다.
염혼들이 킬킬거리며 각각 노인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잡고는 들어 올려 잡아당겼다.
노인이 두 팔과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연기가 사람인 양 웃음을 흘린 것도 놀랍고, 들린 순간 이미 팽팽하게 당겨져 즉시 팔다리가 뜯겨 나갈 것 같아 기겁했다.
“마, 말하겠다. 말하겠다! 그러니 제발 날 뜯지 마라!”
효과가 즉시 나타났기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호, 드디어 기억이 났나 봐요.”
“아까는 기억이 안 난다더니?”
“후후, 사지가 찢어질 판인데 없던 기억도 나겠지.”
현음과 당명이 비웃고, 화산의 검선도 득의양양해졌다.
“대공자, 저는 정말 뜯어내는 줄 알고 놀랐답니다.”
현이신녀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 말에는 화공신타가 미간을 찡그리고 노려봤다.
“신녀, 지금은 천화서고의 대공자가 아닙니다만.”
“아, 맞다. 그랬죠.”
“주의해 주십시오.”
“하하, 네.”
화공신타, 아니 후공은 확신하고 있었다.
우선 역용은 아니다.
이미 자령안으로 살핀 터. 그 결과 역용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환혼일 가능성이 높다.
짐작되는 상황은 둘.
하나는 환혼의 충격에 의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을 가능성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
한데 후자였던 모양.
“들어보자.”
“…….”
노인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기억은 여전히 캄캄한 것이다. 그저 사지가 뜯겨나갈 것 같아 당장의 위기를 넘기려 했을 뿐이었다.
“말해.”
“나, 나는…… 무당의 검존.”
“도호.”
“청허자.”
“클클, 찢어야겠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네 염혼이 잡아당겼다.
사지가 쭉 늘어나면서 노인이 소리쳤다.
“사실이다. 그렇게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믿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우드득.
어깨와 다리 관절이 탈골되면서 노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상태로 더 늘어났기에 비명은 더 커졌다. 이대로면 팔다리가 뽑히는 건 시간 문제.
겨우 멈췄다.
여전히 사지가 잡힌 채로 노인은 땀에 흥건히 젖었다.
“대,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냐! 내가 틀렸다면, 내가 검존이 아니라면, 그럼 알려다오. 내가 누구인지. 너희는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모른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몰랐다.
노인도 노인 자신을 알고 싶어 했고, 후공과 풍제를 비롯한 모두도 알고 싶어 했다.
준비한 건 많았다.
이제 두 번째를 시도할 때.
“암향야.”
화공신타의 말에 당명이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일순 염혼이 흩어졌고, 그사이 당명은 한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내 당명이 다른 한손으로 노인의 뼈마디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분근착골수였다.
그것도 현경의 고수가 펼치는 분근착골수.
뼈에 달라붙어 있는 살이 뜯어져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노인은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결과,
답은 듣지 못했다.
소득은 없었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그다음 나선 이는 빙궁의 궁주 현음신녀.
기진맥진 널브러진 노인의 손을 잡고 한기를 불어넣었다.
“으드드드드드드드……, 제발…… 제발…….”
노인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이를 딱딱거렸다.
소녀의 손속이 어찌 이리도 잔혹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녀가 아닌가? 그보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다. 그 상태에서 날카로운 칼날로 저며오는 통증.
잠시 후 노인은 온몸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모습이 되었고, 노인의 하얀 눈썹은 더 하얗게 변했으며 입술도 파랗게 질렸다.
이것이 지옥인가?
전생에 나는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것일까.
아니, 현생일지도.
기진맥진.
노인은 이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검존이 아닌 게 분명하다.’
검존일 리가 없다.
이들은 확신하고 있는 듯하지 않는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내가 검존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 듯 하다.
그럼 난 누구?
떠올리자.
‘나는…… 검존이 아니다. 생각해내자.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내자. 생각해내자. 떠올라라. 제발! 제발! 제발!’
만약 누구인지 떠올랐을 때 그 결과가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노인은 진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야 죽을 수 있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떠올리지 않는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언제까지 겪게 될지 모른다. 끔찍한 고문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으니 누구인지를 실토한 후 죽는 것이 최선.
- 대형.
그러는 사이 당명이 전음을 보냈다.
후공은 고개를 저었다.
- 이 정도면 됐다.
당명이 교릉을 펼치실 차례라며 알려왔지만 후공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미 상대의 의지가 꺾였고 극히 무기력한 상태. 굳이 여기에서 교릉을 추가한다 해도 의미 없었다.
이제 끝을 볼 차례.
진실에 다가갈 차례였다.
후공은 풍제를 바라보는 것으로 의중을 전달했다.
풍제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알게 되겠군요.”
현음신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대공자가 나설 차례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건너뛰었다.
하긴 이 상태에선 의미 없을 지도.
지금까지의 과정은 실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풍제의 섭혼을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했다.
검존은 현경의 고수.
만약 환혼이라 해도 섭혼을 펼쳤을 시 풍제에게도 타격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의식이 어떤 저항도 할 수 없게 신체에 고문을 가했던 터.
“누구일지 기대되는구려.”
검선도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모두가 기대하며 바라볼 때, 풍제의 손이 노인을 가리켰다.
노인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며 기립했고, 풍제와 눈이 마주쳤다. 풍제의 눈동자 테두리를 따라 금빛이 원을 그리며 한 바퀴 회전했다.
노인이 빨려들듯 회전하는 금빛을 본 순간,
쩌어엉!
섭혼이 발현.
풍제의 마령안(魔靈眼)에 사로잡힌 노인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풍제가 입을 열었다.
“바다의 풍경은 오랜만이겠지?”
“바다는 언제 봐도 신비롭습니다.”
노인의 눈동자가 막연해졌다.
먼 바다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두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공을 비롯 모두가 노인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섭혼은 무의식의 밑바닥을 끌어올리는 것.
이 대답이 곧 진실이다.
이윽고,
노인이 눈을 떴을 때 서서히 정광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위대한 이름……. 지키는 이…….”
“무엇을 지키느냐?”
“드높은 명성, 위대한 문파.”
노인의 미소가 사라지면서 진중하게 변해 갔다. 풍제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무당파. 그 아래 나는 검존.”
쿠웅.
누군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사실은 전부.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화산 검선이 엄청 빠르게 전음을 발했다.
전음을 받은 당명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이미 지진을 일으켰고 침을 연신 삼켰다.
‘젠장, 망했네…….’
현음신녀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현이신녀도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건 마찬가지.
당연하게도 풍제도 한껏 미간을 좁히고는 마령안을 강화했다.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냐?”
“검존. 청허자.”
“…….”
풍제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더 이상의 확인은 의미 없다.
이젠 수습해야 할 때였다.
“들어라.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 밤의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곳도, 그 누구도.”
“기억 저편으로 영원히.”
“잠들어라.”
스르륵.
검존이 두 눈을 감으며 허물어졌기에 풍제가 검존을 붙들고 눕혔다.
현음의 뾰족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풍제! 환혼이라면서요? 이제 어떡할 건가요?”
“…….”
현음뿐이 아니었다.
“아니, 환혼은 무슨! 풍제, 도대체 어디서 어떤 문헌을 보고 그런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지껄인 거요! 하아…… 아주 검존을 작살내놨으니 앞으로 무당을 어찌 본단 말인가!”
화산의 검선도 울화를 터뜨렸다.
풍제는 묵묵부답.
식은땀이 맺힐 것 같았다.
대형이 주도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도 대형만큼이나 확신했던 것도 있고.
풍제는 당연하게도 수습을 위해 대형을 바라봤다.
- 대형?
후공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풍제, 이런 분이셨습니까? 저는 오늘 크게 실망했습니다.”
“……………….”
풍제가 원망의 눈빛을 쏘아 보냈기에 후공은 얼른 딴청을 피웠다.
다들 얼이 나간 채 검존을 바라봤지만, 한없이 머뭇거리고만 있진 않았다.
풍제는 품에서 천마신교의 영단을 꺼내 검존의 입에 밀어넣었고, 당명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검존의 어긋난 뼈마디를 맞추었고, 이어 추궁과혈했다.
현음도 거들었다.
불어넣었던 한기를 모조리 거둬들였고, 추궁과혈을 도왔다. 검존의 혈색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 후 무당으로 데리고 간 건 후공.
그 곁을 현이가 따랐다.
- 대공자, 원래 후공의 패거리는 이런 식이었나 보죠?
- 그, 그런 것 같습니다.
당사자였기에 후공은 더듬거리고 말았다.
**
검존은 깊이 잠들었다.
몸을 한 번도 뒤틀지 않을 정도로 깊게 빠져든 잠결에 한 목소리를 들었다.
‘화공신타.’
쇳소리 같은 목소리.
꿈결에 흉측한 얼굴.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분명 화공신타였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이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부서져내리는 얼굴을 한 이.
그들은 누구일까?
나의 상상인가?
꿈은 계속 이어졌다.
연기로 만들어진 네 괴물들.
내 몸을 찢으려 했다.
또 들려온다. 그리고 보인다.
‘지금은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니라고?’
놈이었다. 화공신타가 그렇게 말한다.
그다음에는 온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리고 소녀. 소녀의 얼굴이 귀엽다. 그 소녀의 손이 닿았지. 피가 얼어붙어. 뼈가 얼어붙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추위가 느껴져 검존은 몸을 떨었다.
그들은 누구지?
왜 내게?
아니, 잠깐만.
그보다 나는 누구지?
그 순간 머리에 번개가 쳤다.
생각났다.
‘나는 무당의 청허자. 검존.’
그 자각이 시작.
모든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그 빠른 스쳐감 속에 한 사람 한 사람 알아볼 수 있었다.
‘풍제, 암향야, 검선…….’
소녀는? 여인은?
모르는 얼굴.
하지만 나는 검존.
그리고,
‘화공신타…… 천화서고 대공자……. 개…….’
모든 걸 떠올린 검존이 눈을 번쩍 떴다.
“개…….”
그때 검존 곁에서 근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무당 장문인 청인자와 사제 청진자가 화들짝 놀랐다.
“사, 사형!”
“정신이 드십니까? 사형, 왜 그러십니까? 개라니요?”
검존인 사형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은 것이 벌써 닷새째였다. 기쁨도 잠시 근심이 컸다. 닷새나 잠들어 있던 사형의 첫마디가 ‘개’가 되면 근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상체를 일으켰던 검존이 아예 벌떡 일어났다.
“개…….”
“개요?”
“개…….”
“개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이 개새끼들아아아아아아아아! 기다려라아아아아아아아아!”
사자후를 터뜨린 검존이 손을 뻗었다.
검이 수중에 빨려들어온 순간 이미 검존은 사라지고 없었다.
장문인 청인자가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이미 까마득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화공신타! 다 죽여버린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닥쳐라. 청인자. 나는 모두 기억났다.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무당 장문인 청인자가 멍해졌다.
‘이게 무슨?’
기억난 것 같아 기쁘면서도 또 다른 걱정이 일어났다. 왜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는 건가.
그리고,
‘화공신타를 왜?’
어디에 있는 줄은 아시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