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소향객.
이제 가야할 곳은 무림맹.
환혼일까? 가능성은 크다. 그저 가능성.
후공은 확정짓진 않았다.
확정하게 되면 사람의 시야는 좁아진다. 마음은 기울어지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세상에는 많은 ‘의외’가 존재한다.
빙궁의 현이신녀의 진실이 달랐고, 천금서고의 선우진도 뜻밖이었다.
진실에 기반해 확인한다.
그런 점에서 후공은 소향객보다는 흑주석의 파괴가 지금으로선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흑주석은 드러난 진실.
소향객은 확인을 거쳐야한다.
- 대형, 동행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당명이 물어왔다.
다른 이들의 동행 여부에 관한 물음이었다.
북해빙궁의 현음과 현이.
화산의 검선.
무당의 검존.
모두가 지고한 경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
그 후 모인 자리.
“대공자, 무림맹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궁주 현음이 물었다.
검선과 검존도 궁금해했다.
모두가 무림맹에서 서신이 왔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고, 색관조가 다시 무림맹을 다녀온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혹여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건가? 몰래 엿들어보려 했더니 색관조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더군.”
화산 검선이 투덜거렸다.
후공은 웃어 보였다.
“궁금해하시라고 비밀스러운 척했습니다. 풍제께서 그렇게 하자고 하셨습니다.”
“어디 들어보세.”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맹의 진법에 문제가 생겨 모용모용…… 아니 모용 군사가 제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흑주석의 파괴에 대해 부연 설명을 이어가자, 다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그뿐이었나?”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맹의 천하십객 중 하나인 소향객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니?”
“분위기나 느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용 군사의 개인적인 관점이라 마음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분위기가 때때로 바뀌는 건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한데?”
말을 멈추자, 좌중의 집중도가 올라갔다.
후공은 풍제 쪽을 슬쩍 바라봤다.
“풍제께서 다른 의견을 내셨습니다. 소향객이 환혼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환혼?”
“또 환혼?”
검선과 검존이 풍제를 노려봤다.
현음신녀의 눈매도 매서워졌다.
“풍제, 이제 어지간하면 다 환혼으로 몰고 가기로 한 건가요? 왜 갑자지 환혼에 꽂힌 거죠? 저도 어느날 침울해져선 안 되겠군요. 환혼으로 몰려 고문당할까 무섭네요.”
현음이 쏘아붙였고, 검선도 학을 뗐다.
“풍제, 그대의 패거리가 온갖 기행을 벌인 건 알고 있지만 환혼은 너무 나간 것 아니오! 이미 한차례 그대의 말에 휘둘려 크게 실수를 했고, 그 당사자도 이곳에 있고 말이오!”
검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엄청 씩씩거렸다.
“이젠 심지어 주화입마도 아니고 분위기만으로 몰아가는군!”
풍제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너털대며 웃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고, 비난은 예상하고 있었다.
비바람을 막는 담벼락이 된 기분.
대형은 매사 이런 식이다.
뒤집어씌우고, 대형 스스로 뒤집어쓰기도 한다.
오해를 받아야만 한다면, 감당한다.
이것이 우리의 방식.
대형의 방식.
“풍제, 주무시오? 뭐라고 말 좀 하시오!”
“더럽게 시끄럽네.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죽일까 봐!”
당명이 발끈했다.
그것이 고성을 불러왔다.
검선과 검존이 삿대질을 해댔고, 당명은 연신 콧방귀를 날렸다.
후공이 나섰다.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저와 풍제 그리고 암향야, 이렇게 세 사람만 가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대공자, 그럴 순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또 누굴 반 죽여 놓으려고! 함께 가세!”
다들 적극적으로 동행을 요구했다.
후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라던 바였다.
모두가 현경의 고수.
변수가 생긴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별일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
그리고,
누군가에겐 여행이 될 것이다.
“현이신녀, 신녀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현이신녀가 살짝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
무림맹으로 떠난다는 말이 전해졌다.
천화서고 노가주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래, 다녀와라. 갈 때가 되었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노가주 스스로도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한 일.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교 교주가 웃어도 무서운 걸. 다정하게 말을 걸어와도 움츠러드는걸. 유령같은 괴생물체도 무섭고.
그래서 덧붙이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돌아올 땐 천공단하고만 와라. 마교 교주님과 사천당가주는 이래저래 바쁘시지 않겠느냐.”
*
그렇게 길을 나섰다.
천공단도 동행했다.
하지만 발을 맞춘 건 아니었다.
출발은 같았지만 이내 순식간에 뒤처졌고, 현경의 고수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나아가는 길.
“풍제, 환혼에 대한 생각은 여전하신가요?”
“가능성만.”
“여전하군요. 그럼 궁금해지는군요.”
신법을 전개하며 풍제가 곁을 내려다봤다.
조그마한 소녀, 현음신녀가 입술을 귀엽게 오므렸다가 열었다.
“현 강호에 그럴 만한 곳이 있을까요? 밀교는 어떤가요?”
“밀교는 아니지.”
“유령곡은 어때요?”
“거긴 대공자가 이미 확인을 마쳤고.”
“그럼 귀운종은?”
“현음신녀, 귀운종이 그럴 능력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그대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현음이 미간을 찡그렸다.
풍제의 말이 곧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밀교도 아니고, 유령곡도 아니다.
귀운종은 유령곡보다 더 크게 말살당했다.
주도한 건 후공.
그리고 후공의 패거리.
거기엔 현음 자신도 포함되었다. 그 와중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후공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회복했다.
그렇게 겪었고, 보았기에 현음은 확신했다.
귀운종의 재건은 무리다.
맹의 천하십객이 한 번씩 들여다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니 풍제, 이번엔 억지를 부리진 마세요. 또 고문을 한다든지.”
“하하, 그럴 리가. 약속하지.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고.”
“반가운 말씀이네요.”
현음이 걱정을 덜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풍제도 웃고 말았다.
처음부터 소향객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건드릴 사람은 따로 있으니.
풍제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현이신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신형을 움직이는 이.
천화서고 대공자.
대형.
천하제일인.
**
어느덧 무림맹이 눈앞.
모두가 산 너머에서 무림맹을 바라봤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공자가 뜻을 전했다.
홀로 신형을 날렸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무림맹의 서신은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온 것.
우선 혼자 가야 한다.
다 같이 들이닥칠 경우 설명해야 할 말이 많아진다. 번잡스러움이 말로 할 수 없게 된다.
검선이든 검존이든, 또는 북해빙궁의 현음이든 단 한 사람이라도 맹에 발을 딛는 순간 떠들썩해질 터. 풍제는 말할 것도 없다.
다들 말없이 눈으로 배웅했다.
‘소향객에겐 미안하지만…… 환혼이었으면 좋겠구나.’
풍제와 당명은 그런 생각을 담아 바라봤고,
‘대공자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현이신녀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겼다.
**
걱정은 쓸데없는 일.
천화서고 대공자는 후공.
무림맹주!
무림맹은 또 다른 천화서고나 다름없었다.
또한 천화서고 대공자가 되어서도 환대받는 이.
신검의 새로운 주인.
맹은 지나간 어느 밤의 자줏빛 광채들을 잊지 않고 있었고, 암부 부주 화설난에게 베푼 대공자의 은혜도 자주 말하곤 했다.
그렇기에 외곽 경비대가 알아본 순간 이미 경기를 일으켰고, 극진히 환영했다.
풍제가 아님에도,
암향야가 아님에도,
북해빙궁의 궁주와 검선과 검존이 아님에도,
마치 그들 중 한 사람을 반기는 것처럼 반겼다.
후공은 일일이 인사를 나눴고,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뛰쳐나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대공자!”
화설난이었다. 화설난은 당장 넘어질 것처럼 달려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후공은 반기지 않았다.
그저 뚱하니 화설난을 바라보다 갸웃했다.
“누구……?”
“하하하하하!”
화설난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젊어진 화설난의 모습은 이미 보았지만, 후공은 또 봐도 보기 좋았다. 마치 꽃이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꽃이 웃고, 꽃이 말을 해서 놀랐습니다.”
“원래는 꽃이 아니었는데 누구 때문에 꽃이 되었답니다.”
“그런가요?”
“물론이죠.”
“원래부터 꽃이었습니다.”
그 말에 화설난이 다시 웃었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동자가 보석인 양 반짝였다. 화설난은 눈물이 입가에 느껴진 뒤에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웃으면서 울면?”
“하하하하, 뭐든 괜찮아요!”
두 사람의 대화를 많은 이들이 지켜봤다.
대화를 나누도록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몇몇은 함께 웃었고, 또 누구는 화설난처럼 눈물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대공자, 제가 대공자를 조금 더 차지하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화설난이 청했다.
그녀는 고마움을 더 전하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건지도 궁금했다. 대공자, 그리고 천공단과 함께했던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기에 아무 말이든 듣고 싶었다.
“조금? 서운하군요.”
“하하하! 많이, 아주 많이요!”
“흥! 이미 늦었습니다.”
후공은 화설난의 모습이 귀여웠지만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그 후,
맹의 군사 모용곽과 마주했다.
“대공자, 이리도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궁금하기도 하여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정녕 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연 현상이라고 하기에도 근거가 부족합니다. 지진이 발생한 적도 없고, 근래 들어 큰비가 내린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느냐는 모용곽의 물음이 이어졌다.
“오는 내내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전혀 짐작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제가 눈으로 살펴보고 싶은데,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함께 둘러봤다.
색관조가 들려준 그대로였다.
후공은 별 감흥이 없었다.
바스라진 흑주석을 바라본들 의미없다.
질문을 던져 봐야 흑주석이 답을 할 리가.
또 얼마나 많은 이가 세심하게 살폈을 것인가.
이제 중요한 건 소향객.
다시 돌아와 앉았다.
- 모용 군사, 듣기만 하십시오.
- ?
- 지금부터는 이야기를 둘로 나눕니다. 대화는 아무 말이나 편하게 나누고, 그 이면에 전음을 교환하도록 하죠.
모용곽의 눈이 커졌다.
‘설마?’
대공자는 이미 단서를 찾았단 말인가?
무림맹 내부 인사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대공자, 그보다 우리 진이는 어떻습니까? 천공단 내에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입니다.”
- 대공자, 무슨 이유라도?
“하하하, 모용 형은 천공단에 녹아든 지 오래입니다. 엉뚱한 소리도 잘하고, 재밌기도 합니다.”
- 소향객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 소향객……?
모용곽의 눈이 더 커졌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색관조에게 말하긴 했지만…….’
“하하, 다행입니다. 재밌는 녀석이 아닌데 재밌어졌다니 믿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 대화를 한 사람이 들었다.
자신의 처소에서 찻잔을 입에 가져가면서,
톡톡톡.
소향객이 탁자를 두드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