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장문인은 못생겼습니다.
“크아아아악!”
“크윽!”
비명은 한동안 이어졌다.
태언장에 머물고 있던 회영부의 칠십여 검수들이었다.
광충, 뇌극파, 안령비가 속절없이 무너진 순간, 그들의 선택은 하나였다. 도주! 약속이라도 한 듯 태언장을 빠져나갔다. 도망쳐야 해! 숨어야 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하지만 쓸데없는 일이다.
현경의 고수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추격조차 필요 없었다.
검선이 맡았다. 검선은 태언장의 한 전각 지붕을 딛고 선 채 검을 날려 보냈을 뿐이었다.
그 무심한 시선 속에,
누군가는 지붕 위를 타고 달리다 빛에 꿰뚫렸다.
번화가로 파고들어 골목길로 막 접어든 검수는 빛을 보았다 싶을 땐 빛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숨어 있던 검수도 소용 없었다.
허름한 창고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던 한 검수는 작게 열린 창문 틈새로 파고든 검광과 마주했다.
스윽!
심장이 뚫리며 절명.
다른 동료들의 잇따른 비명 소리에 질려버린 한 검수는 곧 자신의 차례가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길을 걷던 노인을 인질로 잡으려 했다.
화공신타는 화공신타가 아니었다. 혈종마군도 다른 이. 천화서고 대공자와 마교 교주. 그 무리가 무서운 자들이란 건 틀림없지만 공동파를 구하러 온 것도 틀림없는 사실.
무섭지만, 한편으로 관대하고 선한 이들.
공동파라는 인질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인질들이라면 길가에 널렸다.
노인을 뒤에서 덮쳐 인질로 삼으려 할 때,
스아악!
빛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큭!”
외마디 비명을 듣고 노인이 돌아봤을 땐, 한 검객이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노인이 검객의 몸을 흔들었다.
“이보시게, 괜찮나?”
한점을 쾌속하게 뚫려 아직 피조차 흘러나오지 않았기에 그냥 쓰러진 것이라 여겼다.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자 노인이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누구 없소! 여기 사람이 쓰러졌소!”
단번에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하오문 루주였다.
“쯧쯧, 이 친구는 여기서 자고 있었구만. 밤새 술을 그렇게 처마시더라니.”
수하 둘과 함께였다. 수하 중 한 명은 이미 다른 검수를 업고 있었기에, 다른 수하가 쓰러져 있는 검수를 들쳐업었다.
하오문 루주는 노인에게 웃어 보이곤, 수하들과 함께 사라졌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부탁이었다. 대공자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목소리만. 비명 소리를 따라가며 쓰러져 있는 검수들을 태언장으로 옮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대체 어떤 경지인가?
어디에서 전음을 발하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많다.
태언장은 어떤 곳이었을까.
태언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태언장에 가게 되면 알 수 있겠지.
들려주겠지.
하오문은 열 채의 전각을 거저 내주었으니.
화공신타는 아직 있을까?
신타는 조금 무서운데.
*
태언장을 빠져나간 검수들은 시체로 돌아왔다.
산처럼 쌓였다.
여러 하오문도들이 들락거린 결과였다.
풍경이 과하다.
눈에 들어찬 광경만으론 다짜고짜 한 가문을 몰살시킨 것으로 보였다.
과연 그럴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오문도들은 이면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오문의 친구.
천화서고 대공자의 행사에 이유가 없을 리가.
이번 일에 가담한 면면만 봐도 놀랍기에 그런 생각이 든다.
마교 교주님, 사천당가주님.
검선님, 검존님. 그리고 소녀와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화공신타와 혈종마군.
엄청난 일이겠지.
하오문도들은 묻지 않고 검수들의 시체만 쌓고 돌아갔다.
“대공자, 땅도 파야겠지?”
하오문 루주만 남았다.
궁금한 것이 많은 루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 전에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 같았다.
“흠, 듣고 보니 그게 낫겠군.”
답한 건 다가온 검선.
하지만 후공은 고개를 저었다.
“묻지 않아도 됩니다. 다 모이면 제가 처리하지요.”
“그런가.”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검선은 고개만 끄덕였다. 함께 다녀 보니 이젠 그냥 믿어지는 것이다. 다 생각이 있겠지, 하게 되는 지경.
그렇게 검선이 몸을 돌리자, 루주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대공자.”
후공이 바라보자, 루주가 속삭임을 이었다.
“화공신타, 아니 화공신타 님은 어디 계시나? 인사라도 드려야겠는데 말이네.”
“신타께선 급한 일이 있다며 사라지셨습니다.”
“그래?”
“네, 원래 멋대로입니다.”
“흐음, 이거 아쉽구만.”
정작 루주의 표정엔 아쉬움 따윈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싱글벙글이었다.
“루주,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가지라니 서운하구만. 백 개라도 괜찮네.”
“후후, 하오문에서 태언장의 시녀들과 일꾼들을 거둬 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네!”
태언장에 머물고 있는 모두가 죽음을 맞은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원치 않게 억압된 이들은 살아남았다.
떠나길 원하는 이들은 보내주고,
남아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은 하오문이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것뿐인가? 다른 건?”
“없습니다. 아, 하나 더 있군요. 태언장의 보물과 재산은 모두 하오문에서 알아서 처리하시면 됩니다.”
“그, 그래도 되나?”
루주가 멍해져 더듬거렸다.
태언장의 규모가 방대하고, 하오문조차 파악하지 못한 범상치 않은 곳이었으니 그걸 감안하면 부의 규모도 차원이 다를 터. 부서진 열 채의 전각에 대한 보상치곤 지나치게 과분했다.
대공자를 만나게 되면 좋은 일이 생긴다더니.
루주는 이내 생각을 떨쳐내고 물었다.
“근데 대공자,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 아주 요만큼이라도 설명해 주면 안 되겠나?”
“저기 나오는군요.”
“응?”
지귀객이었고, 공동파 인사들이었다.
지귀객은 지하로 내려가 공동파 인사들을 안정시켰고, 상황까지 설명한 후 이제 함께 올라오고 있던 터.
공동파 인사들은 하나같이 초췌한 몰골이었다. 햇빛 아래 서자 햇빛에 얻어맞은 것처럼 눈을 감고 비틀거렸다.
“어? 설마…….”
루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몇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입이 쩍 벌어졌다.
착각이겠지. 공동파 장로들이 아니겠지. 하지만 의복에 수놓아진 일곱 줄기 문양을 보고 확신했다.
“고, 공동파가 왜 여기…….”
감숙성 남서부에 있어야 할 공동파 장로들이 왜 이곳 태언장의 지하에서 나온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 있으니 루주는 이제 이유를 물을 것도 없었다.
공동파의 수뇌부가 잡혀 있었다.
태언장에.
이들을 구하려 했구나. 화공신타님까지!
무섭게 생겼지만 사실은 좋은 분이었네!
감탄만 나온 건 아니었다.
탄식도 터져나왔다.
태언장을 지척에 두고 있었음에도 하오문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
공동파 장문인 학정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조차 쉽지 않았다. 단전이 파괴되고 기경팔맥이 모조리 절단된 그의 손은 덜덜덜 떨렸기에 찻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결국 찻잔을 입에 가져가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장문인, 제가 도와드리죠”
마주한 건 어린 소녀.
소녀는 찻잔을 들어 학정이 마시기 좋게 잡아주었다.
후루룩. 따뜻한 차가 입안 가득 퍼져가니 학정이 지그시 눈을 감고 차를 음미했다.
얼마 만에 마시는 차인가.
1년이 훌쩍 넘는 시간.
1년 전에 시작된 지옥. 그 지옥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고맙소. 현음신녀.”
환혼되어 달라진 모습에 경악했지만 정작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들이닥친 이들에 의해 무공이 폐쇄되는 과정에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몸은 고통은 그 뒤의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공동의 제자들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에 비하면.
한 줄기 희망은 있었다.
지옥은 곧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공동의 뇌옥에 갇혀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희망의 유효기간은 단 칠 일.
뇌옥의 창살 너머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을 안겨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제일인의 자결.
후공의 죽음.
희망은 산산히 부서져나갔다.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마음을 뒤흔들려는 수작이겠지. 하루하루 지나며 그 생각은 옅어졌고, 사라졌다.
후공은 오지 않았다.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가 왔다.
풍제도, 암향야도. 검선과 검존도.
그리고 눈앞에 있는 빙궁의 현음신녀도.
“신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현음신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꿈이에요. 좋은 꿈.”
“멋진 꿈이로군요.”
“저도 꿈을 꾼 적이 있답니다.”
“막 어린 소녀가 되었을 때였습니까?”
“맞아요. 제 꿈에도 천화서고 대공자가 찾아왔었죠.”
“그는 꿈을 걷는 사람인가 봅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기도 해요.”
“놀랍습니다.”
“그래요. 그는 놀라운 사람이에요.”
“대공자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틀림없죠.”
대화를 나누며 안정을 찾은 학정은 이제 혼자서도 찻잔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신녀, 바뀐 제 모습이 어떻습니까?”
“저는 어떤가요?”
“보기 좋습니다. 마치 예쁘고 상냥한 제 손녀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고마워요.”
“사실입니다.”
“한데 장문인은…… 못생겼습니다.”
“하하하하하!”
갇혀 지낸 것이 1년여.
공동파 장문인 학정은 비로소 다시 웃음을 찾았다.
대화는 이어졌다.
현음은 본래의 몸을 돌려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묻기도 했다.
학정은 물음에 하나하나 답했다.
새로 얻은 몸. 본래는 안령비. 그 기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기에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
다른 곳에서도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광충, 뇌극파, 안령비.
그중에 광충은 없었다.
광충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두 다리가 쓸려나간 광충은 황망히 몇 번 숨을 내뱉다 황망히 최후를 맞은 터.
하지만 배에 구멍이 뚫린 뇌극파는 살아있었다. 숨이 꼴깍거리는 속에서 풍제와 마주했다.
그리고 이내,
풍제의 섭혼에 당했다.
눈동자는 이지를 상실했고, 물음에 답해갔다.
안령비는 검선과 검존의 손 아래 있었다.
공동파 인사들의 초췌한 모습을 보았기에 검선과 검존의 손속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교차 검증을 위해 각각 나뉘어진 가운데,
추혼자는…….
“암향야 님, 묻, 묻는 말에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당명과 마주했다.
하지만 물은 건 당명이 아니었다.
당명 곁에서 후공이 물었다.
“추혼자, 너의 공능이 기이하더군. 새가 시안조라고?”
“네, 시안조라 칭합니다.”
“운용할 수 있는 건 너 뿐인가?”
“아, 아닙니다. 운용의 묘를 익힌 자들이 여럿입니다.”
“몇이나 되지?”
“제가 아는 이들만…… 서른 명이 넘습니다.”
“그렇군. 넌 살려두면 도움이 될 듯하다.”
추혼자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살려둔다고 했다.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대공자는 날 활용하려는 것이로구나.’
하긴.
쓰임새가 많다.
“추혼자, 어떤 묘리인지 들어보자. 구술해 봐라.”
“지, 지금 말인가요?”
“물론.”
추혼자가 갸웃했다.
말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공법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천재라곤 해도 한 번 듣고 이해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이해도 이해지만 수행 또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살 수 있다면.
그리 약속했으니.
추혼자가 희망을 품고 입을 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