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숭산의 밤.
릉찬이 마음을 읽을 수는 없는 일.
릉찬의 눈에는 의혹만이 가득했다. 탐색하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후공은 그 눈빛이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일 년 반 전의 릉찬은 이러지 않았던 것이다. 눈은 죽어 있었고, 죽어버린 눈에 들어찬 건 백팔 나한의 피와 살점들이었다.
소림의 백팔 나한 중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검성의 마화 때였다.
당시 소림 장문인은 릉인.
릉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고, 릉찬은 선 채로 마음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백팔 나한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울지 않았지만, 통곡이 들렸고,
눈물이 없었지만, 이미 바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릉찬은 소림 방장이 되었고, 슬픔 대신 의심과 경계를 피어올리고 있으니 후공으로선 지금 모습이 훨씬 좋았다.
“대공자, 왜 대답이 없나?”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서운하다?”
“제 이야기를 믿지 않으시는 건 이해합니다만, 그 결론이 어찌하여 제가 소림의 보물을 노리는 것이 되는 걸까요?”
“아닌가? 난 그대의 말이 시비로 들리네만.”
환혼, 회영부, 풍제와 암향야 등.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 시비를 일으킨 다음, 그걸 빌미로 원하는 걸 얻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지금 웃는 건가?”
“저절로 웃음이 나는군요. 그냥 장문인께서 백팔 배를 드리고 계실 때 죽일 걸 그랬습니다.”
“……끄응.”
릉찬이 들릴 듯 말 듯 앓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보니 반박할 수 없었다.
곁에 있었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공자가 손을 썼다면? 두말할 나위 없었다. 즉사.
“장문인, 제가 한 번 살려드린 겁니다.”
“그대는 천재라더니 오만하기 짝이 없군.”
심기가 불편해진 릉찬이 고개를 절레거렸다.
살려주었다니. 세상 천지에 이런 셈법이 어딨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생명의 은인을 주장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아니, 있긴 했다.
사천당가주. 암향야.
방금 죽일 참이었는데 참았다면서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라고 했었다.
‘미친 자가 여기 또 있었군.’
이내 릉찬이 입을 열었다.
“곧 알 수 있겠지. 그대의 말에 그대가 풍제와 검선 등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네, 내일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같은 이야기겠지?”
“물론입니다. 장문인께선 지금부터 제게 건넬 사과의 말을 준비하고 계십시오.”
릉찬은 그만 터져버렸다.
웃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그냥 나와버린 터.
웃고 나니 릉찬은 기분이 묘해졌다.
내일 아무 일이 없다 해도 지금 마음으로는 그것도 괜찮다 싶을 정도. 왜인지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피어났다.
“대공자, 묵을 곳을 마련해 줄 테니 쉬도록 하게.”
“아닙니다. 저는 소림 부근의 객잔에 따로 방을 잡겠습니다.”
“흐음…….”
릉찬이 무겁게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자의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진 뒤였다. 따로 방을 잡겠다는 말이 들려올 때 이미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릉찬은,
방금 떠올렸던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취소.
고작 내일인데 소림사 밖에 머물겠다?
그건 어떻게 봐도 내일이면 거짓임이 들통날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렇지.
환혼이라니, 나를 환혼시킨다니.
환혼세력이 소림을 피로 물들인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런데 왜지?
‘왜 벌써 허전해지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떠난 천화서고 대공자인데, 릉찬은 대공자의 눈빛이 한동안 떠올라 미간을 찡그렸다.
그 밤, 흑야존은 어둠을 거뒀다.
하남성 북서 산문협을 지나면서였다.
이어 영락현 너머로 남하.
그곳 산야에서 뇌신존과 조우했다.
뇌신존은 회영십존 중 구존.
뇌신존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산야에는 오십여 검수와 시안조를 운용할 수 있는 추영자도 함께였다.
“흑야존.”
뇌신존이 무심한 얼굴로 반겼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 옅게 떠오른 의문의 빛에 흑야존이 답했다.
“태언장이 당했다.”
뇌신존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소림을 멸하는데 회영십존 중 둘은 과하다.
소림의 완전한 멸절은 후공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다. 후공이 살아있다면 그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
피와 살점이 소림에 흩뿌려져 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미쳐버릴 테니까. 거기에 더해 구대문파 장문인의 환혼까지 이루어지면 분명 전면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후공은 없는 것이다.
한데 태언장을 찾아낸 속도가 말로 할 수 없다.
광충까지 속절없이 당했다는 의미.
상황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후공이 함께한다고 봐야 하나?”
“그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그였으면 좋겠군.”
뇌신존의 말에 흑야존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피부가 드러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의 음영으로 드러났을 뿐.
“뇌신존, 자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럴 리가. 자신 있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지.”
뇌신존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불쾌함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났다.
파지직.
검푸른 머릿결에 뇌전이 일었고, 파란 눈동자 안쪽에서도 번개가 쳤다. 늘어뜨린 손에도.
쿠릉, 쿠릉.
작은 우레소리도 터져나왔다.
오행의 금(金).
금의 정화를 취한 뇌신존은 천둥이요, 우레였다.
반면 흑야존은 오행의 수(水).
빛을 삼키는 어둠이요, 고요였다.
어둠과 고요는 천둥을 삼킬 수 없고, 천둥은 어둠과 정적을 깨드려 요란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어둡다면,
더 고요하다면.
그런 천둥마저 삼켜버릴 아득한 어둠이라면.
흑야존이 그런 어둠이었다.
그런 어둠이 되었다. 자신의 수명을 깎아 올라섰다.
회영칠존이라 불리나 회영삼존에 올라도 될 정도로, 회영이존으로 불려도 될 정도로.
그러니 흑야존은 자신 있어도 된다.
소림을 멸절한 뒤, 그가 찾아온다 해도. 후공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흑야존은 자신이 있었고, 후공과 맞서 보고 싶었다.
자신의 어둠 속에서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몰락하는지 보고 싶었다.
“릉인, 아니 화영자는?”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면 합일에 이른다.”
“내일로 하지. 지금 소림의 상황은?”
“추영자!”
뇌신존의 부름에, 저쪽 편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추영자가 답했다.
“곧 당도합니다. 시안조의 시야에 소림이 들어왔습니다.”
추영자의 두 눈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후공은 소림을 벗어나지 않았다.
숭산의 동쪽 봉우리를 넘나들고 있었다. 중앙의 준극봉과 태실봉에 이어 소실봉에 이르렀을 때, 고개를 들었다.
숭산의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작은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별과 별 사이에 새들이 보였다.
철새들, 의미를 둘 수 없는 새들.
하지만 새 중에는 보이지 않는 새도 있다.
검은 깃털에 회색 깃털이 섞인 새라면 찾아내기 힘들다. 하늘을 날고 있어도 볼 수 없다. 심지어 달빛이 비치는 쪽의 깃털 색을 면밀히 바꾸는 새라면 더욱더.
한 마리 새가 선회하면서 시시각각 달빛의 위치를 따라 깃털 색이 바뀌고 있었다.
‘아니, 바꾸고 있다고 해야겠지.’
찾았다.
새의 시선이 훑어왔기에 후공은 바로 은신을 시전해 형체를 감췄다.
시안조였다. 깃털 색을 바꾼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의 눈동자가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어져 있는 선이 보였다.
서북쪽.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정찰인가.
서둘러 오길 잘했다. 예정된 시일은 빨라도 사흘이 남았다고 보았는데 시안조를 보다니.
후공은 손을 들어 시안조를 가리켰다.
스윽. 능오침이 다섯 손가락에 떠올랐다.
유유히 지나쳐 날아가는 시안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후공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손을 내렸다.
지금 시안조를 죽이면 적을 불러들이는 꼴.
회영부가 들이닥칠 것이다.
먼 거리에 있다 해도 하남성 내에 있다면 숭산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을 터.
그리 되면 소림을 전부 지키는 건 어렵다.
소림의 절반을 잃는다면 승리가 아니라 그건 패배다.
효과적인 전략이 필요했다.
소림을 설득할 수 있는가?
불가.
소림을 강제로 떠나게 할 수 있는가?
불가능.
그럼 소림은 그대로 둔다.
시간이 없고, 혼란만 부추기게 된다.
그렇게 혼란을 떠올렸을 때 대책도 떠올랐다.
늘 해오던 것.
적이 최우선으로 제거하고 싶어 할 표적이 되면 그만. 우선순위를 바꾸면 그만이다.
‘요즘 화공신타가 자주 되는군.’
능오침을 거둔 대신, 후공은 천향사주를 운용했다.
연향(聯香)!
한줄기 무향이 밤하늘로 빠르게 뻗어나가며 시안조를 뒤따랐다. 유유히 날던 시안조는 몸통에 향이 가득 닿았음에도 평온히 날았다.
천향의 선은 견고하게 이어졌고, 선명했다.
이어 후공이 교릉을 운용하려다 갸웃.
고개를 돌려 숭산의 중앙 준극봉을 바라봤다.
‘릉인?’
정확히는 준극봉의 한 암자였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 소림 장문인이었던 릉인이 머물고 있는 곳. 그곳으로부터 순간적으로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기묘하구나. 이럴 수 있나?’
릉인이 소림 방장의 지위에서 물러나 릉찬에게 장문인의 위를 건넨 건 강호의 일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미였다.
릉인은 백팔 나한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으며, 하루하루 지쳐갔다.
그리고 결국 최근에 이르러 물러났거늘, 연공이라니. 그럴 수 없다. 릉인은 불경을 외고 풀과 나무를 벗삼아 하루하루를 보내야 맞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환혼?’
확인해보자.
후공은 곧바로 준극봉의 암자로 향했다.
착각이라는 듯 암자로부터 특별한 기운은 뻗어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암자로 스며들었다. 릉인의 뒤편에서 좌정하고 있는 릉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묵상이 아니다. 운기행공 중. 기운이 주변으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환혼이라면 아직 합일에 이루지 못한 상황이요, 합일이 멀지 않은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확신하긴 일렀다. 환혼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쳐 확증해버리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법. 어떤 것도, 어떤 말도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린다.
그렇다고 머뭇거릴 일도 아니다.
그렇기에,
- 합일이 늦군. 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릉인이 흠칫했다.
서둘러 운기를 거둔 후 두리번거렸다.
그것도 잠시 릉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뇌신존?”
“후후,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라 놀랐습니다.”
- 이유가 있지.
“이유가 있습니까?”
- 뇌신존이 아니니까.
“헉!”
릉인, 아니 화영자가 주춤 물러났을 땐 이미 뻣뻣하게 굳은 뒤였다. 비명을 질러 보았지만 소리는 방 밖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누구?’
화영자의 놀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러다 들려왔다.
두드드득, 두드드득. 두드득.
‘이게 무슨 소리?’
굴리는 눈동자에 천천히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건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괴, 괴물……?’
화영자의 동공이 대지진을 일으켰다.
“낄낄낄낄! 킬킬킬킬킬!”
괴물이 괴상하게 웃었다.
웃음소리도 괴이해 화영자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괴물이 갸웃.
이내 찡그리며 시선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