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조용히. 죽은 척.
가끔 시간이 멈춘 것 같을 때가 있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질 때가 있다.
소란스러움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 소림이 그랬다.
사대금강 중 하나.
혜륜의 죽음을 바라보는 소림은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잠시,
툭!
뭔가가 내부에서 끊어져나갔다.
그건 아마도 두려움.
소림 중 누구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구부터인가는 중요치 않았다.
이성의 끈이 끊어진 순간, 소림승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밤의 허공을 뒤덮으며 화공신타를 향해 쏟아져갔다.
남은 세 명의 사대금강이었고, 십팔 나한이었으며, 백팔 나한들이었다.
상대는 강한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될 것인가?
그런 의문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아예 죽음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다.
“멈춰라! 모두 멈춰라!”
소림 장문인 릉찬의 고함소리도 소림승들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쏟아져오는 신형에,
“이게 뭐야? 내 눈, 내 눈!”
화공신타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밤하늘의 달과 별은 이제 볼 수 없었다. 날아드는 소림승들의 무수한 모습에 가려졌다. 하지만 달이 떠 있는 건 틀림없었다. 달빛을 받은 소림승들의 머리가 사방에서 반짝이는 것이다.
“이 새끼들아, 눈부셔!”
이 밤은 더 밝다.
작은 달들이 도대체 몇 개인가?
화공신타도 신형을 마주해 갔다.
하지만 소림에서 그걸 인지한 이는 없었다.
인지한 건,
쿠웅! 쿵!
순식간에 소림승 다섯이 지면에 처박힌 뒤였다.
어떻게 날려버린 건지, 그것이 손이었는지 발이었는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처박힌 소림승들은 비명 소리도 없었고,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소림승들은 연신 날아가 처 박혔다.
쿠웅, 쿠구궁! 쿠우웅!
짓쳐들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지면으로 또는 전각으로.
십팔 나한 중 다섯은 각각 미륵전과 관음전의 벽을 뚫고 사라졌고, 사대금강 중 하나는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 여래전의 지붕을 뚫고 떨어져내렸다.
“눈부시다고! 그리고 누가 그냥 오랬냐! 대환단을 가져오란 말이다!”
날아가 처박힌 이들 중 다시 몸을 일으킨 이들은 없었다. 불당을 뚫고 들어간 이들 중에도 그 누구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이 시팔 나한 새끼들!”
화공신타가 번뜩일 때마다, 고함 칠 때마다 소림승들 중 몇이 응답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아악!”
파앙!
화공신타의 발길이 스쳤다 싶을 땐 이미 벽이 무너지고 땅이 울렸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가 처박히는지 비명은 처박힌 뒤에야 터져나왔고, 또 그제야 피를 울컥대며 토해냈다.
그런 상황임에도 소림은 멈추지 않았다.
불길에 유혹당한 나방들처럼 화공신타를 향해 짓쳐들었다. 결과가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화공신타만 생각했다.
“하아…….”
그걸 지켜보는 릉찬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낯익은 광경이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과거 어느 때와 같았다.
검성의 마화 때, 백팔 나한이 저렇게 찢겨나갔다.
검은 연기로 화한 검성이 번뜩일 때마다 백팔 나한들의 몸이 갈라졌고,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떨어져나가 허공을 빙글 빙글 돌던 머리는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푸른 산야가 붉게 물들어갔다.
한데 다시.
이번엔 화공신타.
왜 소림에 이런 재앙이 닥쳐오는가.
이제야 겨우 그날의 절망이 옅어져 소림의 경내에 미소와 웃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거늘.
“누가 방장이냐! 당장 대환단을 가져와라!”
화공신타의 외침에 릉찬이 신형을 날리려 할 때였다.
“장문인!”
붙든 건 소림의 장로들이었다. 장문인이 나선다 한들 달라질 일이 무엇인가. 나방 한 마리가 불길에 보태질 뿐. 대환단을 가져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것만이 남은 소림 나한들을 살리는 길.
“이런 미친…….”
추영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시안조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 소림은 붕괴 직전. 화공신타의 무위는 자신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터.
“화공신타의 폭주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소림이 대환단을 건네겠다는 말을 했음에도 화공신타는…….”
추영자가 말을 멈췄다.
허전함이 느껴져 두리번거리니 뇌신존과 흑야존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거참……. 세상 일 모른다더니.”
추영자는 다시금 고개를 절레거렸다.
일이 우스워진 것이다.
소림의 멸절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한 일.
원래 계획이라면 내일.
전대 장문인 릉인의 몸을 차지한 화영자가 현 소림의 장문인 릉찬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될 일이었다. 릉찬 이후엔 장로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다음 회영십존인 뇌신자와 흑야존이 소림을 멸절.
그렇게 핏물에 잠긴 소림에서 기다릴 이는 풍제와 암향야, 검선과 천화서고 대공자등의 일행.
거기에 후공이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이 회영십존의 생각이었거늘, 난데없다.
화공신타라니.
그러니 우스워졌다.
회영십존의 등장에 소림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여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일 리가.
화공신타보다 더한 지옥임을 알게 된 후 소림의 표정은 어떻게 될까? 어디에서 오신 대협이시냐며 감사를 표할 때 목이 떨어져나간다면 소림의 당혹감은 어느 정도일까?
“흐흐, 이것도 나쁘지 않군.”
- 흑야존.
신형은 흑야존보다 뇌신존이 더 빨랐다.
금의 정화 중의 정화.
금정을 취한 뇌신존은 번개와 같았다.
파지지직, 파지직!
- 화공신타는 내가 처리한다.
먹구름 속에서 푸른 뇌전이 지면으로 직격하듯 흑야존의 어둠에 잠기지 않고, 빠르게 나아가니 번개빛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산이었다가 숲이었다가,
마을이었다 싶을 땐 강을 지났다.
숲을 돌파하면서 그가 지나친 나무들이 새카맣게 타들어갔고, 곁을 스친 산돼지는 피한다고 피했지만 뇌전의 영역에서는 벗어나지 못해 뇌전에 몸부림치다 자지러지며 튀겨졌다.
큰 강물 위는 두 차례 디디며 건넜다.
파지지지직!
하얗고 푸른 뇌전이 강물에 닿으면서 기괴한 소리가 났고, 그가 강물을 한참이나 벗어난 뒤에는 죽은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이제 소림은 지척이었다.
시야에 숭산이 들어왔고, 가까워졌으며, 소리도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늦어, 이 새끼들아!”
화공신타의 고함소리, 그리고 소림의 비명소리.
또 누군가 대환단을 가져가라고 외치는 소리까지.
“미친 새끼.”
화공신타에 대한 이야기는 뇌신존도 듣긴 했다.
그보다 미친 자는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였고, 그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사문이 어디인지, 왜 그렇게 흉측한 몰골인지, 그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든 것이 모호함 그 자체.
하지만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놈의 모호함은 오늘로 끝.
화공신타는 무릎을 꿇은 채 피를 울컥댈 것이고, 흉악한 얼굴에 비굴한 표정을 띄우고 살려달라고 애걸하게 될 테니.
이제 숭산은 눈 앞.
뇌신존이 신형을 높이 솟구쳤다.
그가 소림 경내를 내려다볼 때, 화공신타가 고개를 쳐들었다.
“넌 또 뭐야?”
“머리가 기네?”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뇌전.
번개가 화공신타를 향해 내리꽂혔다.
화공신타의 신형이 귀신처럼 뒤로 물러나면서 방금까지 딛고 서 있던 자리가 검게 그을렸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공신타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너 뭐하는 새낀데 벼락을 쳐 버리냐! 아니 그보다 나한테 왜 그래!”
대답할 가치가 있는가?
화공신타의 외모는 추영자에게 들었던 것보다 더 흉측하고 목소리는 쇠가 갈리는 소리. 말하는 내용 또한 저속하기 이를 데 없다.
뇌신존이 신형을 쏘아갔다.
내뻗은 우수에서 우레가 터졌다.
쿠르릉, 쿠궁!
화공신타는 이번엔 달랐다. 정면으로 마주쳐갔다.
투콰앙!
거대하고 기이한 폭발음이 터져나왔고, 푸른 뇌전에 밤하늘이 순간 밝아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튕겨나가 지면에 처박혔다.
쿵!
누가 처박힌 것인가?
소림은 보고 있었음에도 정작 보지 못했다.
서로 부딪혔고, 한 사람이 튕겨나갔다는 것 정도.
어떤 수법이 교차된 것인지,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인지도 전혀 알아볼 길이 없었다.
파지지직. 천천히 하강하는 이의 몸 주변에 뇌전을 본 후에야 승부의 결과를 이해했다.
누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누구는 경악성을 토해냈다.
“저 화공신타가?”
“누구기에?”
소림 장문인 릉찬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성의 혈겁 때는 후공이 왔었다.
그 후공이 떠난 후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겼거늘,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릉찬이 합장을 하며 예를 갖췄다.
“은인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십니까?”
“은인?”
뇌신존이 웃음을 흘렸다.
그 느낌이 기묘해 릉찬이 갸웃할 때, 뇌신존이 손으로 릉찬을 가리켰다.
“듣기 좋군. 근데 어쩌나…….”
“널 죽여야겠는데?”
릉찬이 눈을 부릅떴다.
부릅뜬 릉찬의 눈에 갈지자 형태로 뻗어오는 푸른 뇌전이 점점 커졌고 가득찼다.
그때였다.
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앙아아아아아앙!
릉찬의 눈동자에 새로운 광채가 떠올랐다.
네 줄기 자줏빛 광채였다. 죽음을 머금고 다가오던 푸른 뇌전을 휘감아 토막내고는 허공을 선회했다.
그 직후, 릉찬은 어느새 자신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뒷모습이 낯익었다.
화공신타의 흑의. 하지만 체형이 전혀 달랐다. 이 낯익음은 화공신타가 아니다. 이건……?
“대, 대공자?”
놀란 건 비단 릉찬만이 아니었다.
아직 서 있는 소림승들도 영문을 몰라하며 바라봤고, 뇌신존조차 눈이 가늘어진 채 고개를 갸웃했다.
후공이 뇌신존을 일견한 후, 릉찬을 향해 돌아섰다.
입가에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놀랐나 보네?”
“내가 화공신타라서?”
“아니면 네가 내 손에 죽게 된다는 걸 깨달아서?”
“……???”
릉찬이 주춤 물러났을 땐, 어느샌가 어깨가 잡혔다.
“뭐? 후후, 대공자가 뭐?”
“네놈이 어찌…….”
릉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득, 우드득. 어깨 뼈가 엇갈리면서 틀어졌다 싶을 때 복부가 화끈해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토해내며 날아가 여래전의 기둥을 뚫고 파묻혔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화공신타였다니……. 그리고…….’
감쪽같이 속았다.
피를 울컥대며 릉찬은 자신이 속은 것이 분해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게도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다.
기둥이 부서진 것도 격산타우의 묘용이었다. 자신이 강타당한 기운은 모조리 기둥으로 전이 되었다.
피를 토한 것도 뭉쳐 있는 어혈.
토해내는 것이 좋은 피였다.
뼈는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부러진 곳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격받을 때 들려온 전음.
- 장문인! 조용히. 죽은 척.
그러니 소림 나한 중 죽은 자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처럼 들었을 테니.
환혼, 회영부, 소림의 멸절.
대공자의 말은 사실이었고, 대공자는 소림을 지키려 화공신타가 된 것이었다.
그건 처박힌 모든 소림승들이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 조용히. 죽은 척.
모두 들었다.
모두 멀쩡했다.
처음 모가지가 돌아가 나뒹군 혜륜조차 꺾이는 순간 어떤 기운이 휘감아 어째서인지 전혀 목이 아프지 않았기에 최대한 호흡을 가늘게 가져가면서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열렬히 대공자를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