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보관된 자는 자신이 보관된 걸 모른다.
회영십존 중 하나. 영원을 꿈꿨던 자.
천년을 지나 만년의 생을 꿈꿨던 자는 한낱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갔다. 의복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나갔다.
분명 소멸의 광경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답고 신비하게 보였다.
후공이 그 곁에 있었다.
산산히 부서지고 흩어져 가는 먼지 속에서 작은 구슬을 보고 있었다.
검은 구슬임에도 기묘한 광채를 발하는 구슬을 향해 후공이 손을 뻗었다. 손에 닿는 순간, 구슬은 기운이 되어 손으로 스며들었다.
물의 정화 중의 정화, 수극(水極)이었다.
삼악이 수극의 기운을 취하려 포악하게 달려들었고, 화극과 금극은 단정히 호응했다.
이로서 후공이 취한 오행의 극은 셋.
‘할 일이 많군.’
금극과 수극은 화극과는 다르다.
화극을 즉시 다룰 수 있었던 건 열폭존자가 용암 위 열주에 요결을 남겨 두었기 때문.
그러니 금극과 수극을 화극처럼 다루려면 그에 맞는 공법을 새로 창안해야 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이건 그저 시간의 문제.
또 해야 할 일이라면?
오행의 극 중 남은 둘을 취하는 것.
목(木)과 토(土)의 극.
이것도 시간 문제다.
곧 얻게 된다.
회영십존, 아니 이제 회영팔존. 그중 둘이 목극과 토극을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대공자!”
후공은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소림 장문인 릉찬이 부르는 목소리였고, 지상에서 모든 소림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공은 잠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훑었다.
밝게 빛나는 달과 별, 그 아래 날고 있는 새들. 그 새들 속에 시안조.
시안조는 한 무리의 새 떼 속에 그 무리인 양 스며들어 있었지만, 천향의 선은 정확히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직은 붙잡을 때가 아니기에 후공은 그저 밤하늘의 풍경을 둘러본 것처럼 꾸민 후, 지상에 내려섰다.
“대공자, 이 빈승이 어리석었네. 고맙네.”
릉찬이 머리를 숙여 예를 취한 다음,
모든 소림이 그 뒤를 따랐다.
“소림이 대공자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입을 모아 외친 목소리가 숭산을 울렸다.
누구 할 것 없이 진심을 담았기에 그 울림은 컸다.
아마 겪지 않았다면 이런 울림은 없었을 것이다.
극한의 어둠과 정적 속에서 소림이 할 수 있었던 건 두려움에 떨었을 뿐이다. 더듬거렸고 넘어졌고, 외쳐 부르고 또 울었을 뿐이었다.
영원한 어둠에 갇힌 것 같았고,
시간도 멈춘 것만 같았다.
한데 화공신타가 나타났다.
대공자가 찬란한 빛이 되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공자, 소림은 오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네.”
릉찬이 다시금 마음을 전했다.
후공은 다정히 미소 지었다.
“그럼 대환단?”
“주실 겁니까? 안 주실 겁니까?”
“안 주면?”
“이번엔 죽은 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릉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림도 따라 웃었다.
정녕 대공자가 대환단을 원하고 한 일이겠는가.
이미 아득한 경지에 오른 대공자에게 대환단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새삼 대공자가 대단해 보였다.
놀랍게도 대공자는 고작 말 몇 마디로 소림에 내려앉은 무거운 분위기를 뒤흔들어 웃음을 안겨준 것이다.
그렇다 해도 원한다면 줄 수 있었다.
몇 개라도, 전부라도.
아니, 대공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소림은 대환단을 건네주고 싶어졌다.
그 가운데 혜륜이 다가갔다.
목이 돌아가 꽃게처럼 달려야 했지만 혜륜의 얼굴은 밝았다.
“저기, 대공자님! 제 모가지를…….”
“나중에.”
이제 모가지가 제대로 돌아오겠다 싶었던 혜륜은 잠시 보류당했다.
“네?”
혜륜이 반문했을 땐,
후공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시안조가 돌아가고 있었다.
추영자는 잠시 망설였을 뿐이었다.
바삐 신형을 날리며 도주했다.
망설였던 건 보았음에도 결과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
순식간에 불타 죽은 뇌신존의 모습에 놀라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고, 흑야존의 죽음에는 자신이 잠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흑야존의 죽음은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을 자각한 건 소림에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을 때였다.
‘도망쳐야 해!’
천화서고 대공자는 회영십존 중 둘을 죽인 이.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나도 놀라운데 둘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붙잡힐 수도 있다. 숭산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천화서고 대공자가 시안조를 알아차린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려움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도주에는 오십여 검수가 함께했다.
말해도 믿기 힘든 상황이지만 검수들을 설득하는 건 쉬웠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창백하기 질린 안색과 흔들리는 눈동자, 떨리는 손이면 충분했다.
“모두 흩어져라!”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안해진 추영자가 명을 내렸다. 두려움에 전염된 오십여 검수가 뿔뿔이 흩어졌다.
신형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기도 했고, 옆쪽을 흘깃거리기도 했다. 뒤쫓는 기척은 없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꾸만 뒤돌아봤다.
두 명의 회영십존을 멸한 이다.
그런 이를 볼 수 있을 리가.
그런 자의 기척을 들을 수 있을 리가.
그 생각대로였다.
스윽!
함께 달리던 세 명의 검수 중 하나의 머리가 썰려나갔다.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고꾸라졌지만,
풀썩.
머리를 잃은 몸이 처박히면서 구르는 소리가 났고, 떠오른 머리는 나중에 떨어졌다.
남은 두 명의 검수는 멈추지 않았다.
‘왔다!’
‘제발, 제발!’
마음으로 빌며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내달렸지만 이미 자줏빛 광채는 한 검수의 몸을 돌파한 뒤였다.
남은 한 명의 검수가 멈춰 주춤거렸다.
“살려주…….”
스악!
쾌는 자비 없이 검수의 목을 관통한 후 새로운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주인의 의식 범위 안에 있었기에 관통해야 할 적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번과 친, 검령도 같았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고 있었지만 빠르게 쫓아가 타격한 후 다음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그쯤 추영자도 인지했다.
‘온다. 온다…….’
인지했기에 지독한 공포에 시달렸다.
비명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다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다.
스윽, 풀썩. 이런 소리들.
그리고 살려 달라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와 도망치라는 절규도 들었다. 덕분에 그의 혈색은 분을 칠한 듯 새하얗게 질렸고, 심장은 터져나갈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도망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을까? 제발 살려줘. 아니, 살려주십시오. 부처님, 부처님! 부디 자비의 손길을 제게 내려주십시오. 절대로 이렇게 죽을 순 없어! 개새끼야, 제발 그만 따라오라고! 살려만 준다면 평생 산속에 파묻혀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종교도 없는 주제에 갑자기 신실한 종교인이 되었다가 욕을 하기도 했고, 빌어도 보았다.
뒤를 돌아볼 순 없었다.
뒤를 돌아본 순간 보게 될 것 같고, 눈이 마주칠 것만 같은 것이다.
추영자의 선택은 옳았다.
후공은 어느샌가 그의 뒤에 있었고, 돌아보았다면 눈도 마주쳤을 터.
숲속을 뚫고 지나는 가운데 후공이 추영자를 향해 손을 튕겼다. 두 개의 기운이 추영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듯 안착했지만 추영자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대신,
‘왜……?’
눈을 부릅떴다.
추영자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잠이 온다고?’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오는 것이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기운을 너무 소모했기 때문인가?
긴장이 풀어지고,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추영자는 조금 더 달리다 멈췄다.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잠이 쏟아져 몸이 축 늘어져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잠을 떨쳐내려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머리도 뒤흔들었다. 그제야 겨우 감기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이제 검수들의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 죽은 건가? 천화서고 대공자는 다 죽였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 행운이 찾아올 수 있는 건가? 설마 그것 때문인가? 내가 부처님을 불러서? 젠장, 잠이 와!’
탁! 탁!
다시 잠이 쏟아져 추영자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격했다. 통하지 않았다. 각성을 위해 스스로를 점혈하여 자극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래, 그런 것이겠지. 자비로운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겠지. 어쨌든 소림은 살아남았으니까. 부처님은 기분이 좋은 것이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졸음이 무거운 산악처럼 짓눌러온 터라 추영자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고 싶었다.
이젠 대공자가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을 지경이었다. 잠든 사이 목이 날아가도 자고 싶어졌다.
‘자야 해……. 자야 해……. 안 돼! 제발 정신 차려!’
다리가 풀리면서 몸이 휘청.
머리를 몇 대 때리고 머리를 휘저은 다음 시안조를 불렀다.
숲 위를 날던 시안조가 내려왔다.
‘여기는…… 아니야. 동굴…… 동굴을 찾아라.’
시안조가 날아올랐다. 멀리 가진 않았다.
그곳을 향해 추영자가 비틀대면서 걸음을 옮겼다. 거의 발을 질질 끌다시피 했고, 급기야 앞으로 넘어진 후에는 무릎으로 기어갔다.
동굴이 보였을 땐, 시야는 가물거렸다.
겨우 동굴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널브러졌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거웠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동굴 천장이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릿해졌다.
의식이 아득해지기 전 추영자는 필사적으로 시안조에게 뜻을 전했다.
‘무너뜨…….’
다 전하진 못했지만 시안조는 이해했다.
깊이 잠든 주인을 한차례 바라본 후 동굴 입구로 날아가 날개를 연신 휘둘렀다.
쿠릉, 쿠르릉.
날갯짓에 동굴 입구가 무너져내렸고, 작은 틈만 남았다.
그 틈으로 빠져나간 시안조가 잠시 그 주변을 맴돌며 탐색했다가 이내 더 높이 솟구쳐올라 크게 배회하며 주변 지역을 살폈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하지만 틀렸다.
없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을 뿐이었다.
후공은 계속 곁에 있었고,
지금은 동굴 앞쪽에 있었다.
‘보관은 되었고!’
이내 은신을 유지하며 유유히 신형을 날렸다.
소림사 경내로 향하진 않았다.
구겨진 릉인을 향해 나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 대공자! 끔찍한 일이네.”
소림 장문인 릉찬과 여러 장로들이 이미 그곳에 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
“하아……! 사형이, 나의 사형께서 이미 놈들에게 당해 고통 받고 있었네! 계속해서 구겨지고 뒤틀리면서 멈추지 않고, 멈출 수조차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후공이 미간을 좁히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실로 지독하군요.”
“자, 자네는 혹시 멈출 수 있겠나?”
“네, 가능합니다.”
“사실인가? 놀랍네. 그대는 정녕 불가능이 없군.”
“장문인, 불가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응?”
릉찬이 고개를 갸웃할 때, 들려왔다.
“제가 이렇게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