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그를 기억해라.
뱜을 가로질러 화산으로 돌아가는 길.
후공은 시선을 돌려 일행을 바라봤다.
풍제, 검선, 현음신녀.
그리고 새로 합류한 건 추굉자.
추굉자는 여전히 섭혼에 빠져 있었기에, 눈빛과 표정은 어떤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추굉자를 살려둔 건 안내자의 용도.
이미 한 놈을 동굴에 보관해두고 있었지만, 안내자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날고 있는 시안조를 바라볼 때, 풍제의 전음이 들려왔다.
- 대형, 환혼을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환혼진 앞에서 사흘 내내 석상처럼 서 있던 대형이 깨어났을 때 표정이 밝았기에 풍제는 그리 짐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 아니.
-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습니까?
- 이해는 했다. 문제는 재료들이야.
- 흐음…….
풍제는 침음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환혼이 성공한 후 본 것이다. 환혼진은 소실. 서른두 개의 깃발과 천잠사는 먼지처럼 부서져내렸고, 땅에 파묻은 열두 개의 흑주석은 가루가 되었다.
환혼진은 다시 활용할 수 없다.
오직 한 번의 환혼에 하나의 환혼진.
재료가 문제라고 했으니, 풍제는 천화서고를 통해서도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 흑주석이라면 구할 수 있지만 깃발은 어려워. 모산이 하나의 오행기를 제련하는 데 수백 년을 쏟아붓는 걸 생각하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테지.
- 그럼 회수가 빠르겠군요.
- 두 개는 확보해 두자. 하나는 당명이 회수해 올 테고…….
- 다른 하나는 무당?
- 그래, 무당이 가깝지. 네가 현음신녀와 다녀와라. 나는 연공이 필요하고, 검선은 따로 보낼 곳이 있다.
풍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의 성향을 모를까. 검선을 어디로 보낼지에 대해선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
의논한 내용을 바탕으로 현음과 검선에게 뜻을 전하니 현음은 바로 동의했고, 검선은 갸웃했다.
“나와 대공자는 왜? 풍제, 화산에 우리 둘이 굳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소? 함께 갑시다. 환혼진을 회수하는 중차대한 일에 빠져서야 쓰나.”
“후후,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거추장스럽게.”
“아니 잠깐만. 풍제, 지금 거추장스럽다고 했소? 내가 거추장스럽다고? 어디 다시 말해 보시오!”
“거.추.장.”
풍제가 한 자씩 끊어서 또박또박 말했기에,
검선이 발작을 일으켰다.
“아니, 마교 놈들 진짜!”
그땐 이미 풍제와 현음이 방향을 틀어 무당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화산에 도착한 건 세 사람.
아무도 없는 화산의 고요함은 깊었고 을씨년스러웠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검선은 기분이 묘해졌다.
어린 날부터 수많은 밤과 수많은 낮을 화산에서 보내온 검선으로선 이 풍경이 낯선 것이다.
그래서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이곳이 화산인 것도.
낯익은 바람결이다. 그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가고, 매화가 피어 있지 않음에도 매화향이 나는 것 같은 이곳이 화산이 아니면 어디겠는가.
‘보고 싶구나.’
눈앞에서 직접 들었기에,
들은 순간 떠올렸기에,
검선은 화산의 장문인인 능소가 보고 싶어졌다.
듣게 되면 떠올리고 만다.
환혼된 사질이 팔과 다리를 잃고 당혹할 모습, 그리고 이어 눈이 뽑히고 혀가 잘려나가는 모습. 피가 분출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모습.
그 순간의 심정까지 떠올랐기에…….
사실 그때부터 보고 싶어졌다.
“검선.”
검선이 급히 상념을 거두고 대공자를 바라봤다.
“왜 그러나? 지금이라도 함께 무당으로 가고 싶은 건가?”
“저는 가지 않습니다.”
“흠, 자네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후후, 왜 그렇습니까?”
“어떨 땐 세상 부지런하고, 또 어떨 때 보면 세상만사 귀찮아하는 것 같으니 하는 말이네.”
“혼자 다녀오십시오.”
검선이 갸웃했다가 웃어 보였다.
“그럴까?”
“한데, 가셔야 할 곳은 무당이 아닙니다.”
“그럼?”
“화산 장문인을 만나고 오십시오.”
검선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음을 들킨 것이다.
마치 대공자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니, 한참이나 멍청해지고 말았다.
“검선께서 화산의 종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으시겠지요.”
“허허, 자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내가 왜 사질을 만나러 가!”
“풍제께서 제게 그리 부탁하였는데…… 싫으시면 편한 대로 하십시오.”
“풍제가?”
사실 그런 적 없었지만 후공은 풍제에게 떠넘겼다.
이 생각은 일비신수를 통해 화산 장문인의 미래를 들었을 때부터 하고 있었다.
검선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당장 만나고 싶을 거라고. 검선은 서둘러 보고 싶을 거라고.
“거참, 풍제는 날 뭘로 보고.”
“안 가시렵니까?”
“생각 없네.”
“그렇습니까?”
“뭐 그래도…… 마교 교주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후환도 두렵고.”
후공은 곧바로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탁월하십니다.”
“하하하하! 좋네. 내 다녀오도록 하지. 자네는 쉬고 있게.”
“오실 때는 양손 가득.”
“하하하, 물론이네.”
검선이 신형을 솟구쳤다.
그 어느 때보다 빨라 보였기에 후공은 너털거리고 말았다.
이어 가까운 전각으로 들어갔다.
지필묵을 가져와 서신을 작성하니, 창문을 통해 들어온 색관조가 얼른 아는 척했다.
[주인님, 주인님! 천화서고로 보내는 서신일까요?]
“크흠……. 넌 멍청해졌구나.”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 저 진짜 바보 멍청이가 되었나 봐요. 까르르르르르르!]
색관조가 날개를 끌어와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바보 멍청이! 죽어, 죽어!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까르르르르르르!]
[그윽, 그윽, 그윽!]
덩달아 금섬도 색관조의 머리를 마구 두드렸다.
[그러니까 가야 할 곳은 제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 거죠?]
“이런…… 금방 똑똑해졌네?”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 난 천재 색관조! 왜냐면 주인님이 천재시니까!]
색관조가 방 안을 휘저으며 날아다녔기에 후공은 금섬을 불렀다.
“금섬아.”
[그윽!]
“네가 들고 가거라.”
금섬이 공손히 서신을 받았다.
[주인님, 그래서 어디로 가요?]
“약왕문. 남궁세가의 서쪽에 있다. 찾을 수 있겠지?”
[그럼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뚝딱인걸요. 아참, 근데요. 약왕문이 안 믿으면 어떻게 해요? 말하는 새가 사기 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약왕문이 내 필체를 알고 있으니 서신을 보여주면 반가워할 것이다.”
약왕문에 친필로 진법을 남겨 전수하였기에 서신을 본다면 약왕문이 모를 수 없었다.
[주인님, 이제 우리 가요!]
[금방 또 봐요!]
약왕문에 보낸 서신은 원신단을 얻기 위함.
자신에겐 더 이상 원신단이 의미없었지만 동행하는 이들에겐 도움이 될 터였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회영부의 회영십존 중 아직 팔존이 남아 있고, 그들 너머에는 더 큰 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인님, 벌써 보고 싶어요.]
[진짜인데요오오오오!]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색관조와 금섬의 목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후공은 좌정에 들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금극과 수극을 활용할 수 있는 공법을 창안해야 하고, 환혼에 대해서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환혼에 대해선 이 천재적인 두뇌가 원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
환혼진을 개선시킬 수 있는 길. 환혼진을 변형해 간소화시킬 수도 있겠다 싶고, 심지어 환혼진이 없이도 환혼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순 없겠지만, 그 길을 찾게 된다면 의미는 크다.
이미 환혼되어 몸을 빼앗긴 이들.
그들을 쉽게 되돌려 놓을 수 있을 테니.
후공이 연공에 든 밤.
검선은 곳곳을 누볐고, 이내 찾아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많은 문인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답은 화산의 속가.
여러 속가를 살폈고, 그곳마다 화산의 제자들이 무사히 모여 있음을 확인한 후 멈춘 건 청운장이었다.
“사숙? 사수우우욱?”
능량이 제일 먼저 보았고,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선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뭘 그리 놀라느냐.”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 어떻게?”
검선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능량.”
“백 대.”
능량이 울상을 지었다.
“아니 사숙, 농담 한마디 했다고 백 대부터 시작하는 게 어딨습니까!”
“이백 대.”
“장문 사형, 살려주십시오. 살아 돌아온 사숙이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아아아아아!”
그땐 이미 화산 장문인 능소와 장로들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사숙!”
“사숙, 어떻게 여길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검선이 다시금 껄껄 웃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보니 그저 반갑고 기분이 좋은 것이다.
특히 반가운 마음이 드는 건 능소를 보면서였다.
“능소야.”
“네, 사숙.”
장문인 능소가 앞으로 나서며 예를 취했다.
능소가 몸을 바로 했을 때, 검선이 능소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허허, 팔도 튼튼하고…….”
이어 검선이 다리를 내려다봤다.
“다리도 튼튼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봤다.
“눈도 호수처럼 맑구나.”
“사숙, 왜 그러십니까?”
“이런, 말도 잘하는구나.”
장문인 능소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숙은 소탈한 면모를 지녀 농담을 곧잘 하곤 했지만 어째 오늘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이다.
또 눈이 호수 같고, 말도 잘한다니.
팔다리가 튼튼한 건 또 뭐란 말인가?
“사숙……. 어릴 때처럼 패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검선이 크게 웃음을 터뜨린 후 능소를 끌어안았다.
능소가 순간 멍청해졌다.
“아니, 정말 징그럽게 왜 이러는 겁니까! 돌아버리신 겁니까!”
“하하하! 그래, 돌았다. 완전히 돌아버린 것 같구나. 하하하하하!”
“사숙, 그만 좀 놓으시란 말입니다!”
장문인 능소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능량이며 장로들이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검선이다. 떼어지질 않았다.
“사숙, 제발 좀 그만 하십시오!”
“어디서 약을 하고 오신 겁니까?”
“약왕문에 다녀오신 겁니까? 거기서 이상한 약을 드신 겁니까?”
그럼에도 검선은 손을 풀지 않았다.
끔찍한 모습을 떠올렸던 건 얼마 전이었다.
이 밤이었다.
“능소야, 감사를 표해라.”
“누구에게 말입니까? 아니, 그전에 좀 떨어지시란 말입니다아아아아!”
“누구긴.”
검선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대공자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능소는 처참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고, 화산은 환혼된 매향자의 손에 무슨 일인지도 모를 암격을 당해 혼란에 빠졌을 터.
심지어 자신이 화산에 머물고 있었다 해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기억해라.”
“천화서고 대공자를 잊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