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악인곡.
원신단.
일정 시간 기운을 증폭시킨다.
본래의 경지를 순간적으로 뛰어넘는다. 이는 마치 잠력을 격발하는 것과 같다.
차이점이라면 잠력 격발은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 잠력 격발의 순간부터 죽음은 예정되어 피할 수 없으나, 원신단은 어떤 부작용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악용될 소지가 커, 약왕문은 대외적으로 원신단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고 말해오곤 했다.
그런 원신단을 가져왔다고 하니…….
검선이 색관조에게 다가갔다.
“한번 보자. 원신단은 어디에 있지? 그 비단 주머니는 아닐 테고.”
검선의 시선이 금섬이 움켜쥐고 있는 청록색 비단 주머니를 보았지만 이내 눈길을 돌렸다. 비단 주머니가 작긴 해도 묵직해 보여서였다. 원신단이라고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아 보이는 것이다.
잠자리나 무당벌레가 들어 있겠지.
비단 주머니가 아깝구만, 따위를 생각할 때였다.
[그윽.]
금섬이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검선은 갸웃.
“여기에 원신단이 들어있다는 거냐?”
[극!]
금섬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검선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아니 원신단을 곤충들과 함께 넣어두면 곤충들이 뜯어…….”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비단 주머니를 열어본 순간 검선은 굳어버렸다.
약향이 확 풍겼고, 곤충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신 작은 환약이 거의 스무 개가 넘었다.
“무, 무슨……?”
“검선, 왜 그러는 거요?”
검존이 다가와 내려다봤고, 현음신녀도 뒤를 이었다.
이내 두 사람은 멍해졌다.
“이게 다 원신단이라고?”
“원신단이 맞아요.”
검존은 본 적이 없었고, 현음신녀는 견식한 적이 있었다. 귀운종과의 일전 때 복용할 기회를 얻었었다.
“하아……. 보고 있자니 말이 안나오는 군요. 약왕문주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렇지 않나요, 암향야?”
돌아버린 것 아니냐는 말에 당명이 웃었다.
“약왕문주 용악이 돌아버린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렇죠?”
“한데 그런 용악을 대공자가 제정신으로 돌려놨다고 하더군. 후후, 그 정도의 은혜면 약왕문 입장에서 원신단이 아까울 리가.”
“어…….”
다시금 현음이 멍해졌다.
대공자의 마음이 읽혀서였다.
회영부와의 일전에서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다시 하루. 또 하루.
대공자의 연공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번씩 들여다보아도 대공자는 늘 같은 모습. 흐트러짐 없는 좌정한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모두들 하염없이 기다릴 따름이었다.
“허허, 신기한 일이오.”
“뭐가 말인가요?”
검선의 말에 현음이 물었다.
검선이 저만치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풍제와 암향야가 이렇게 참을성이 많을 줄 몰랐소이다.”
“하하, 그렇네요.”
현음도 동감이었다.
대공자가 환혼진 앞에서 사흘을 보낼 때도 풍제는 불평 한마디 없었는데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는 모습인 것이다. 암향야까지도.
이 와중에 연공이 말이 되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인가!
새파란 애송이가 강호의 명숙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이런 식의 불만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풍제며 암향야며 세월아, 네월아였다.
“한데 이 노도는 슬슬 걱정이 되는데, 두 분은 어떻소이까?”
두 사람의 대화에 검존이 끼어들었다.
검선과 현음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가 너무 욕심을 낸다 싶긴 하오.”
“저도요.”
“흠, 그럼 이쯤에서 말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대공자가 화기(火氣)를 다루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행의 기운 중 대공자가 화의 극을 취한 듯한데, 거기에 더해 소림에서 얻은 수와 금의 극을 활용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소이까.”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듣긴 했었다.
회영십존 중 둘.
뇌전을 일으키는 자와 어둠을 불러오는 이.
그들을 멸하고 대공자가 수극과 금극을 취했다 들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의 연공은 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행의 모든 극을 한 사람이 다 취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일인가요?”
“허허, 터무니없는 소리외다. 대자연이라면 모를까. 어떤 신체가 있어 그 기운을 모두 감당할 수 있겠소.”
“그럼 지금 대공자는 수극과 금극을 녹여내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현음신녀의 말에 검존이 공감하며 살을 붙였다.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수극과 금극을 남겨 둔다 해도 정작 활용하려면 공법을 창안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하루 이틀로 될 일이오.”
대공자가 천재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학문의 성취나 진법의 변조라면 모를까, 오행의 정화인 수극과 금극의 활용은 거의 무공을 새롭게 창안해야 하는 일이므로 사정이 아예 다르다.
하루 이틀이 뭔가.
일 년이라 해도 경이롭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대공자는 수극과 금극을 녹여내고 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검존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봄날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 하늘이?”
검존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이 순간 어두워진 것이다. 마치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과 같고, 저녁이 시작될 때의 하늘과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현음신녀와 검선도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두워진 건 하늘만이 아니었다. 분명 대낮이었는데 옅게 흑무가 흐르듯 주변조차 삽시간에 어두워진 것이다.
“소리가 옅어집니다.”
“소리까지 잠식된다면. 서, 설마…….”
빛을 가두고, 소리를 멸한다.
소림에서 들었던 바, 이는 회영십존 중 하나인 흑야존의 공능과 흡사했기에 할 말을 잃었다.
반면 풍제와 당명의 반응은 달랐다.
예상했었고 기대하고 있던 광경이었기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대형이 누군가.
무학의 천재. 천하제일인.
스스로 창안한 무공은 기묘하고 그 무공의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대형이라면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던 터.
지금의 현상은 자연의 기현상이 아니라, 수극이 활용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해 모든 빛과 소리를 삼키지 못했지만, 중요한 건 활용할 공법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모두가 대공자가 머물던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방 안도 어두웠고, 대공자는 더 어두웠다.
분명 백의를 걸치고 있는 걸 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거무스름하게 보였고, 얼굴도 피부색도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번쩍!
대공자가 눈을 떴다.
눈동자에서 황금빛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기에,
“허어…….”
“대, 대공자!”
“눈이 어찌하여…….”
검선과 검존, 현음신녀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번개가 작렬하고 있는 건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대공자의 전신에서 푸른 뇌전이 몸을 타고 흐르고 있는 것이다.
“대공자, 설마하니 수극과 금극을 활용할 공법을 찾은 것인가?”
정확히는 찾았다기보단 창안한 것.
수극은 수극오주라 명명했고, 금극은 금극삼주라 정했다.
이로서 오행 중 활용할 수 있게 된 건 셋.
화극과 수극, 그리고 금극.
오행 중 삼극의 공존은 삼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삼극(三極)의 불균형을 삼악이 조율하였고, 화극이 그러했듯 수극과 금극도 삼악에게 기운을 내주면서도 독립적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면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환혼진에 관한 것.
간소화할 수 있는 방편을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수극과 금극의 공법의 완성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하나의 가능성은 보았다.
오행의 극을 모두 취했을 때, 아직 얻지 못한 목극과 토극을 취했을 때.
그때가 되면 환혼에 접목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불씨를 본 것이다.
후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을 거둬들이고 뇌전을 갈무리하며 모두를 향해 예를 취했다.
“네, 찾았습니다. 운이 좋았고, 또 모든 분들께서 너그럽게 기다려 주신 덕분입니다.”
“운? 운이라고? 자넨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검선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건 말없이 입만 벌리고 있던 검존과 현음신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도 마음으로는 이미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어떤 행운이 공법을 만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순 없다.
그 앞까지 인도는 할 수 있을지언정.
놀라움은 이어졌다.
원신단이 배분된 것이다.
“이, 이렇게나?”
“허허, 너무 많은 것 아닌가?”
검선과 검존이 원신단을 받아들고서도 이걸 받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얼굴로 바라봤다.
각자에게 주어진 원신단이 넷.
약왕문에서 보내온 원신단이 총 서른 개였기에 여섯 사람에게 골고루 분배했음에도 남았지만, 그럼에도 건네받은 네 개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하다 싶은 것이다.
“뭐 싫으시다면야.”
“줘놓고는!”
대공자가 빼앗으려 했기에 검존과 검선이 얼른 손을 숨겼다. 그 모습에 현음신녀도 재빨리 소맷자락에 잘 챙겨 넣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이제부터 추적인가요?”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간단했다.
이미 잡아둔 추굉자와 시안조가 있으니 돌려보내고 그 뒤를 밟으면 된다.
섭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굉자는 충실한 길 안내자가 될 것이었다.
모두가 그 의견에 동감을 표할 때였다.
“흐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대공자, 들어보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자.
현음이 경청할 준비를 했고, 모두가 시선을 모았다.
“제가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도 있고, 우리 쪽이 회영부보다 정보의 우위에 서 있으니 그 점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그렇긴 하네.”
검선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환혼시킨다는 회영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을 지체함에 따라 회영부는 계획이 어긋났음을 이미 보고받았을 터.
“그들이 숨을 수도 있다는 건가?”
검존도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정보의 우위라면 누가 어떻게 구대문파를 감추었는지 모를 회영부가 당혹하여 숨어드는 건 아닐까 싶었다.
“회영십존을 직접 겪어 보니, 그들이 숨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아예 회영부의 상대를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영부의 상대라면?”
현음신녀가 갸웃했다가 말을 이었다.
“대공자, 그건 우리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우릴 어떻게 바꾸죠?”
“간단합니다.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하면 됩니다.”
검선과 검존, 그리고 현음신녀가 한참이나 멍해졌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태연한 건 풍제와 당명.
그리고 이 대화에 끼지 않고 주변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 현이신녀뿐이었다.
“대공자, 우리가 실종되면 누가 회영부와 싸운단 말인가?”
“우리가 싸웁니다.”
“아니 대체 뭔 소린가? 우리가 실종되었는데 우리가 또 싸우다니?”
검선이 미간을 찡그렸고,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 검존도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공자, 조금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안 되나?”
“쯧쯧쯧. 다들 대가리는 뒀다 어디에 쓰려는 건지!”
혀를 찬 건 당명.
척하면 알아듣겠구만 그걸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다는 얼굴로 대형 대신 나섰다.
“모두 역용을 하면 되는 걸 뭔 친절을 베풀라 말라야!”
바로 검선이 반박했다.
“암향야, 여기에서 역용이 가능한 건 풍제와 대공자뿐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대공자가 말을 꺼냈으니 해줄 테지!”
“으잉?”
검선이 대공자를 바라봤다.
그런 검선을 향해 후공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선,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못생기게 만드는 건 자신 있습니다!”
“그, 그래?”
“다들 못생겨져서 새로운 조직이 되시죠.”
“어떤 조직?”
후공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내,
“악인곡!”